돌이켜 보면 나의 학창 시절과 청춘은 대체로 어두웠던 것 같다.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었으련만, 그때는 내게 그것이 퍽이나 가혹해서 매 순간 버거웠었다. 진심으로 라디오와 음악이 있어 그 시절을 통과해올 수 있었다. 내가 라디오 PD가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깊고도 진실한 마음은 '슬픔'이 아닐까 한다. 슬플 때마다, 힘들 때마다 음악이 곁에 있었다. 그때 이 음악들이 나의 위로였고, 나의 구원이었다.
그때 내가 살던 동네인 방배동 골목 작은 음반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음반 1장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음반을 통째로 마르고 닳도록 들었지만, 그중 제일은 LP B면의 첫 곡으로 슬며시 앉아있던 이 곡이다. 그들이 한사코 그러지 말라고 노래하던 모든 것들이 한없이 아쉽고 슬펐더랬다.
톰 웨이츠(Tom Waits) / Ol'55 / 1973
어쩌면 가장 큰 위로는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모두가 다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일상의 고단함이 엄습해 올 때 이 노래는 그것을 일깨워준다. 원, 투, 쓰리, 포(카운트 다운).. 짧은 피아노 인트로 뒤로 밀려오는 그의 메마른 목소리는 그 어떤 미성보다도 신산한 삶을 위무하는 힘이 있다.
보즈 스캑스(Boz Scaggs) / We're all alone / 1976
마이클 잭슨이 아무리 'You are not alone'이라고 노래해도 우리는 모두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보즈 스캑스가 만든 노래로 프랭키 발리가 제일 먼저 불렀고 후에 리타 쿨리지의 노래로 가장 크게 히트했지만, 역시 원작자인 보즈 스캑스의 노래를 앞설 수는 없다. 더구나 뒤에는 곧 토토의 멤버가 될 이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으니 그 또한 믿음직스럽다.
동물원 / 잊혀지는 것 / 1988
잊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동물원은 모든 것은 잊혀지는 것이라고 담담히 노래한다. 무심히 흐르는 시간에게 용서란 없다. 사랑도 꿈도 끝내는 잊히고, 우리는 서로의 타인이 되고야 만다. '그 모두는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간다'. 김광석이 아무리 절창이어도, 그의 다시 부르기마저도 동물원의 원곡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뉴 트롤스(New Trolls) / Adagio(Shadows) / 1971
클래식과 칸초네의 유구한 전통을 간직한 이태리 프로그레시브 록의 색채는 영국 밴드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 그룹 뉴 트롤스의 이 노래는 처음 바이올린 소리가 흐르는 순간부터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다. 지금도 내가 라디오에서 슬픈 노래를 틀어야 할 때 언제나 맨 처음 떠올리는 노래이다.
카멜(Camel) / Stationary traveller / 1984
입대를 앞두고 마음이 황량하던 시절 지금은 사라진 부천의 음악다방 <수목>에서 듣고 또 들었던 음악이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피 우는 기타 소리. 처음에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목 놓아 운다. 앤드류 레이티머의 기타를 뒷받침하는 건반의 주인공은 톤 셔펜질, 카약의 창단 주역인 그는 이때 잠깐 카멜로 이적했었다.
마치 연극의 종막에서 암전 후 배우의 목소리만 남은 것처럼 악기들이 모두 빠지고 리버브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만이 아련히 사라져가는 이 노래의 엔딩을 듣고 있으면 나는 항상 비지스의 <First of May>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두 노래의 계절적 배경도 똑같이 겨울이다. 마음이 차갑다. 그런데 노래에서 눈은 내리지 않고 자꾸 올라간다. 이영훈은 탁월하다.
라디오헤드(Radiohead) / Exit music / 1997
이제는 난수표 같은 음악 속으로 숨어버린 라디오헤드가 그 옛날 남긴 역작이다. 누군가는 세상에는 라디오헤드류와 아닌 류의 두 가지 음악밖에 없다고 했을 만큼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 라디오헤드류의 정체가 무엇이던가? 바로 극한의 멜랑콜리, 극단의 우울이 아니던가? 그들이 온 세상 곳곳에 우울의 씨앗을 마구마구 흩뿌리던 시절이었다.
카리 브렘네스(Kari Bremnes) / Waltz / 2003
그해 여름 출장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난 어느 평론가는 북구의 음악이 왜 슬픈가라는 어찌 보면 유치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대지는 넓은데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근본적인 외로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출장 도중 그곳에서 이 노래를 처음 만났다. 노래 안에 외로움이 산다는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브로콜리 너마저는 내가 대놓고 편애하는 밴드이지만, 그중에서도 최애곡은 이 노래다. 이 대체 불가의 정서를 지닌 밴드가 포착해 낸 보편적인 슬픔은 정말 너무나 보편적이서, 그래서 너무나 동감이 되어서 눈물을 자아내고야 만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하던 일을 멈춘 채로 한동안 멍했었다.
*정일서 PD 1995년부터 지금까지 26년째 KBS에서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던 귀에서 헤드폰을 빼는 일이 거의 없는 방송국에서도 소문난 음악광으로 예나 지금이나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음악 듣는 데 쓴다. 그동안 연출한 프로그램으로는 <황정민의 FM대행진>, <이금희의 가요산책>, <김광한의 골든팝스>, <전영혁의 음악세계>, <이상은의 사랑해요 FM>, <신화 이민우의 자유선언>,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이소라(강수지)의 메모리즈>,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 등이 있다. 저서로는 『팝 음악사의 라이벌들』, 『더 기타리스트』, 『365일 팝 음악사』, 『그 시절, 우리들의 팝송』, 『KBS FM 월드뮤직: 음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공저), 『당신과 하루키와 음악』(공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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