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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던스 “청춘이 키포인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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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Young'이라는 개념엔 왠지 모르게 엄청난 악센트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점점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어린 가수들이 마음껏 그들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음의 찬가를 들고 나타난 신인 혼성 그룹 프루던스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복고적인 감성과 현대적인 질감을 적절히 버무려 비슷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팀들은 많지만 이들은 젊음, 즉 청춘을 이야기하고 있다.

데뷔 EP 앨범 <While You Are Young>을 발매한 지 한 달도 안 된 9월의 첫날, 이즘 사무실로 프루던스의 두 멤버가 직접 방문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처음엔 다소 긴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음악 얘기를 시작하니 마스크 너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듯했다. 작곡과 프로듀싱을 책임지고 있는 지영, 그리고 작사와 보컬을 맡고 있는 지유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에게 용기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팀명 '프루던스'의 의미는.

지유 : 둘 다 신중한 성격이라 '신중함'이라는 뜻을 가진 프루던스(Prudence)로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처음 같이 작업한 '그대 이름은 Blue'의 이름과도 잘 어울려서 프루던스로 결정하게 됐다.

팀을 결성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지영 : 2019년 10월 정도에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여성 보컬을 찾고 있었다. 지인들에게 소개도 받고 인터넷으로 커버 영상이나 자작곡 올리시는 분들을 많이 검색했는데 지유 씨가 유독 눈에 띄더라. 목소리나 송라이팅이 너무 좋아 연락을 했고 홍대 연남동에 있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음악 얘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말문이 트였다.

원하는 음악적 이미지와 잘 맞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나.

지영 : 그 생각은 얼굴 보기 전부터 들었다. 지유가 인터넷에 올려둔 곡들을 들어봤는데 목소리가 내 음악이랑 너무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특정 음색을 정해둔 것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보컬에 맞춰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지유의 음색을 듣는 순간 상상이 구체적으로 완성됐다.

타이틀곡이 '그대 이름은 Blue'다.

지영 : 지유가 팀을 결성하기 전부터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파란색으로 표현한 가사를 미리 써뒀는데 이게 너무 마음에 들더라. 그래서 최대한 가사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쓴 곡이다.

지유 : 나 역시 어떤 노래가 나올지 엄청 기대했는데, 결과물을 듣자마자 너무 내 취향이었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사운드에 내가 쓴 가사까지 입히니 부를 때도 신이 났다.

가장 기분 좋게 부른 곡이 따로 있나.

지유 : 아무래도 앨범 제목이기도 한 'While you're young'을 뽑고 싶다. 젊음은 사랑 그 자체라 생각하고, 이 곡이 그 얘기다.

요즘 보면 젊음과 사랑이 그다지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재한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더 끌어올린 건가.

지유 : 아무래도 어릴 때는 순수하고 재는 거 없이 사랑할 수 있지 않나. 물론 진짜 어릴 때의 사랑만이 젊은 사랑이라고 보진 않는다. 연애 기간도 길어질수록 어떻게 보면 나이가 드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결론적으론 '사랑이 전부다' 이걸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 앨범의 스타일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지영 : 트렌디하지만 복고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유행하는 시티팝 스타일 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아마 1980년대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1980년대에 태어나서 직접적으로 당대의 음악을 듣고 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냥 디스코 음악이나 신스팝이 내 감성과 잘 맞는 것 같다.

크레딧을 보니 지영 님 혼자서 기타, 피아노, 베이스를 녹음하고 믹싱까지 했다. 평소 리얼 세션과 전자 음악의 비중을 어떻게 두는지.

지영 : 어릴 때부터 기타를 쳤고, 베이스랑 키보드도 좀 다룰 줄 알기 때문에 리얼 녹음이 필요할 때는 큰 무리가 없는 편이다. 드럼만 세션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전자적인 사운드는 20대 중반 이후에 개발된 취향인데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어 둘 다 동일하게 비중을 둔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도 수집해서 사용하고 있다. 가상 악기도 물론 훌륭하지만 예전 아날로그 신시사이저가 내는 소리도 많이 넣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레트로한 느낌도 강조되는 것 같다.

기반은 밴드 사운드지만 신시사이저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특별한 의도가 있을까.

지영 :의도라기보다는 다섯 곡의 작업 시기가 다 다르다. 처음 스케치를 3~4년 전에 했던 곡들의 경우엔 그 당시에 좋아했던 밴드들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가 있고, 제일 마지막에 쓴 'Festival'처럼 최근에 작업한 곡들은 아무래도 전자음악 쪽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트랙마다 프루던스의 변천사가 조금씩 들어가 있다.

각각의 곡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지영 : 청춘이 느끼는 다섯 가지 감정의 스펙트럼인 셈이다. 첫 곡 '그대 이름은 Blue'에는 기대와 이상이 담겨있다. 청춘은 어떤 모습일지, 나의 인생에 가장 푸르른 시기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는 느낌으로. '초상화'는 어린 시절의 시행착오와 그에 대한 불안함으로 생각한다. 타이틀곡 'While you're young'은 말 그대로 찬가다.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곡이다.'평행우주'에는 가장 찬란한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느껴지는 허전함과 상실을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Festival'은 초월에 가깝다. 어쨌든 인생은 축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다가도, 그냥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불꽃놀이 같은 걸 보고 깨닫는 것처럼. 짧고 아름다운 거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를 즐기자는 메시지다.

이번 EP를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주길 바라는지.

지유 : 계속 언급했듯 청춘이 키포인트다. 청춘을 마무리하는 사람, 청춘을 막 시작하는 사람, 그리고 청춘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 그러니까 청춘을 살아가는 모두가 자신의 시절을 떠올리면서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일종의 세대 차별이 아닌가.(웃음)

지유 : 본인이 청춘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다 청춘이라고 생각한다.(웃음)



풀 렝스 앨범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

지영 : 소속사에 몸 담기 전부터 데뷔 앨범은 EP로 계획했다. 롤링컬처원에 들어와서 'Drive my car'라는 곡을 먼저 싱글로 발매하게 되었고 당장은 음악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 다섯 곡의 미니 앨범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음악이라는 게 결국 라이브, 즉 관객과 만나는 걸 전제로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사실상 조금 어려운 시점이다. 그런 면에서 앨범의 발매 시점을 조금 미룰 계획은 없었나.

지영 : 그런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다. 원래 이번 EP를 작년에 내려고 했었는데 <Drive my car>를 싱글 앨범으로 먼저 발매하면서 예상보다 기간이 조금 늦춰진 케이스다. 당연히 처음부터 공연을 염두에 두고 만든 팀이라 많이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음악적으로 성장할 거고 취향도 계속 바뀔 테니까 지금 시점을 기록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지유 : 솔직히 막 힘든 적이 아직까지는 없었다.(웃음) 그래도 굳이 꼽자면 지금이 아닐까 싶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고 처음 해보는 일이 많다 보니까. 그만큼 더 잘 하고 싶어서 아무래도 마음고생도 하고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지영 : 주저하지 않고 20대 중반을 말하고 싶다. 이전 밴드(굿모닝달리)를 하기 전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자연스레 고민이 많았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남들은 학업도 마치고 하는데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고, 이게 제대로 된 커리어로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돌아보면 그때는 겪어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 주류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아이돌 음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지영 : 사실 부업으로 아이돌 콘서트 실시간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BTS, 블랙핑크, 세븐틴 이런 아티스트들 전부 실시간으로 현장에서 한 적도 많다 보니까 작년부터 거의 매주 아이돌 콘서트를 접하고 있는 상황이다. 솔직히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서 생소한 경험이긴 하지만 이 일을 오래 하면서 느낀 것도 많다. 수많은 국내외 팬들이 보는 만큼 저들이 갖고 있는 무언가, 즉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반응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지영 : 우선 비주얼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팬들 스스로가 참여할 수 있다는 점. 아이돌은 데뷔부터 소통이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팬들이 즐기기엔 훨씬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인디 밴드가 이들의 비교 대상으로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인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통의 폭이 좁아서 아쉽긴 하다.



작업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지유 : 가사를 쓰는 작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가끔은 정말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 마무리를 앞두고 어느 한 군데에서 막혀버리더라. 이런 게 창작의 고통인가 싶다. 그리고 녹음할 때 세심하게 집중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서 긴장이 많이 되곤 한다.

가사를 쓸 때 주로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

지유 :시집에서 영감을 주로 얻는다. 책이랑 영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영감을 자주 얻곤 한다. 대개 큰 틀만 챙기고 나머지는 상상으로 채우는 편이다.

본인을 음악가로 만든 가수나 앨범, 노래가 있다면?

지영 : 나는 계속 자미로콰이다. 어릴 적 악기를 배우면서 연주의 개념으로 음악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발견한 취향이 애시드 재즈다. 굿모닝달리에서 이를 많이 구사하려고 노력했었다. 

(▶ 자미로콰이 <Travelling Without Moving>,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IV>, 어스 윈드 앤 파이어 <All 'N All>, 팻 메스니 <Offramp>, 존 메이어 <Inside Wants Out>)

지유 : 노래 부를 때 기교를 심하게 넣는 스타일은 아니라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 그런 스타일의 곡들을 많이 찾아 듣게 되더라.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유재하 같은 목소리가 훨씬 감동적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체화하게 된 것 같다. 나는 내 목소리가 제일 좋다.(웃음)

(▶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검정치마 <Thirsty>, 시거레츠 애프터 섹스 <Cigarettes After Sex>, 블러 'There's no other way')

앞으로 활동에 있어 포부가 있다면.

지영 :일단 기대보다 좋은 성과를 얻고 있어서 출발이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작업에 목말라 있는 상태라 앞으로 많은 곡을 발표할 생각에 기대가 되기도 하고, 이 마음만 변치 않는다면 잘 풀릴 것 같다. 열심히 하다 보면 코로나 사태도 종결되어서 공연할 기회도 생길 거라 믿는다.(웃음)



프루던스 (Prudence) - While You Ar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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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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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이끌어갈 천재의 등장, 카니예 웨스트의 'The College Drop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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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던 2000년대 초, 카니예 웨스트는 칼을 갈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프로 활동을 시작해 로카펠라의 스태프 프로듀서로서 신생 레이블의 도약을 도모하며 업계의 제일가는 작곡가로 성장한 그이지만, 그 이상을 꿈꿨다. 제이 지의 <The Blueprint>, 앨리샤 키스의 'You don't know my name' 등 많은 히트작을 낳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야심은 무대 뒤가 아닌 비트 위, 직접 가사를 뱉는 데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 힙합 신은 카니예 웨스트에게 래퍼 자리를 내어줄 만큼 분위기가 자비롭지 못했다. 거칠고 마초적인 래퍼가 공고하게 주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제이 지가 있었고, 피프티 센트를 비롯한 갱스터 랩이 인기였다. 그에 반해 카니예의 배경을 보자. 대학교수인 어머니와 미술 대학까지 진학한 나름의 학력을 가진 중산층이지 않은가. 안정적인 환경이 래퍼가 되는 데에는 제동을 거는 법이다. 모두가 그에게 비트만 따내려 했지 로커스(Rawkus Records)도, 캐피톨(Capitol Records)도 래퍼로 그를 원하지 않은 이유다.


 

신예의 도전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인 로커펠라와 그 수장 데이먼 대시의 역할이 중추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 데뷔작의 제작은 결정적인 한 사건에 기인한다. 2002년 가을, 카니예 웨스트는 늦은 새벽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정면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거의 그를 죽일 뻔한 사고로 턱과 다리에 심한 골절을 입고 입원 신세를 졌다. 본의 아니게 맞이한 시간과 자유. 스물다섯 열정 많은 청년은 이를 인생의 '터닝 포인트'쯤으로 여긴 듯하다. 사고 후 2주 만에 선공개 싱글 'Through the wire' 작업에 나섰고, 이는 힙합 역사를 영원히 뒤바꾸어 놓을 앨범의 신호탄이 됐다.

<The College Dropout>의 파급력은 여러모로 막강했다. 우선, '칩멍크 소울(chipmunk soul)' 프로덕션을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한 앨범이다. 칩멍크 소울이란 알앤비&소울 보컬을 샘플링해 음정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해체, 재배열을 거쳐 비트에 녹여내는 작법을 말한다. 저스트 블레이즈와 함께 제이 지의 <Blueprint>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그의 이 주특기가 본작에서야말로 제대로 꽃피었다는 게 중론이다. 1990년대 중반 우탱 클랜의 프로듀서 르자가 방법을 제시했다면 카니예는 그걸 일정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수록곡 열두 곡에 사용된 열네 개의 샘플에서 공동작곡 두 곡을 제외하면 모두 셀프 프로듀싱. 래퍼로서의 출사표이지만, 이를 아우르는 프로듀로서의 압도적인 역량이 우선이다.


 

진가는 당시 힙합 신의 주된 내용을 크게 벗어난 랩에서도 두드러졌다. 16세기 삽화 책에 영감받은 배경에 앙증맞은 곰 인형으로 마감질한 커버와 줄무늬 폴로 셔츠를 빼입고 나온 외형처럼 앨범은 곧 힙합 관습의 타파를 의미했다. 향락과 폭력성의 철저한 배제! 그는 여기서 '갭 매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Spaceship)' 평범한 대학 중퇴생 신분을 감추지 않는다. 그 보통의 시선을 당당히 드러내며 인종, 교육, 종교 등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담았다. 이는 나아가 후대 힙합이 포용하는 캐릭터성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졸업식에 쓸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선생님의 부탁 'Intro'를 돈벌이에 찌든 또래의 넋두리 'We don't care'로 맞받아치는 순간 작품에 대한 예고는 끝난 것이다. 예사롭지만 이 뼛속까지 삐딱한 젊은이의 날 선 비판과 유머는 로린 힐 'Mystery of iniquity'를 흥겹게 가져온 'All falls down'에서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를 꼬집고, 'Two words'에서는 사랑도 브레이크도 없는 무자비한 조국('United States, no love, no brakes')을 쥐어뜯는다. '모두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부자들이 가장 자존감이 낮'고 '마약 거래로 백인들만 주머니를 두둑이 채우'는('All falls down') 사회는 청년의 눈에 그저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결정타는 'Jesus walks'다. '예수만 빼고 다 이야기해도 된대(They say you can rap about anything except for Jesus)'라 미디어의 획일화를 비판하고 종교적 가치관을 축약하는 곡이다. 총과 마약으로 득실대던 힙합 신에 신실한 찬송가다. 그는 아무래도 '쿨'해 보이는 것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듯하다. 'Never let me down'에서 민권 운동 시대를 싸운 선조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매우 유기적인 배치로 학력주의를 비꼰 여섯 개의 스킷 트랙으로 이 모든 전개가 실제로 대학을 중퇴한 그의 시간적 배경을 뒤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Family business'가 따뜻한 가족 이야기로 화자와 청자 사이의 묘한 유대감을 만드는 것은 덤이다.


 

그러나 이 걸작의 가치는 단 한 순간, 'Through the wire'를 거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교통사고 일화를 세밀하게 풀어놓는 노래 속 그의 랩은 실제로 '턱에 철사를 단' 채 녹음해 발음마저 어눌하다. 놀라운 수준의 입체감, 실재감이다. 샤카 칸의 히트곡 'Through the fire'를 샘플링해 치밀하게 피치와 위치를 매만진 비트는 힙합 역사상 가장 멋진 칩멍크 프로덕션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비극을 승리로 맞바꾸는 챔피언(But I'm a champion, so I turned tragedy to triumph)'의 자세로 음악을 향한 열의를 강변하고 있는 이 데뷔곡을 카니예 커리어 사상 최고의 싱글이라 칭하고 싶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올랐고 히트 싱글 'Slow jamz'(1위), 'All falls down'(7위), 'Jesus walks'(13위)를 배출했으며 판매고는 400만 장을 넘겼다. 평단의 호응은 그 이상이었다. 『스핀』과 『NME』 등 다수 매체가 입을 모아 음반을 그해 베스트 앨범 리스트에 상위권으로 안착시켰고 그래미는 최우수 랩 앨범과 최우수 랩 노래 등 3개 부문 상을 안겼다. 롤링스톤이 작년 개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장'에서는 74위에 오르며 후대에 끼친 파급력을 인정받았다. 'All falls down'에 피쳐링한 실리나 존슨과 로카펠라 A&R 키암보 조슈아(Kyambo Joshua)는 '제이 콜과 켄드릭 라마 등 리리시즘 래퍼에게 큰 영향을 준 클래식'이라 평가했다.

극적인 인생 서사나 거친 자기과시 없이도 자연스럽게 녹여낸 자기에 대한 기록과 사회 참여, 눈앞에 펼친 현재의 담담하고도 날카로운 저술. <The College Dropout>은 힙합 신에서 관습에 섣불리 매몰되거나 음악적 자아와 실제 자아가 충돌해 '가짜'가 되고 마는 뮤지션이 범람할수록 그 위력이 거대해질 앨범이다. 확실한 주무기, 선구적인 문법으로 옹골차게 메꾼 히트 넘버만으로도 마냥 즐겁고 또 놀랍다. 21세기 힙합을 선도할 천재는 이토록 영민하고도 화려한 등장으로 그가 일으킬 파장을 예고했다.



Kanye West (카니예 웨스트) - The College Drop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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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로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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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의 거대한 물줄기와 같은 '동아기획', 청춘의 소리를 대표하는 대학로 '학전 소극장'. 두 음악 공간을 거쳐온 뮤지션 8팀(김현철, 장필순, 조규찬, 박학기, 함춘호, 동물원, 여행스케치, 유리상자)이 <아카이브 K-ON> 콘서트에 모여 8090년대의 역사를 불렀다. 10월 22-23일, 한남동 블루스퀘어는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그 추억을 함께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K팝의 산실 앞에서 어머니들은 응원봉을 흔드는 소녀가 되었고 아버님들은 함께 아티스트의 히트곡을 곱씹으셨다. 20대 필자에겐 굉장히 낯설지만, 익숙한 내음이 나는 이틀이었다.

블루스퀘어에 발을 디딘 순간, 꽤 높은 연령의 관객층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2-30대가 드물게 보여 뮤지션 활동 시기 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인터넷 서비스 '아프리카TV'에서 동시 송출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사용하는 플랫폼 도입을 통해 연령의 균형을 맞추면서 코로나를 걱정하는 이들을 위한 적절한 온택트(On-tact) 방안이었다.



포문을 연 첫 타자는 조규찬이었다. 그는 음악과 이야기에 담긴 온기를 강조하며 알앤비로 따스함을 전달했다. 'Baby baby',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의 주인공 '무지개'와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작곡한 'Thank you (for saving my life)' 그리고 '백구'까지. 현란한 애드리브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박학기는 보사노바 풍의 '향기로운 추억'으로 자연스레 순서를 이어갔다. 공기를 확 바꾼 '비타민'은 5살의 귀여운 꼬마와 함께 노래를 불러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으며 '아직 내 가슴속엔 니가 살아'와 김현철과의 듀엣곡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는 박학기 특유의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김현철의 노래는 30년의 시간을 지녔다. 1집의 '동네', '오랜만에'는 중년층의 공감을 자아냈다면 시티 팝의 'City breeze & Love song'과 'Drive'로 현 세대의 무드를 아우르기도 했다. 화려한 발재간의 '왜 그래'에서는 어머님들이 응원봉을 더 세차게 흔드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아티스트와 달리 선곡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자부심이 여실히 드러났다. 대미를 장식한 동물원 역시 전 세대가 알 법한 명곡들을 선보였다. 정통 포크의 '혜화동'과 짧게 들려준 '거리에서'와 '말하지 못한 내 사랑'. 그리고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로 한껏 목가적인 느낌을 발산했고 모든 출연진은 함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로 무대를 갈무리했다.



단독 콘서트로도 모자란 가요계의 거물들을 한데 모아 팀당 4-5개 트랙을 노래한다 했을 때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히려 이는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는 적당한 러닝 타임이며 적은 선곡 중 과연 어떤 트랙을 고를지 유추하는 재미도 있었다. 1일 차는 라이브 콘서트의 정석이었다.

2일차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캄캄한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처음 등장한 건 포크 밴드 시인과 촌장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함춘호였다. 출연자 중 가장 선배인 그가 의자에 걸터 앉아 전한 첫 곡은 '가시나무'. 가창은 없었지만 기타 연주 하나만으로 포크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여기에 1일차와 달리 바로 장필순이 가세하며 그의 대표곡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불렀다. 가을에 어울리는 허스키 보이스가 쌀쌀해진 날씨를 포근하게 감쌌고 '제비꽃', '어느새', 그리고 '그대로 있어주면 돼'까지 엄청난 몰입감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최고라 칭송받는 선배 가수들을 초반부로 배치해 진중한 분위기로 압도하는 공연 구성은 난생처음이었다. 함춘호의 연주 위를 흐른 건 장필순 만이 아니었다. 전날 공연을 펼쳤던 박학기가 객원으로 합류해 아름다운 하모니의 '풍경'을 그려내는가 하면 발라드 듀오 유리상자와 함께 시적인 노랫말로 '사랑일기'를 써 내려가기도 했다. 특히 유리상자의 박승화는 박학기가 입었던 니트를 입고 등장해 이들의 돈독한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유리상자 역시 '신부에게', '사랑해도 될까요'를 넘어 1997년 데뷔곡 '순애보'를 열창하며 학전 소극장 시절을 추억했다.

마지막 순서는 화려함보단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했던 포크록 밴드 여행스케치였다. 첫 곡 '별이 진다네'는 귀뚜라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골 풍경을 담아내며 팀 이름에 걸맞은 스케치 능력을 뽐냈다. 최근 방송을 통해 재회한 이선아, 윤사라, 성윤용도 팀을 이끌어 온 루카(조병석)와 남준봉과 함께 관객 앞에서 입을 맞췄다. 메들리와 더불어 '운명', '옛 친구에게', 그리고 '산다는 건 다 그런게 아니겠니'로 돌아본 이들의 과거는 많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앙코르 무대에 오른 모든 출연진은 '내일이 찾아오면'을 합창했고 팬데믹 이후의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며 대화합의 장을 마무리했다.



길거리를 전전하던 가수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정해진 객석은 물론 예비 좌석까지 끌어모아야 했던 그 시절. 당대의 소극장 공연 문화는 필자를 포함한 현대의 젊은 세대가 온전히 공감하기 힘든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 형성한 연대가 소중한 음악 유산들을 30~40년이 넘는 지금까지 전하고 있고 그 가치를 몸소 증명하고 있다. 어색함보단 반가움과 포옹만이 감돌았던 <아카이브 K-ON>이 소통이 부재한 시대에 작은 공감의 불씨를 지핀 만큼 우리의 K팝 아카이빙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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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10년마다 아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팝이 항상 곁에 있으리라는 증거죠”

밴드 아메리카의 멤버 제리 벡클리(Gerry Beckley)의 말처럼, 아바(ABBA)만큼 팝 역사 전반에 걸쳐 골고루 존재감을 드러낸 밴드는 손에 꼽는다. 1972년 결성 직후 공전의 히트곡을 남기며 세계 시장을 호령한 스웨덴 출신의 4인조 혼성 그룹은 불과 10년의 짧은 활동을 끝으로 해체의 길을 걸었지만, 여러 작품과 매체를 통해 후에도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팀이다.

11월 5일, 10개의 신곡이 담긴 아바의 정규 9집 <Voyage>가 발매되었다. 좋은 음악으로 선한 영향력을 전파해온 그들의 새 시대를 향한 발걸음을 맞이하여, IZM 필자들이 모여 그들의 일대기를 10가지 키워드로 간략하게 요약했다. 이미 아바의 이름이 익숙한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에 젖어들 매개체로, 그리고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스웨덴

아바를 대표하는 수식어 중 하나는 바로 '스웨덴의 국민가수'다. 정보의 접근이 어려웠던 1970년대의 경우, 그들을 통해 스웨덴을 알게 되는 현상이 적잖아 생길 만큼 자국을 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이었기에 붙은 칭호다. 더군다나 비(非)영어권 아티스트가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 스웨덴에서는 무려 국가의 주력 상품이었던 볼보 자동차의 매출보다도 아바 한 팀이 창출한 수익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국가와 세대 간의 대통합을 일궈낸 것은 전쟁도 국력도 아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수려한 멜로디였던 셈이다. 물론 지금의 스웨덴만큼 명실상부한 '댄스' 강국이 있을까.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 스웨디시 팝의 명맥을 이은 록시트와 에이스 오브 베이스, 현시대 일렉트로팝의 최고 디바 로빈(Robyn)과 프로듀서 계의 베테랑 맥스 마틴, 그리고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 악스웰 등 EDM 사단들이 아바의 자리를 단단히 채워냈다. 아바라는 대선배의 역사가 후배들에게 남긴 교훈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멜로디'의 중요성이 아닐까 싶다.


 

미디어의 총아, 비주얼

MTV 개국 이전인 1970년대부터 영상과 음악의 시너지를 적극적으로 일궈낸 아바는 팝 뮤직비디오의 선구자였다. 1974년 'Waterloo'와 'Ring ring'을 시작으로 싱글 커트한 모든 곡들을 스토리와 퍼포먼스로 채운 영상으로 구현해 순회공연 없이도 미디어를 통해 세계를 접수했다. 예술성을 부각하며 아티스트에게 신비감을 부여하고자 했던 시류와 달리 스튜디오에서의 레코딩 장면부터 비욘과 아그네사의 자택 거실 등 그들의 생활을 담아낸 영상들은 대중적인 댄스 음악과 아바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매끄럽게 결합시켰고, 이는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영민하게 뮤직 프로모션 필름을 제작했던 아바의 방송 진출은 수월했다. 이들의 감각적인 뮤직비디오는 TV 방송국으로부터 환영받으며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호주의 <The Best of ABBA>와 같은 단독 쇼 프로그램을 제작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아바의 비디오그래피를 전담해온 라세 할스트룀(Lasse Hallström) 감독의 주도 하에 <ABBA: The Movie>로 영화 산업까지 진출했다. 스크린을 통해 비친 그룹의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키치적인 의상을 필두로 비주얼적인 면모도 덩달아 주목받았고, 이렇듯 비디오 매체의 중요성을 발굴한 아바의 영향력은 마돈나, 프린스, 마이클 잭슨과 같은 후대 아이콘들에게로 이어졌다.



1970년대의 부부 이데올로기

베트남 전쟁과 흑인 인권운동의 영향으로 1960년대 젊은이들은 기존 체제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거친 저항보단 자연스런 이탈을 택한 '히피즘'은 사회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기 위해 많은 부부들이 각자의 길로 갈라섰다. 그럼에도 음악이 매개체가 된 아바 멤버들의 결속은 강력했다. 무대에서 이뤄진 첫 만남은 음악적 교감을 넘어 또 하나의 가정으로 발전했고 사랑과 함께 불타오른 두 부부의 멜로디는 독신주의로 물든 1970년대의 시대상을 거스르며 아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너무 뜨겁게 타오른 탓인지 식는 속도도 빨랐다. 경쾌한 사운드로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갔던 'Knowing me, knowing you'는 정작 현실에서 마주한 부부 관계의 벽을 노래하고 있었고 이별의 암시는 끝내 비욘과 아그네사의 결별로 이어졌다. 여파는 혼인을 치른 지 얼마되지 않았던 베니, 프리다 부부에게도 미쳤고 이들 역시 3년이 되지 않는 기간을 끝으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웨덴 출신의 네 남녀는 시대가 짜놓은 각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The winner takes it all'의 역설처럼 그 끝엔 승자도 패자도 없었지만, 부부애와 이혼이란 상반된 사회 풍조가 완벽히 동고하는 가슴 아린 추억은 지금까지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호주는 왜 아바에 열광했는가?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혼란해져 있던 1976년 호주. 국민들은 아바 음악을 듣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듯 보였다. 모두가 이 스웨덴 밴드의 말랑하고 유쾌한 멜로디에 미쳐 있었다. 히트곡 발굴의 귀재였던 몰리 멜드럼(Molly Meldrum)이 이끄는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 <카운트다운>에서 진원이 발생하더니 아이들은 1969년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보다 아바 영상을 더 애청했다. 이들의 히트 공세는 무려 이랬다. 'Fernando' 14주 1위, 'Mamma mia' 10주 1위, 'Dancing queen' 8주 1위, 'Money, money, money' 6주 1위. 그리고 1977년 2월, 이 컬트적인 움직임은 순회공연에서 마침내 폭발을 맞는다.

그것은 광기였다. 너무 멀어 가수들이 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조국에 장시간 비행의 제약을 뚫고 무려 열 한 편의 무대를 기획하며 달려와 준 아바에 시드니 공항에서는 2,000명의 팬이 모여 아우성으로 응답했다. 3월 3일 첫 공연이 있던 날,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물기 젖은 무대 위로 프리다(Frida)가 미끄러지며 노래했다. 정신을 놓은 관중은 진흙을 뒤집어쓰는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도 표정만큼은 밝은 채 열광했다. 그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다. 격변의 시기로 나라가 힘들던 때 정성과 위로를 선물한 아바는 그렇게 호주인들에게 단순 인기 가수를 넘어 한 시대의 조각으로 각인됐다.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가수와 팬 사이의 각별한 사랑도 있는 법이다.



뮤지컬과 영화 - 맘마미아

그들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과 영화의 대흥행은 아바를 '영원한' 팝의 아이콘으로 등극시켰다. 시작은 1977년 공개된 영화 <ABBA : The Movie>였다. 호주 투어 다큐멘터리에 약간의 설정을 섞은 이 작품은 당시 큰 흥행을 하진 못했지만 2가지만은 확실히 새겼다. 비슷한 시기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건 비틀스, 티렉스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즉, 그만큼 인기가 뛰어났다. 둘째 넘쳐나는 히트곡. 영화에 사용된 많은 인기곡은 이후 <The Album>이란 이름으로 이들의 5번째 스튜디오 음반이 됐다.

유명세, 히트곡, 인기 등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며 197~80년대를 주름잡은 이들은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뮤지컬 <맘마 미아>로 도래하는 2000년대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23개의 노래로 짜인 주크박스 극은 '어머나'란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 원어 뜻 그대로 돌풍이 되어 세계를 휘감았다. 명맥은 2008년 영화화된 <맘마 미아!>로 이어진다. 자그마치 6억 3백만 달러의 수익. 10년 뒤인 2018년 <맘마 미아! 2>의 개봉은 당연한 절차였다. 이처럼 아바의 곡으로 재창작한 이차 가공물들의 대성공은 아바를 영원히 살게 했다.



찬란한 보컬 - 아그네사와 프리다

아바 음악은 매우 또렷하게 들린다. 이는 작곡 편곡의 걸출한 퀄리티와 호각을 이루는 두 여성 멤버의 기가 막힌 보컬에 기인한다. 일찍이 팀에 합류하기 전부터 각각 유망한 가수로서 주가를 올렸던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서로 대조되는,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목소리를 지녔다. 메조소프라노 톤에 선명도를 입힌 고음을 영합해 치밀하게 쌓아 올린 하모니는 스웨덴에서 바라본 오로라처럼 청명했다. 북유럽형의 수려한 외모가 대중을 유인했고 리드미컬한 곡조 위 자유롭게 유영하는 이들의 화음이 출구를 닫았다.

아바의 나머지 한 축을 담당하던 작곡 콤비 비욘과 베니는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그룹사운드에 이식하고자 악기들과 보컬을 겹겹이 레이어링해 차별성을 부여했다. 그렇게 탄생한 히트곡들로 아바는 공고한 성처럼 서 있는 듯 했지만 이면엔 모든 음을 한 옥타브 높게 요구했던 남편들의 혹사로 녹초가 된 보컬 라인들이 하중을 떠맡고 있었다. 당시 여느 록 보컬리스트들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넓은 음역대를 보유했던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고역을 거치면서도 찬란한 코러스를 일궈냈다.



환상의 작곡 콜라보 - 베니와 비욘

아바를 향한 오해 중 하나는 '두 여성이 메인이고 나머지 두 명은 병풍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며 그룹을 견인한 실질적 리더는 키보드의 베니와 기타의 비욘이다. 이 둘이 직조해낸 대표 곡들은 '아바 돌풍'을 불러일으켰고 존 레논-폴 매카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물론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귀에 맴도는 멜로디는 당대 비평가들에게 '매우 상업적이고 영미의 눈칫밥을 먹은 결과물'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모국 스웨덴은 이들의 흥행에 더 각박하게 굴었다.

이에 베니는 아바 음악의 뿌리는 유럽에 위치한다고 받아쳤다. 가장 신나는 곡에서도 깊숙한 저편에 북유럽의 우울한 정서가 자리 잡고 있고 사실 아바의 노래는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다면서 말이다. 이처럼 마냥 간단하고 경쾌한 듯해도 그룹의 곡은 수많은 오버 더빙과 겹겹이 쌓이고 확장된 멜로디의 배치로 이뤄져 있다. 즉, 복잡한 내부와 직관적인 포장이라는 치밀한 결과물을 내놓게 되었다. 더 놀라운 점은 두 콤비는 악보를 읽고 쓸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개입을 최소화한 자급자족 시스템을 그룹 초기부터 유지했다는 것이다.



저평가된 댄스

배철수는 방송에서 아바를 언급할 때면 곧잘 회고 조가 된다. 혈기왕성의 시절 경시했던 아바의 음악이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굳이 프로그레시브 록과 재즈의 엘리티즘을 거론하지 않아도 1970~1980년대의 대중음악 마니아와 평론가들이 아바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했음은 익히 들어왔다.

잘 팔리는 음악에 대한 질시 혹은 댄스 음악을 향한 편협한 시선이었을까? 감상용 음악과 안무를 동원한 퍼포먼스의 우와 열을 나눈 일종의 낙인. 허나 소리 하나로 본능적 신체 반응을 일으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1970년대의 말을 휩쓴 도나 섬머의 'Bad girls'나 비지스의 'Stayin' alive' 같은 댄스 넘버들엔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작·편곡, 프로듀싱으로 참여해 협공 전략을 펼쳤다.

아바의 음악이 스탠더드 팝 혹은 고전 음악의 댄스 버전 같다고 왕왕 생각했다. 저평가가 아니다. 스웨덴의 전통 음악과 클래식 선율의 자양분을 흡수해 이들의 댄스 뮤직은 소울과 블루스에 뿌리를 둔 펑크, 디스코와는 확연히 다른 질감의 토양을 다졌다. 비애와 환희가 오묘하게 교차하는 양가적 감정을 빈틈없는 선율과 편곡으로 낚아챈 이들의 사운드는 당대의 대중성과 시대 무관의 영속성을 동시 포획했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2005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50주년을 맞아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Waterloo'가 역대 입상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아바가 처음부터 이 대회와 연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1973년 팀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Ring ring'을 들고 지역 예선에 참여한 그룹은 3위에 머물며 고배를 마셨다. 이듬해 재도전한 아바는 화려한 의상과 캐치한 멜로디, 간단한 안무로 구성한 'Waterloo'를 통해 유로비전의 '드라마틱 발라드' 전통을 뒤엎고 스웨덴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아바가 우승의 영광을 얻은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영국의 브리튼에서 개최되었다. 나폴레옹이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한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남자의 구애에 항복하는 여자를 표현한 'Waterloo'의 가사와 지역적 연관성이 두드러진다. 실제 본선 무대에서도 지휘자가 나폴레옹 의상을 입고 나와 재치 있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유럽을 점령한 곡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에 이어 빌보드 싱글 차트의 6위에 올라 그룹의 성공적인 미국 진출을 견인했다. 관습을 허문 아바의 유로비전 무대는 전투의 주인공만큼 오래도록 대중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의 실패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BTS가 지구를 호령하기 약 50년 전에도 비(非) 영미권 국가에서는 대중음악 본토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스웨덴의 4인조는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국가 가릴 것 없이 레코드를 찍어냈지만 영국 4인조와는 다르게 미국에서만큼은 중박을 넘어 대박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기록상으로는 'Waterloo', 'Take a chance on me', 'The winner takes it all' 3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TOP 10에 들었고, 'Dancing queen'만이 겨우 1위에 올랐다. 영화, 뮤지컬의 흥행과 팀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당시의 성과는 아쉬운 수준이다.

1970년대 팝 또한 갓난아이의 발육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다. 록 진영에서는 비틀즈 해체 후 프로그레시브 록과 헤비메탈이 바통을 이어받았고(실로 다양한 장르가 뜨고 졌다), 반대 진영에서는 소울-펑크(Funk)-디스코의 흐름 위에서 댄스 뮤직이 새 판을 짜고 있었다. 가볍고 경쾌한 '버블검(Bubblegum)' 뮤직이 이 혼란한 틈을 파고들기란 쉽지 않았고, 미국의 성벽은 북유럽의 추위보다 견고했다. 유행의 기준인 매출과 순위가 음악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지는 않는 것처럼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돌고 도는 시간 속에 재평가는 끝났고, 이유 있는 자신감으로 아바는 돌아왔다.



ABBA (아바) - 9집 Voyage
ABBA (아바) - 9집 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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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세대 아이돌의 생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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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K팝 씬에서 두각을 보이는 신진 그룹들은 모든 멤버가 1995년 이후 출생한 Z세대 아이돌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새로움을 지향하는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입지를 넓히고 있다. 신세대 아이돌은 숏폼 콘텐츠와 메타버스, 스토리텔링으로 꽉 찬 노랫말을 활용해 더 다양하게 K팝을 즐기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전략과 정체성으로 Z세대의 지지를 받는 8팀을 소개한다. 이들을 통해서 아이돌의 새로운 생존전략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에 국한되지 않는 변칙적인 K팝의 미래를 아래 그룹들을 통해 그려보자. 아이돌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신세대의 시대정신과 대중음악의 흐름을 모두 담은 이 기민함에 있다.



에스파 (æspa)


SM에서 6년 만에 내놓은 신인 걸그룹의 화제성 위에 메타버스 세계관이 기름을 부었다. 에스파는 멤버들의 이름 앞에 아이(ae)를 붙인 4명의 아바타를 포함한 8인조 그룹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를 증명하듯 데뷔 직전 공개한 'MY, KARINA' 영상에서 멤버 카리나는 아이-카리나와 대칭으로 앉아 대화하며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어려운 세계관은 노랫말에 녹아들어 대중에게 주입한다. 데뷔곡 'Black mamba'의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라는 가사는 온라인에서 두 자아를 대비하는 밈(Meme)으로 유명해져 그룹의 이름을 알렸다.

에스파는 세계관이 가진 접근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음악과 춤의 무게를 덜었다. 영화 <분노의 질주 : 홉스 & 쇼>에 수록된 곡을 리메이크한 'Next Level'은 'I'm on the next level'이라는 가사를 쫀득하게 발음하여 듣는 재미를 더했고 디귿 춤 같은 독특한 포인트 안무가 쇼트폼 콘텐츠에서 돌풍을 일으켜 음원차트를 역주행해 1위에 올랐다. 그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에스파는 더욱 공격적인 기세로 대중에게 다가온다. 메타버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룹은 최근 발매한 <Savage>을 통해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 추천곡 :'Next level', 'Savage', 'Black mamba', 'Yeppi yeppi'



스테이씨 (STAYC)

 

트와이스의 'Cheer up', 'TT' 등을 만든 프로듀서 블랙 아이드 필승이 6인조 걸그룹 스테이씨를 기획했다. 히트메이커가 만든 팀이라는 타이틀과 가수 박남정의 딸이자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박시은이 속했다는 사실로 데뷔 전부터 이목을 모았으나 확실한 임팩트를 남긴 것은 두 번째 싱글 'ASAP'이다. 'ASAP 내 반쪽 아니 완전 카피'라는 중독적인 후렴구와 귀여운 '꾹꾹이 춤'이 소셜 미디어 서비스의 챌린지로 급부상하며 뒷심을 발휘한 덕분.

최근 발매한 '색안경'의 '난 좀 다른 여자인데 겉은 화려해도 아직 두려운 걸'과 같은 가사는 수동적인 소녀상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건강한 10대를 지향하는 팀은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마요'라며 거침없는 자기표현으로 답습을 거부한다. 꾸밈없는 모습은 오히려 소녀의 생기발랄함으로 충만하다. 어떤 틀에도 끼워 맞출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Z세대가 스테이씨의 '틴 프레시'에 열광하는 이유다.

- 추천곡 :'ASAP', '색안경', 'So bad', 'Slow down'



위클리 (Weeekly)


학창 시절의 향수는 그 어떤 추억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K팝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 이미지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 역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때에 대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지만 2020년에 데뷔한 7인조 걸그룹 위클리는 첫사랑의 아련함으로 되풀이되는 교복 컨셉트와 거리가 멀다. '언니'를 외치며 성인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내는 이들은 교복 치마 대신 반바지를 입은 Z세대 여학생이다.

소셜 미디어 서비스에서 특정인을 부르거나 언급할 때 사용하는 태그(@) 기능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Tag me', 2000년대 초반 하이틴 록을 따르는 'Zig zag'와 'After school' 등 활기 가득한 음악은 기존 걸그룹의 이미지를 빗겨나간다. 책걸상, 큐브, 스케이트보드 등 다양한 소품을 활용한 댄스컬 역시 교실 마냥 왁자지껄하다. 올해 초 발매한 'After school'은 쇼트폼 콘텐츠에서 10대에게 인기를 얻으며 스트리밍 플랫폼의 바이럴 차트 1위에 올랐다. '틴 크러시'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신 '위드 틴'을 지향하는 위클리는 윗세대의 향수와 또래의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세대를 이어준다.

- 추천곡 : 'After school', 'Zig zag', '나비 동화', '언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TXT)


시작부터 특별했다. 방탄소년단의 동생 그룹으로 주목받은 다섯 소년은 신스팝, 뉴잭스윙 등 복고적인 음악과 청량한 기조를 내세우며 선배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대신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하위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어린 연령의 팬덤과 북미 틈새시장 공략에 성공했다.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를 활용한 두 번째 타이틀곡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의 컨셉트와 가사, 장르 소설 스타일의 긴 제목은 K팝에 관심 없는 이들도 기억할 만큼 독특하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격동기를 담은 세계관은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고 음악적 변화의 정당성까지 확립한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그린 <꿈의 장> 시리즈에서 밝은 분위기를 이어오던 이들은 올해 발매한 <혼돈의 장>시리즈에서 록 사운드로 비일상적인 세계를 깨고 나와 현실과 마주한 소년의 혼란을 표현했다. 빈틈없는 기획으로 짜인 밑그림을 따라 움직이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선배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미래를 좇고 있다.

- 추천곡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 '0X1=Lovesong', 'Blue orangeade', 'Angel or devil'



에이티즈 (Ateez)


연습생 시절 '케이큐 펠라즈(KQ Fellaz)'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콘텐츠를 선보였던 에이티즈를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빌보드의 K팝 칼럼니스트 제프 벤자민이 '포스트 BTS'로 꼽은 8인조 그룹은 웅장한 퍼포먼스로 팬층을 형성했다. 또 블락비, 비에이피, 방탄소년단 등을 따라 힙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음악은 팀이 가진 역동성마저도 담고 있다.

비투비의 '아름답고도 아프구나'를 쓴 이든이 팀의 프로듀싱을 전담하고 있으며 멤버들의 적극적인 작업 참여도 음악과 퍼포먼스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데 일조한다. 더해서 음반의 상호유기적인 구성과 '해적왕', 'Wave', 'Neverland' 등 해적 컨셉트로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은 이들의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눈에 띄는 실력과 확실한 음악색으로 밀고 나가는 에이티즈의 기세는 어떤 외부적인 힘에도 기대지 않기에 더 강력하다.

- 추천곡 : 'Deja vu', 'Wave', 'Neverland', 'Answer'



있지 (ITZY)


있지는 '예쁘기만 한 애들과는 달라'라고 어필하며 데뷔했다. 논리적이진 않지만 다른 그룹과 다르지 않은 댄스곡, 걸크러시 컨셉트로 성공한 이들이 어딘가 남다르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후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입증하는 과정 역시 순탄했다. 쿨한 매력의 'Icy', 자존감을 고취하는 'Wannabe', 당돌한 사랑을 담은 'Not shy'까지 이들은 멤버 개개인의 뛰어난 스타성을 강조하는 JYP 걸그룹 전통에 '힙'을 더해 여성들의 워너비를 자처했다.

차별성을 전면에 내세운 팀이 팬 위주의 K팝 신에서 여전히 대중성을 따라가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음악은 힙합, 하우스, 뭄바톤 등 대중적인 장르를 혼합했으며 '마.피.아. In the morning'의 캣우먼 이미지는 기성 걸그룹을 따른다. 그런데도 특유의 에너지와 파급력이 있지라는 이름을 내세울 만한 근거를 형성한다. 뻔뻔함과 당당함이 매력적인 이들은 남들과 다르고 싶지만 유행에 뒤처지고 싶지도 않은 Z세대의 이중적인 면을 닮았다.

- 추천곡 : 'Loco', '달라달라', 'Not shy', 'Nobody like you'



 스트레이 키즈 (Stray Kids)


동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데뷔한 JYP 8인조 보이그룹 스트레이 키즈의 초반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국내 K팝 팬들조차 데뷔곡 'Hellevator'의 반항기 어린 심오함과 '부작용'에서 계속 되뇌는 '머리 아프다'라는 직관적인 가사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 심상치 않은 해외 인기 지표를 보이던 이들은 일명 '마라맛 K팝'이라고 불리는 '神메뉴'를 발매하며 국내 입지를 넓혔다. 파워풀한 EDM 사운드와 음악을 신의 요리에 비유한 가사가 그룹의 유쾌한 매력을 성공적으로 어필한 결과다.

이 독특한 정체성은 팀 내 프로듀싱 그룹 쓰리라차(3RACHA)로부터 나왔다. 힙합과 EDM을 좋아하는 세 멤버는 연습생 때부터 함께 작업하며 그룹의 음악적 기둥으로 성장해 올해 엠넷에서 방영된 <킹덤 : 레전더리 워>의 우승까지 견인했다. 스트레이 키즈는 최근 발매한 '소리꾼'으로 상승세를 이어가며 K팝의 차세대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퉤 퉤 퉤'하는 '소리꾼'의 가사가 대중에게 개성을 관철하는 데 성공한 이들의 자신감을 드러낸다.

- 추천곡 : '소리꾼', '神메뉴', 'Back door', '청사진'



더보이즈 (THE BOYZ)

2017년 데뷔 이후 별달리 주목받지 못했던 더보이즈는 작년 엠넷에서 방영된 <로드 투 킹덤> 출연으로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밀도 있는 기획을 바탕으로 360도 스테이지를 활용한 이들의 무대는 카메라의 시선이지만 맨눈으로 보는 듯 깊은 몰입을 유도했다. 그 결과 11인조 그룹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1위를 거머쥐며 무관중 퍼포먼스의 본보기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룹 이름에는 그 어떤 수식어도 없다. 더보이즈는 그저 소년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소화하며 팀의 신선함을 유지한다. <로드 투 킹덤>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태민의 '괴도' 커버 무대를 벤치마킹한 'The stealer'의 퍼포먼스는 감탄을 자아내고 최근 발매한 'Thrill ride는 끌리는 멜로디의 청량감으로 가볍게 접근한다. 매번 새로운 전략과 이미지를 선보이는 더보이즈의 성장기는 소년만화 한 편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 추천곡 : 'Thrill ride', 'The stealer', 'No air', 'Bloom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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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다크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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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요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을 말할 것이다. 이들의 기적과도 같은 부활은 대중은 물론 많은 동료 가수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고난의 시간을 옆에서 직접 바라본 같은 소속사 후배에겐 이 사건이 엄청난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작년 2월에 데뷔한 브레이브 엔터테인먼트 소속 보이그룹 다크비는 '포기하지 않는 자에겐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돌이 공급받는 시장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자체 제작의 꿈도 이어가고 있다. 쌀쌀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10월 초, 싱글 <Rollercoaster>로 컴백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어 있는 아홉 명의 청년들과 함께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각오까지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좌측부터 보이는 순서대로 준서, 희찬, GK, 이찬, 룬, 테오, D1, 유쿠, 해리준

올해 정규 앨범 < The Dice Is Cast >를 발매하며 작년부터 진행한 4부작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연작은 어떤 식으로 기획하게 되었나.

GK : 데뷔 전부터 대표님(용감한 형제) 주도하에 계획된 프로젝트다. 4부작의 주요 키워드는 첫 미니앨범의 타이틀인 'Youth', 즉 '청춘'이다. 같은 또래들의 생각과 경험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 젊음(Youth), 사랑(Love), 그리고 성장(Growth)이란 주제로 나누어 노래하게 되었다.

1년 동안 활동했던 곡들의 제목과 가사가 화제다. 데뷔곡 '미안해 엄마'는 물론 최근의 '줄꺼야'까지 직관적인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다소 난해한 노랫말이 낯설진 않았는지.

D1 : 우선 '미안해 엄마'라는 곡을 처음에 받았을 때 비트와 후렴구만 채워져 있었다. 솔직히 후렴구는 누가 들어도 처음엔 난감해했을 것이다. 당장 이 곡으로 데뷔해야 하는 우리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계속 듣다 보니까 사운드도 탄탄하게 채워져 있고 훅도 중독성이 있어서 이런 난해함을 오히려 다크비의 개성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GK : '줄꺼야'는 괜찮았지만 '미안해 엄마'와 '난 일해', 이 두 곡은 굉장히 단순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간단한 노랫말들이 가지는 이점 역시 분명했다. 요즘 많은 노래들이 듣기도 따라부르기도 어려운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난 일해'처럼 단순하고 직관적인 한글 가사가 다크비의 매력 포인트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일해'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외로움의 의미인가.

GK : 그것도 맞지만,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일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일'이라는 것이 대중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라 생각했고, 막연히 일해서 힘들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너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내용으로 듣는 분들께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실제로 위로를 받았다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그런지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노래도 '난 일해'라고 생각한다.

네 번의 활동을 통해 가장 많이 발전한 점은.

GK : 우선 여유가 생겼다. '미안해 엄마'도 그렇고 '오늘도 여전히'도 그렇고 초반엔 무대에서 꼭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진짜 이 악물고 춤추며 노래한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다짐해서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교적 자유로운 '난 일해'와 '줄꺼야'를 통해 보다 안정감 있는 무대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리허설이나 모니터링을 통해 확인해봐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그동안 활동했던 곡들이 대체로 잔잔한 편이다. 강렬하게 터지는 트랙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룬 :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잔잔한 훅이 반복되는 곡들로만 활동해서 한 번쯤은 팡팡 터뜨리는 트랙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싶었다. 근데 대표님이 생각하시기에도 그렇고 우리도 활동을 하면서 이런 바이브가 잘 맞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테오 :개인적으로 우리 음악의 멜로디는 개성이 확실하다고 본다. '줄꺼야'만 들어봐도 도입부의 피아노 라인이 트렌디한 느낌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특징들이 차별화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퍼포먼스 위주의 곡들을 선보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보컬은 주목을 덜 받는 느낌이다. 다크비의 가창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D1 : 각자의 톤 자체가 개성도 있고 서로 겹치지도 않아서 강점이 확실하다. 일단 팀의 초기 방향이 힙합 그룹으로 잡혀있어서 처음엔 가창보다 랩이나 힙합 특유의 스웨그를 흡수하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데뷔 초에 '얘네는 노래를 잘 못 할 것 같다'는 소리도 듣곤 했다. 가창을 드러낼 기회가 적을 뿐이지 노래 연습은 꾸준히 하고 있고 유튜브를 통해 국내외 가수들의 곡을 커버해서 올리고 있다. 활동을 하면서도 자연스레 성장한 보컬이 들리다 보니 지금은 '멤버 모두의 목소리가 돋보인다'는 반응도 있다.


D1(리더, 리드보컬)

퍼포먼스를 중요시하는 팀들은 많다. 다크비만의 특장점은 무엇인가.

해리준 : 다른 팀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프리스타일 쪽에 특화된 것 같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각자의 느낌과 스타일을 다르게 표출하다 보니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다양한 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퍼포먼스로는 탑. 우리가 가장 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웃음)

이찬 : 해리가 말한 것처럼 아무 음악이나 틀어줘도 몸을 움직일 수 있고 그 음악을 표현할 수 있다. 다른 팀들을 다 이긴다고는 못해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물론 잘하는 팀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항상 다른 그룹들의 무대도 참고하며 우리에게 부족한 면이 어떤 것인지도 파악하고 보완하려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보완하고 있는지.

이찬 : 스킬적인 부분은 좋은데 무대 위에서의 장악력과 표정 연기, 그리고 눈빛. 이런 요소들은 단순히 춤만 배워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진정으로 느낄 때 어필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무대와 더 친해지고 익숙해져야 한다고 본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무대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적긴 했지만 앞으로 코로나 상황이 괜찮아진다면 무대에서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가야 할 것 같다.

관객과 대면할 일이 없어서 무대 오를 때의 마음가짐이 남다를 것 같다.

희찬 : 당장 우리의 노래를 들려드릴 수 있는 매체가 음악 방송과 유튜브 정도뿐이라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이 위에서 죽자'는 마인드다. 무대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항상 행복하지만, 그 이전에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내 직업이다. 모든 걸 쏟고 내려오는 게 진정한 프로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춤은 언제부터 췄는지.

희찬 : 공식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한림예고로 진학하면서 춤을 배웠다. 고향인 경상도 밀양에 있을 땐 주변에 댄스 학원이 없어서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들로 독학하고 창문을 보면서 따라 추곤 했다.

희찬이 봤을 때 본인을 제외한 8명 중에서 누구의 퍼포먼스가 제일 괜찮은지.

희찬 : 준서를 뽑겠다. 모든 멤버가 메인 댄서라 할 만큼 춤 실력이 좋지만 프리스타일 기준으로 봤을 때 준서의 동작들은 정직하면서도 힘이 넘쳐서 계속 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준서는 KBS 고등학생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 < 댄싱하이 >에 출연해 팀 우승을 거머쥔 이력이 있다. 이찬과 희찬 역시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 소년 24 >에 출연했는데,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현역 아이돌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준서 : 고등학생 때 출연한 < 댄싱하이 >는 나를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성장시켜준 프로그램이다. 스스로도 춤에 대한 기준이 불명확했던 어린 나이에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내 특장점이 무엇인지, 또 내 한계점의 끝이 어디인지 내다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희찬 :부모님께서 내 꿈을 믿고 응원해 주신 덕분에 고등학생 때 밀양에서 서울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좋은 기회로 < 소년 24 >에 출연하게 되었고 공동체 생활이 어떤 것인지 짧게나마 겪어볼 수 있었다. 같은 꿈을 꾸고 있지만 각자가 추구하는 그림은 너무나 달랐고 그 속에서 창작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이때의 경험이 지금의 다크비 멤버들과 생활하는 데도 정말 큰 도움이 되어서 오디션 프로그램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D1 :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은 없지만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한 명의 엔터테이너로서 이런 콘텐츠들을 꾸준히 챙겨보는 편이다. 포맷과 장르는 제각각이지만 꿈을 가진 사람들의 열정을 보면 나 또한 새로운 자극을 느낄 때가 정말 많다. 대부분 주어진 미션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주는데 시청자의 입장에서 그 모습들을 보다 보면 출연자들의 다양한 매력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겐 이만큼 좋은 기회도 없다고 본다.


좌측부터 룬(서브보컬), 이찬(리더, 메인래퍼), 유쿠(서브보컬)

일본인 멤버 유쿠는 디제이라는 포지션도 맡고 있다. 디제이는 어떻게 접한 건지.

유쿠 : 한국에 오기 전만 해도 음악을 많이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소속사에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디제이를 배우게 됐는데 이때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음악을 감상할 때 디테일한 포인트를 인식을 할 수 있게 되고 듣는 귀도 더 성장한 것 같다.

일본에도 아이돌 그룹은 많다. 그럼에도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 데뷔하고 싶었던 이유는.

유쿠 : 물론 일본에도 멋있는 팀들이 많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엄청난 K팝 팬이셨다. 콘서트나 팬미팅 같은 행사가 있으면 자주 찾아다니고 하셨는데 그때마다 자연스레 따라다니면서 나 또한 팬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선배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무언가가 느껴졌다. 처음엔 마냥 엄마 손 잡고 구경하기 바빴지만 어느 순간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다크비 멤버로 활동하면서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멤버들에게 가수의 꿈을 키우게 해준 노래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이찬 :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축제 무대에서 틴탑 선배님의 노래를 커버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환호라는 걸 받아봤는데 축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그 벅찬 감정과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평생 이 기분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면서 나도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음악은 저스틴 비버의 'Baby'라는 노래가 기억에 남는다. 내 또래 같은 사람이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D1 :빅뱅 선배님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 초기의 'La la la'라는 곡이나 저희 대표님께서 작업하셨던 '마지막 인사' 같은 음악들을 들으면서 힙합 그룹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중에서도 특히 태양 선배님을 좋아한다. 퍼포먼스적인 면도 너무 뛰어나지만 독특한 음색으로 부른 노래들은 기억에 많이 남아서 지금까지도 내 롤모델로 삼고 있다.

테오 : 초등학교 때 친구랑 장기자랑에 나가서 에프티 아일랜드 선배님의 '천둥'을 불렀다. 비록 친구들 앞이었지만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환호를 받는 게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나름 잘 불렀었는지 친구들이 '숭례초 이홍기'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그런 소중한 추억들이 모여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GK : 초등학생 때 지드래곤 선배님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 춤 잘 추고, 랩 잘하고, 노래 잘하고. 무대에 등장만 해도 포스가 대단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야말로 지드래곤 덕후였다. 그러다 진짜 가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방탄소년단 선배님의 '진격의 방탄'이란 노래를 듣고 나서다. 자신감 넘치면서도 유쾌한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아이돌이 되어서 무대에서 랩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희찬 : 어릴 때 음악 프로를 보다가 우연히 비스트(현 하이라이트) 선배님의 'Shock' 무대를 봤는데 나에겐 그야말로 쇼크였다. 그래서 그날 바로 컴퓨터로 '쇼크 안무 배우기'를 검색해서 혼자 춤을 배워나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련회 때 무대에 서면서 희열을 느꼈고 연예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엑소의 카이 선배님이다. 섹시하면서도 절제된 퍼포먼스를 가장 잘 소화하는 댄서라고 생각한다.

룬 : 다른 친구들과 달리 원래 운동을 했었다. 어릴 땐 태권도 선수 생활을 하면서 클라이밍, 검도 등에도 발만 살짝 들였다 놨다 했었다. 음악이랑은 전혀 상관없이 지내다가 우연히 회사랑 연락이 닿으면서 감사하게도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좋은 기회로 음악을 시작하게 된 만큼 무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방탄소년단의 뷔 선배님의 무대 매너나 보컬적인 면들을 많이 보고 배워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준서 : 한창 유치원에 다닐 때로 기억한다. TV에서 우연히 가수 비 선배님께서 러닝셔츠만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접했는데 굉장히 멋있었다. 똑같이 러닝셔츠를 입고 있는데도 몸을 쓰기에 따라서 저런 퍼포먼스도 보여줄 수 있구나 싶었고, 그런 면에서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춤에 대한 열정이 커졌던 것 같다.

유쿠 :방탄소년단 선배님의 'Fire'가 기점이었다. 일본에 생활하고 있을 때 방탄소년단의 안무를 책임지던 안무가 (손)성득 선생님이 직접 일본에 건너와서 안무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춤은 물론이고 방탄소년단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단순히 '좋다'라는 감정을 넘어 '하고 싶다'는 행동으로 바뀐 것 같다.

해리준 :어렸을 때 농구선수를 했었다. 농구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길거리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의 연장에서 힙합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크리스 브라운, 저스틴 비버, 그리고 제레미 같은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제레미의 'Oui'라는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나중에 내가 이런 스타일의 노래를 부르면서 무대에서 뛰어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좌측부터 준서(리드댄서), 희찬(메인댄서)

팬덤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다크비를 향한 BB(비비))의 반응은 어떤지.

해리준 : 뜨거운 것 같다. 항상 SNS에 댓글도 많이 달아주시고 사랑하는 만큼 표현도 많이 해 주신다.

기억에 남는 댓글이나 칭찬이 있었다면.

해리준 : 영어 댓글 중에 “BB is the best fandom in the world.(BB가 세계 최고의 팬덤이다)”라고 남겨주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팬분들 스스로가 우리의 팬인 걸 자랑스럽게 여겨주시는 것 같아서 엄청 큰 힘이 됐다.

이찬 : 개인적으로 가수라고 하면 무대에서 즐길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팀으로 보여지는 그림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각자가 무대를 즐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그래서 지금껏 들었던 칭찬 중에선 “즐길 줄 아는 다크비”라는 말만한 극찬이 없는 것 같다.

유튜브 댓글만 보면 외국 팬분들이 더 열성적인 것 같다. 해외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룬 :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K팝의 영향력이 커진 시점에서 우리는 거의 쉬지 않고 활동을 이어왔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주 노출이 되면서 우리를 찾아주는 팬들이 늘지 않았나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물론 해외 팬분들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유튜브 외에도 팬카페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국내 팬분들도 많이 응원을 해주고 계시다. 그런 걸 우리도 꼼꼼히 체크하면서 코멘트도 달아드리려고 하는 편이다. 우리를 찾아주는 모든 팬분께 감사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이번에 발표한 싱글 <Rollercoaster>의 감상 포인트는.

준서 : (인터뷰 진행 시기가 싱글 발매 전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긴 힘들지만 묵직한 808 베이스 사운드와 더불어 중독성 강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음악이다. 그리고 '미안해 엄마', '난 일해'처럼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우리말 훅을 사용해서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포인트다.

이찬 :'줄꺼야'의 퍼포먼스가 강렬하고 쉴 틈 없이 파워풀한 느낌이었다면 신곡 '왜 만나 (Rollercoaster)'의 안무는 힙합적인 요소와 그루비한 느낌을 살려서 다채롭게 구성했다. 안무를 창작할 때 항상 아웃트로에 힘을 실어 임팩트를 주려고 하는데 이번 곡이 역대급을 찍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대중적인 요소를 넣어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안무로 짰으니까 많은 분들이 커버해주시면 행복할 것 같다.


좌측부터 테오(메인보컬), GK(메인래퍼), 해리준(리드댄서)

어쨌든 첫 정규작의 제목처럼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다크비를 주사위 숫자로 표현한다면.

준서 : 숫자 '1'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총 네 장의 앨범을 발매하긴 했지만 4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였기 때문에 이제 겨우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본다. 1년 동안 보여드렸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도 앞으로 많이 보여드리고 싶다. 쉼 없이 노력하고 성장해서 주사위의 남은 면들을 보여드리고 싶다.

데뷔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라본 2년 차 다크비의 성장세는.

테오 :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선배들의 뒤를 밟아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본다. 그래서 당장 눈앞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나아가려 한다.

이찬 : 개인적으로 별탈없이 잘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데뷔 전후 따질 것 없이 우리의 아이디어나 힘이 안 들어갔던 적이 없다. 앨범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모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자체 제작돌'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활동을 해왔다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

'자체 제작돌'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만큼 멤버들의 참여도 점점 늘고 있다. 오로지 다크비 9명의 힘으로 만든 앨범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지.

해리준 : 당장은 많이 부족하다. 우리 스스로의 방향성에 대해 더 의논하고 연구하면서 대표님께도 인정받는 시점에 온전히 우리끼리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다. 어떤 콘셉트의 음악을 해보고 싶은지, 또 어떤 퍼포먼스로 대중분들에게 우리를 각인시킬 수 있을지. 평소에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고 있다. 순수하게 우리의 에너지로 가득 채운 앨범을 팬분들께 들려드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

GK :멤버들 모두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다재다능한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만의 힘으로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하고 있다. 실제로 틈틈이 곡 작업들을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런 작업물들이 쌓이면 언젠가는 팬분들에게 우리의 힘으로 만든 앨범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고 성장해 나가겠다.

마지막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해리준 : 올해가 가기 전에 팬분들께 새로운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싱글로 찾아뵐 수 있어서 행복하다.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이번 활동곡 '왜 만나 (Rollercoaster)'로 음악 방송 1위를 해보고 싶다. (웃음) 정말 큰 꿈이고요. 이번 곡을 통해서 다크비라는 그룹을 더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룬 : 올해 초에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중간에 한 번 점검을 해봤더니 제한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우리 BB분들과 직접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제일 아쉽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올해 안에는 BB와 얼굴을 마주하고 우리의 무대를 보여드리면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다크비 (DKB) - Rollercoaster
다크비 (DKB) - Rollercoaster
다크비
지니뮤직 (genie)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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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섬세한 세공으로 전람회의 정수를 그대로 품다, 'Exhibit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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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MBC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는 전람회다. 셔츠 깃을 빳빳하게 세우고 니트까지 정갈하게 맞춰 입은 김동률과 서동욱은 등장부터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무대에 들고나온 음악 역시 옷맵시에 걸맞게 고풍스러웠다. 두 동갑내기는 피아노와 베이스만으로 풀어간 재즈풍의 발라드 '꿈속에서'로 그해 특별상은 물론 대상까지 거머쥐며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다. 둘의 비범한 재능을 초기에 발견한 신해철과 작곡가 김형석의 재정적 지원과 프로듀싱으로 이듬해 탄생한 1집 <Exhibition>는 당시 6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상승 기조를 이어갔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정통 발라드와 재즈, 웅장한 오케스트라 편곡을 조합해 클래식 특유의 입체감을 연출한 데뷔 앨범은 김동률 음악의 초석으로 남았다. '클래식을 아는 대중가수'라는 다소 허세적인 타이틀도 분명 소구점으로 작용했지만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낸 이 '습작'같은 데뷔작은 곧 다가올 행보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음반 제작에 전면적으로 관여하며 세련된 가요를 재현하는데 몰두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노래들을 작사, 작곡한 <Exhibition 2>는 한층 짙어진 전람회의 음악색으로 정면승부를 택했다.



깊어진 소리를 도모했던 시도는 다시 후방지원에 나선 신해철 외에도 넥스트의 기타리스트 김세황을 비롯한 호화 세션들의 가세로 이어졌고 더욱 발전한 고급진 사운드로 구현됐다. 현재까지 이어온 최고의 퀄리티를 향한 전람회의 일념이 투영된 것이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연주가 평온하게 흐르는 인트로 트랙 '고해소에서'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장엄한 스트링 선율과 두 멤버가 읊조리는 허밍을 소재로 서서히 쓸쓸함을 고조시키는 이 곡에서 직접 현악을 지휘한 김동률의 감각이 빛을 발한다. 피아노로 주조한 멜로디와 호소력 짙은 중저음의 보컬을 결합하는 고유의 발라드 문법도 잊지 않았다. 전작의 '기억의 습작'에서 드러난 유려한 송라이팅 솜씨는 진일보한 가창력을 두른 '이방인'과 '새'라는 또 다른 발라드 수작을 빚어냈다.

전람회를 대표하는 '취중진담'을 포함한 음반은 줄곧 재즈적인 터치로 정체성을 피력했던 이들의 열망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베이스가 주도하는 빅밴드 스윙 스타일의 'J's bar에서'와 절절한 하이해트 사운드가 두드러진 스탠다드 재즈풍의 'Blue Christmas'까지 재즈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과시했다. 솔로 앨범, 이적과 협업한 카니발, 이상순과 호흡을 맞춘 베란다 프로젝트 등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쌓았던 다양한 행보 가운데에서도 놓지 않았던 재즈는 김동률 음악의 핵심 요소다. 



일률적인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반전을 꾀했다. 전람회 음악에서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김동률에 비해 그룹 내에서 미미한 존재감을 비추던 서동욱이 베이스를 잠시 내려놓고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 든 것. 때 묻지 않은 미성의 톤으로 특유의 서정성을 밀도 있게 담아낸 '마중 가던 길'로 단순 조연 역할로 이미지가 굳어진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섬세한 세공을 거친 두 번째 결정체는 전람회의 정수를 그대로 품고 있다. 수려한 선율을 최우선으로 두고 정통적인 공식을 고수했던 그들은 당시 주류 음악이었던 댄스곡과 거리가 먼 발라드 장르로 음악시장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유서'가 히사이시 조의 '하늘에서 내려온 소녀'와 표절 시비에 휘말리며 흠결을 남겼지만 훗날 솔로로 출격한 김동률 음악의 핵심적인 단초가 된 <Exhibition 2>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풋풋한 신인에서 야망가로 변모하는 과정 속 고군분투했던 모습을, 나아가 대중음악계의 장인 반열에 다가선 그의 전성기를 담고 있다.



전람회(Exhibition) 1집 - 기억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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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
대영에이브이
전람회(Exhibition) 2집 - Exhibit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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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초록빛 위로, 에이트레인 "PAIN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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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때로 우리와는 상관없는 막연한 동화 같다가도, 어느 날 불쑥 다가와 조용히 곁을 맴돌곤 한다. 종교에는 철학과 교리의 대상이지만, 과학에는 학술적 탐구의 대상으로 비친다. 동시에 모든 인간에게는 두려움과 겸손을 깨닫게 하는 절대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죽음이 가진 초월성과 다변성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구미를 당기는 매력적인 소재로 여겨져 왔다. 오늘날까지도 죽음에 관한 각자의 해석을 다룬 작품이 세상에 등장하는 이유다.

그리고 여기, 국내에도 그 어려운 소재를 과감하게 담아낸 한 명의 야망가가 있다. 2020년 <PAINGREEN>을 발표하며 평단의 반향을 끌어낸 에이트레인이 그 주인공이다. 포크와 일렉트로니카,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감각적 잉크를 자욱하게 풀어낸 초록빛 앨범은 초현실적 배경과 부드러운 은유를 양분 삼아 울창한 사운드스케이프의 숲을 일궈내며, 국내 대중음악이 취할 수 있는 표현의 차원을 한층 올려놓는다. 홍대 이즘 사무실에서 그와 만나 음악 세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심층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만큼이나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에서는 사뭇 초연함이 묻어났다.



작년 <PAINGREEN> 앨범을 발표한 이후로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외적으로라면, 나도 모르는 새에 신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 됐다. 늘 그런 사람들을 보며 시기 어린 시선으로 내 미래가 저랬으면 하는 꿈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남들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있더라. 개인적으로는 외압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속해 있었다 보니 현대 알앤비는 이래야 하고 기존의 것은 촌스럽다 같은 천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내 취향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음악가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감이 좀 찬 상태다. 온스테이지도 나가고, 섭외를 받아 공연도 많이 서게 되었고. 아무래도 동경하던 멋있는 인디 뮤지션들의 바닥으로 한 발자국 선을 넘어본 것 같다.

외부의 시선이 부담보다는 자신감으로 작용한 건지.

그런 셈이다. 얼마 전에 가수 오소영 님의 공연을 다녀왔다. 활동한 20년의 세월과 음악 모두 너무 훌륭하고 대단한 분이다. 나는 약간 명분파인데, 만약 내 20년을 꿈꾼다면 이제는 그냥 '원해서'라는 명분은 좀 부족하다. 혼자 만든 작품이 한대음(한국대중음악상)의 후보였다는 배지가 달렸으니 내가 그런 명분에 있어 자신감이 생기더라. 앞으로도 혼자 하고 싶고, 혼자 잘해보고 싶고, 그러다 보면 또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내 명분을 더해줄 사람들 말이다.

<PAINGREEN>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어찌 보면 다루기 무겁고 어려운 주제일 텐데, 이를 택하게 된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을까.

사실 죽음은 쉽게 겪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기 때문에 워낙 멀게 느끼기 쉽지만, 굉장히 일상적이다. 나조차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죽고, 어릴 때 선택을 한 친구도 있고, 사고를 당한 친구도 있다. 우리 역시 그런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제 꿈을 좇고,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을 더디게 만든 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다 보니 괴리감이 많이 들기도 했다. <PAINGREEN>은 마지막으로 이거라도 다 해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작품이다. 죽음이라는 표현이 되게 은유처럼 담겨있지만, 어떻게 보면 내게는 직설이었던 셈이다. 주목을 받고 살아있는 지금의 내가 “그때 죽고 싶었다”고 말하면 굉장히 모순적이겠지만, 물론 희망을 꿈꾸면서 만들던 시절이 있으니까. 공연장에서 이런 말들을 웃으면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내가 그랬고 이런 노래를 썼지만 지금의 나는 여러분 앞에서 행복하게 노래하며 얘기하고 있으니, 그러면 살아봐도 괜찮지 않냐는 희망을 주는 거다.

어찌 보면 죽음으로부터 치유나 생존의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닌, 오히려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함이었나.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걸 말하지 못하면 속에 병이 난다. 나에게는 음악이 노래를 한다 보다는 말을 한다의 개념이었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았다. 얼마나 힘들고 절망이 많은 세상 아닌가. 비단 나만 죽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물론 '다 괜찮아질 거다' 혹은 '힘내라' 이런 무드가 아니어도 그냥 이런 나의 모습을 담아낼 테니, 당신도 외롭지 않겠네라는 메시지를 담았던 것 같다.

고통을 의미하는 'Pain'과 재생을 의미하는 'Green'의 조합을 앨범의 제목으로 삼았다. 상충하는 두 표현을 합한 이유가 궁금하다.

'PAINGREEN'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일단 개인적인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고, 실제로 내가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CORK'를 썼던 2018년 겨울 즈음, 식물을 병적으로 많이 키우던 때가 있었다. 비록 현실의 나는 죽고 싶더라도 식물은 명확히 살아있지 않나. 심지어 죽어가는 애를 가지를 잘라 물꽂이를 해놓으면 뿌리가 나와서 잘 산다. 식물은 초록색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나를 둘러싼 건 모두 초록색이었던 것 같다. 흔히 초록은 자연의 색이고,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색이라고 하지 않나.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는 작업실을 전부 초록색으로 꾸미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착이 심해진 것도 있고. (웃음) 일단 앨범 아트만 봐도 밝은 노란색이 많이 낀 연두색도 있고, 검정이 많이 껴있는 암녹색이 있는 것처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초록색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들에 대해 각각 어떠한 초록색을 부여한다면 이것처럼 이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PAINGREEN'이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다. 작업 마지막 즈음에는 만약 이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초록색만 봐도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더라.


 

'HURT'라는 타이틀이 인상 깊다. 곡에 등장하는 '상처'의 의미가 다양해 보인다. 연인 간의 사소한 알력 다툼이라거나, 혹은 전작부터 계속 반복되는 키워드인 '불안정함'이 관계에서 가져오는 상처라던가.

어느 순간 내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후로는 그 불안정함을 받아들이는 앨범을 계속 만들어 온 것 같다. <HELLO, MY NAME IS INSECURE.>, <PRAY ON MY INSECURITY> 그리고 <PAINGREEN>에는 또 'Pray on our insecurity'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계속 나의 불안정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또 그걸 말하는 의도에는 나를 둘러싼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 동료에게 나의 불안정함을 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사실 불안정한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겠다는 얘기다. 그러면 주변에는 굉장히 많은 상처를 주게 된다.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나. 돈도 벌 만큼 벌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근데 내가 그러지 못하는 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음악을 하는 건 그 삶을 받아줘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포기는 할 수 없다 보니,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데 상처는 줄 거야 하는 말이 되는 거다. 이 곡은 내 오랜 연인에게, 그리고 아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뜻이 곧으면 가지가 너무 제멋대로 자라버린다. 못 자르게 막더라도 자라긴 자란다. 가지가 자라면 내 곧아지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찌르고 아프게 한다. 그래서 '상처'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자라버린 가지 내지는 가시를 내 손으로 자를 수 없으니, 이런 나를 받아주면 내가 너를 상처를 줄 테지만, 그만큼 내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대체로 의도적으로 표현을 흐리는 듯하다. 듣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남긴 건지.

조금은 뭉뚱그려지게끔 들리도록 했다. 개인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게 보편적으로 들린다고 하면 좋은 거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들어준 것 같다.

어쩌면 방금 본인이 언급한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음악을 하기 위해 '불안정함(Insecure)'으로 뛰어든 이유가 있을까.

모르는 삶을 향해 뛰어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책을 덮을 때 선택을 한 쪽을 후회할까, 하지 않은 쪽을 후회할까의 문제인 거다. 옛날에 한 만화책에서 이런 대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답변자가 담담하게 '후회가 적은 쪽의 선택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게 삶 자체가 아닐까'라고 답하는 장면이었다. 만화 상으로는 건조하게 넘어가는 부분이었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 와닿았고 그런 삶을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이건 아직도 어떤 선택을 해나감에 있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진리다. 물론 당시에는 그 불안정함이 5~6년 정도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아니어서 유감이지만, 어쩄든 그 덕분에 음악도 하고 있고, 과분한 영광도 얻을 수 있었고. 그렇다면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작중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다. 앨범의 주요 오브제로 물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단 내가 물을 많이 마신다. 거의 연가시다. (웃음) 우선 식물은 수분이 없으면 뿌리를 못 내린다. 어떻게 보면 식물에게는 물이 생명 그 자체인 셈이다. 어느 날 로즈마리 잎 사이로 뿌리가 삐져나오는 게 조금 보이길래, 뿌리가 좀 더 커지지 않을까 싶어 가지를 좀 깊게 담가놓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냥 순식간에 썩어서 죽어버리더라. 어쩌면 나에게도 물은 삶 그 자체이자, 죽음으로 이르게 할 수 있는 신 같은 존재다.

요약하자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지만, 오히려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의미인지.

그렇다. 그래서 이 앨범에서도 물은 그런 생명의 베이스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되게 죽고 싶을 때 썼던 'CROSS THE RIVER'라는 곡에서 강을 건넌다는 표현은 사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을 의미히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음악가의 삶으로 뛰어들기 위했던 어떤 나의 과감한 결심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간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를 부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니까.

'불 속에 놓고 온 것들'에서는 물과 대립되는 불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불 속에 놓고 온 것들'에 부여한 불의 의미는 소실이다. 예를 들어 화장을 하고, 유품을 정리할 때의 불이다. 누구나 아픔을 계속 안거나, 집착과 미련을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 없다. 그곳에 놓고 와야지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피처링으로 참여한 버둥이 2절에서 남녀관계를 다뤄준 덕에 조금 캐주얼해지고 해석의 여지가 더 많아졌다. 이건 되게 해피 액시던트라고 생각한다.

'Pity' 때부터 에이트레인의 창법은 절제하듯 부르지만, 한 문장마다 사력을 다해 부른다는 감상을 많이 받는다. 차분하고 정확한 전달법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을까.

나는 사실 완전 컨템포러리 알앤비 키드다. 애초에 뮤지끄 소울차일드(Musiq Soulchild), 맥스웰(Maxwell), 탱크(Tank), 보이즈 투 맨(Boyz II Men),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의 음악을 계기로 자라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호흡이 긴 보컬 라인을 좋아한다. <시스터 액트>에 삽입된 로린 힐(Lauryn Hill)의 노래만 봐도 한 프레이즈가 엄청 길지 않나. 근데 지금은 조금 나쁘게 말하면, 그런 표현의 미학들이 촌스러운 게 되버렸다. 시대가 바뀐 거다. 사람들이 멋있게 느끼는 지점이 바뀌었고, 신세대들이 그 이상의 멋을 제안했으니까. 조금 오만할지 모르지만, 그들을 선배라고 칭한다면 그 선배들의 몰락을 보며 존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똑똑하고 민첩하게 받아들인 이들만 여전히 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 나오더라.

그렇다면 본인은 현대식으로 해석을 한 케이스인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믹스테입 때는 BPM이 빠른 트랩 소울 음악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런 거에는 긴 프레이즈를 할 수가 없으니 조금씩 호흡을 짧게 내며 툭툭 던지는 방식이 멋있게 다가오더라. 그리고 문어체 가사를 정말 좋아한다. 나는 내가 개성이 많이 부여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말할 때도 특별한 지점을 살리기 위해 신경 써서 좋은 단어를 선택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얘기를 꺼내려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려면 너무 문장형이지 않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을 가사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번 호흡을 뱉고, 다시 삼키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특히 '추모'부터 'SWEET SIDE'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듣는 사람조차 침울해지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다.

그게 죽음이 가진 힘인 것 같다. 영화나 문학도 그렇듯이, 죽음이 가지는 무게감이나 압도감이 있다. 그런 게 잘 표현이 됐다니 다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PAINGREEN>의 뒤를 이을 후속작 소식이 궁금하다.

사실 보통 앨범을 내면 후속 카드로 싱글을 남겨뒀다가 조금씩 풀면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게 보통인데, 나는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것 같다. 정확히는 앨범에 관한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노래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 엔지니어링 전부. 게다가 주목을 받으니 해야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이를테면 온스테이지에서 연락이 왔을 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무대적인 연출을 구상해야 했고, 또 공연이 잡혔을 때는 한 시간 가량으로 셋리스트를 꾸려야 했으니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게 있었나.

우선 남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음악가들이 레슨을 돈벌이 수단으로 가져가지 않나. 그러나 만약 자기 발표물이 없는데 레슨을 계속한다면 그건 음악가가 아니라 튜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능력이 좋은 튜터라면 삶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 근무 시간이 만들어지고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일단 의식주가 해결이 되니까. 근데 그러다 보면 또 간절한 음악이 나오지 않기도 한다. 일종의 선순환이자 악순환에 가까운 고리가 생기는 거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돈벌이를 안 하고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PAINGREEN> 이후로는 내가 홈레코딩 수준에서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고 이러한 지향점을 갖고 있으면 누군가는 배우고 싶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 최근에는 서울문화재단의 문래예술공장에서 기획하여 유망 창작자에게 지원금을 주는 '비넥스트(BENXT) 프로젝트'에 당선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레슨과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작품에 몰두할 시간이 많이 줄었다. 조금은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곧 '한대음' 시즌이 돌아오지 않나.

사실 후보에는 한번 올라봤으니 언젠가는 수상을 해보고 싶다. 그 때만 해도 음악을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아볼까 하는 마음도 있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끌려 올라가 보니 욕심이 좀 나더라. 아, 최근 에피소드가 떠올라 하나 말하자면, 백신 2차를 맞고 집에 쉬던 날이었다. 2차 접종 후 고통이 따른다고 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궁금하기도 한 위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창가에 앉아 3~4시간 동안 들어오는 직사광선을 맞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건반을 잡고 시도하거나 어떤 워딩을 떠올리며 쓰곤 하지만 그날은 막 써졌던 것 같다. 아마 그 곡들이 후속작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

후속작에서 다루고자 하는 메시지나 원하는 방향이 있을까.

음, 우선 내가 꿈꾸는 음악의 지붕은 '추모'라는 곡이 가까운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고, 왜 이런 소리를 썼을까 싶은 시도가 많은 곡이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작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쓰고 있는 노래들이 윤곽이 잡혀가고 있는 와중에 이게 전작의 'HURT'만큼 맛있을지, 아니면 과감하고 독창적인 선에서 끝날지는 모른다. 무릇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2집에서 쇠퇴하는 소포모어 증후군을 겪을지, 아니면 다시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후속작에 실릴 음악들은 나 스스로를 감동케 하는 노래들이다. <PAINGREEN> 이후로 많은 심적 평화를 얻었기 때문에 전작만큼 날이 서 있거나 어떤 짓눌리는 죽음의 온도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선택한 음악인 만큼 '이 정도면 됐다'하고 내는 앨범은 아니다. 마음이 아플 만큼 솔직한 노랫말들이 많지만 굉장히 희망을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고, 듣는 이들의 개인적인 절망을 응원하는 앨범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서사적으로도 연결이 되는 건가. 죽기 직전의 감정에서 삶을 선택한 이가 다르게 직면하는 문제들 같이.

죽음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문학적으로 멋있으려면 <PAINGREEN>을 내고 죽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후속작은 살아 있는 내가 하는 얘기로 연결된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으니 음악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잘 살아내려면 이제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또 있다.

발매 시점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나.

내년 가을쯤으로 예상 중이다.



에이트레인의 음악 세계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와, 그 아티스트의 베스트 앨범이 있을까.

우선 첫 번째는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다. 최근에도 앨범을 냈는데, 내가 좋아하는 앨범은 그전 작품인 <Assume Form>이다. <Overgrown>은 굉장히 좋아하지만 이해는 잘되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런 소스를 선택하고 강박적으로 그루브를 제거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천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뽑자면 최애는 아니다. <Assume Form> 희망을 주는 앨범이다. <Overgrown>이 자신의 우울을 담아놓았다면, 이 앨범은 그런 시간을 지내보고 문을 열어 나왔더니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고 얘기한다. 어떻게 보면 사는 방향에도 영향을 준 앨범이다.

두 번째는 <본 이베어(Bon Iver)>다. 특히 <Bon Iver>는 교과서 같은 앨범이다. 프런트맨인 저스틴 버논(Justin Vernon)이 굉장히 개인적인 우울과 상실을 겪고, 오두막으로 들어가 만든 음악으로 알고 있다. 컨트리한 분위기도 너무 좋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지만, 어느 날 히스 레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크레딧에 'Perth'가 나오더라. 알고 보니 그가 살았던 호주의 해변 마을 이름이었다. 히스 레저는 많은 걸 느끼고 행동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겪은 약물 의존이나 불면증에 내가 이입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앨범을 너무 좋아한다. 내가 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기에 질투도 안 나는 정도다.

세 번째는 아우스게일의 데뷔작 <In The Silence>다. 흔히 우리가 아이슬란드 음악이라 하면 제일 유명한 게 시규어 로스, 비요크지만 조금은 난해한 부분이 있지 않나. <In The Silence>는 그런 요소를 망라하여 잘 정리한 아이슬란딕 팝이다. 이 앨범은 내가 믿은 어떤 음악의 지향점이 대중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앨범이다. 7년 전 앨범인데 엔지니어링이 요즘보다도 좋다.

제임스 블레이크나 본 이베어, 그리고 초두에 언급한 오소영 모두 초기작부터 여러 음악적 변화를 거쳐온 뮤지션이다. 혹시 에이트레인 본인도 언제든지 변화의 시기가 찾아올지, 또한 찾아온다면 받아들일 생각이 있나.

만약 능력만 된다면 포크를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이 되보고 싶다. 요즘은 어쿠스틱만 존재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질투도 안 날 만큼 멋진 뮤지션은 전부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더라. 전자 악기를 다루더라도 자기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면 특별한 일렉트로니카를 만들 수 있으니, 나도 그런 음악가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만약 콜라보 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을까?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빈지노님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서로의 삶이 흘러가는 와중에 어떤 계기로 군대 가기 전 그가 작업실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해줬다. “하고 싶은 음악과 말을 중학생 때부터 원 없이 해왔더니, 어느 순간 회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오더라. 그러나 그때까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계속해봐야만 자기 색깔이 나온다. 지금 유행하는 음악이나 나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너만의 음악을 찾을 때까지 해봐라.” 그가 떠나고 나서 회사 사람들은 내게 '아니다, 지름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더라. 나도 그때는 맞는 말이지만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빈지노님보다는 늦게 음악을 시작하기도 했고. 근데 이제는 알겠더라. 하고 싶은 걸 다 해봐야 그제서야 오는 게 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때 우리가 짧게 겪은 일화에 대해 음악으로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존경과 감사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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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둥 “우리 함께 지지 않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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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가사는 벅벅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다. 연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버둥을 만난 뒤 적은 글귀다. 작은 체구에 연일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있는 이 작은 아티스트는 도대체 어떤 생각과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인정했듯 그의 많은 고민의 결들은 작고 잘게 뭉쳐져 버둥 음악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한때 아주 많이 날카로웠고 때때로 분노에 차 있었다.

그 시기를 거쳐 얼마 전 정규 1집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를 발매했다. 한결 가벼워진 시선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이번 음반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썼다고 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쓴 버둥.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눈길이 이동하는 동안 어떤 것을 잃고 얻으며 무엇을 읽어 냈을까. 모든 답은 음악 속에 있다. 버둥이 말하는 '지지 않는 곳'의 첫 막이 이제 막 먼지를 털고 마이크의 볼륨을 키웠다.



우리 함께 '지지' 않는 곳으로

첫 정규 음반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의 발매를 축하한다. 기분이 어떤가?

앨범 작업을 할 때마다 이번에 내야겠다는 확실한 '계기'가 있다. 계기가 있다는 건 발매할 이유도 확실해진다는 것이지만 반대로 지금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음먹었다고 작품을 완성하는 건 아니니까 뜻했던 시기에 음반을 묶을 수 있어 감사하다. 아직 음반 활동이 마무리된 게 아니기 때문에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보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알리고 기다려준 팬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확실한 '계기'가 있다고?

어느 순간 늘 이어오던 고민의 답이 찾아지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고민들이 이 결론을 위한 것이구나 싶다고나 할까? 나는 음악 활동을 시작한 18살 때보다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 뭘 고쳐야 할까?' 늘 생각했다. 그러다 올해 완벽하지 않아도 내 모습을 누군가 좋아하고 믿어주면 그걸 기반으로 나아갈 수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고민을 맺을 수 있는 답을 찾았고 그게 이번 정규 음반의 '계기'가 됐다.

지난 EP <조용한 폭력 속에서>(2018), <잡아라!>(2020)가 개인적이고 날카로웠다면 이번 음반은 훨씬 대중적이다.

이전 EP는 나를 돌아보며 내 고민과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작업을 많이 했다. 반면 이번 정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그들로 인해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들로 인해 내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를 썼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걸 담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되도록 맞추려고 했다. 많이 듣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는 버둥을 담은 핑크빛 음반 커버도 강렬하다.

커버를 두 번 갈아엎었다. 먼저 컨택 했던 분이 있었는데 편곡을 진행할수록 사진과 내 작품의 색이 점점 달라졌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수가 없어 직접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금 커버를 찍어준 김무무 님의 사진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무무님을 만나 내가 작업한 커버를 보여드렸는데 표정에 걱정이 가득하셨다. (웃음) 무무님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써보는 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해줬다.



무무의 사진이 이번 작품의 메시지를 잘 담고 있던 건가?

그것보단 무무 작가님이 나를 많이 아껴준다. 나를 아끼는 사람이 보는 시선을 쓰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버둥 같고, 담고 싶던 버둥의 모습을 찍어준 거니까.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선이면 음악과도 당연히 연결되지 않을까?

붉은빛, 핑크빛이 도는 사진을 선택한 건 여러 색을 시도해봤지만 이 색이 나와 제일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예술도 비슷할 것이라고 보는데 의도를 가지고 모든 걸 다 끼워 맞추기보다는 어떤 우연성을 믿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음악을 듣고 붉은빛의 커버를 보면서 의미를 각자가 유추하고 찾게 되는 식으로.

눈에 띄는 버둥의 강점이 있다. 바로 작명 센스. 캐치한 제목을 정말 잘 뽑는다. 그중 '씬이 버린 아이들'이란 곡명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나는 이러다가 신에서 진짜 버려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제목이 자극적이기까지 하니까... (웃음) 근데 그게 내가 활동하면서 실제로 느낀 감정이다. 어딘가에 선택받지 않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심지어 불합격은 연락도 잘 받을 수 없지 않나. 어느 순간 그게 내가 더 잘나고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1년 전에는 쳐다도 안 보던 작업물을 다시 갖다줬을 때 너무 좋다고 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처럼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분명 이런 상황을 종종 겪을 거다. 그럴 때 힘들어하기보다는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의 자세를 갖자고 말하고 싶었다. 곡을 쓰고 공연하면서 내가 갖는 마인드다. 아이러니하고 웃긴 상황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으니 유쾌하게 돌파하자.

그래서일까? 음반 타이틀이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인 것이 버려지지 말고 차라리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는 일종의 선언처럼 읽힌다.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이 참 많다. 이 순간이 계속 지속 됐으면 좋겠다. 내가 더 많이 알려지면 그만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게 될 거다. 친구들 또한 몇몇이 이사라도 가면 현재처럼 가까이 지낼 수 없을 거고. 그걸 지금 고민할 필요는 없지만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순간이 계속 지속되길 바랐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해서라도.

소설 <어린 왕자>를 보면 어린 왕자가 행성에서 노을을 보려 의자를 당기는 신이 있다. 그걸 읽으며 '해가 지지 않는 곳으로 가자'라는 타이틀을 떠올렸다. 그러다 우리가 실제로 버려지고, 지더라도 서로 얘기 나눴을 때 그걸 그냥 재밌게 넘길 수도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남들은 다 졌다고 하지만 우리끼리는 이겼다고 하는 순간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그곳으로 함께 가자. 하며 중의적인 의미로 제목을 지었다.

얼마 전 목표 금액의 5배를 웃돌며 실물 앨범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에 성공했다. 앨범을 에세이집 형태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인쇄비 정도만 모으려 시작했던 프로젝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이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했고 또 당황했다. 기대하시는 만큼의 퀄리티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이... 교정을 네 번 이상 보며 최선을 다했다. (웃음)




'버둥'을 읽는 방법

기사를 찾아 읽으며 버둥이 늘 '여성'에 방점 찍혀 다뤄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2~3시간 구구절절 이야기해도 결국 누군가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많을 걸 꺼내놔도 꽂히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게 크게 확대된다. 나에게 관심을 주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시선 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오려 노력하지만 여젼히 실패할 때가 많다.

<싱어게인>을 하면서 특히 그랬다. 그때 머리가 지금보다 짧았는데 댓글이 참 재밌었다. '머리 짧으니까 페미 아니냐', '페미 아니면 응원한다' 등등. (웃음) 내가 어떻게 만들어도 사람들이 그렇게만 본다면 아예 모호하게 해볼까 싶기도 했다. 안 듣고 싶은데 계속 입으로 따라 부르게 되는 중독적인 선율로. 또 뭉뚱그린 가사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하하하.

이전 싱글 'How much', '칼' 등에서 이번 음반의 '00', '연애' 등으로 글감이 바뀐 것도 비슷한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분노가 컸다. 다수의 여성이 그렇겠지만 내가 겪는 어떤 신체적, 외모적 차별들이 모두 내 탓인 줄 알고 자랐다. '내가 뚱뚱하니까...' 하는 식의 것들이 있지 않나. 그게 잘못됐던 것임을 알게 되면서 내가 나를 가둔 시기에 대한 분노와 보상심리가 생겼다. 이전 작품이 날카롭다고 느낀다면 내가 그 분노들에 주목했기 때문일 거다.

분노가 지나가면 슬프다. 또 외롭기도 하고. 이제 나는 모든 게 반드시 내 잘못은 아니지만 또 어느 측면에서는 분명 내 잘못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2장의 EP에서 그런 감정을 어떻게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내렸다. 전작들을 통해 해소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질문들이 찾아왔다. 앞서 말했듯 그걸 이번 정규를 통해 풀었다.

뮤지션 '버둥' 이전의 한 개인으로서 성장 서사가 있다.

점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많아진다. 그들을 보며 내가 어떤 걸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번 음반의 '공주이야기'는 아이돌을 보면서 쓴 얘기다. 실제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릴 때가 있다. 어른들이나 대중들이 그들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는 거니까 실제 그 파도 위에 있는 어린 여성은 어떤 마음일까 상상하며 썼다.

중요한 건 시점이 달라졌다는 거다. 예전에는 '그 어린 여성'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면 지금은 그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의 시선에서 가사를 쓴다. 그렇다 보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게 된다.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별로야, 우스워하는 뉘앙스가 묻어난달까?

더 다양한 면을 비추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나. 내가 더 많은 작품을 쓰면 지금과는 다른 상징이 생길 수도 있다. 예전엔 내게 붙는 수식어들에 대해 고민했다. 근데 사회가 그렇게 오래 기억하지 않더라. 조금 더 똑똑하게 '내가 그걸 가지고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은 그냥 다 보고 있다. 누가 내 노래를 이렇게 저렇게 듣고 얘기하는구나 하면서.

그런 마인드를 가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늘 내게 부족한 면만 봐 왔다. 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이만큼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회사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마케팅이나 비주얼 라이징을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인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버둥은 회사 필요 없잖아'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버둥을 볼 때 고집이 있고 잘하니까 '회사가 하자는 쪽으로 안 하겠지' 지레짐작하는 것 같다. 물론 하자는 대로 다 하겠다라고는 하지 않지만 '왜 이렇게 해야 하죠?' 질문했을 때 납득 가능하고 감당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시도 하는 편이다. 믿는 사람이 조언하면 설사 그게 손해가 될지라도 일단 한번 해본 뒤에 돌아본다. 충분히 얘기 나누면서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버둥이 생각하는 뮤지션 버둥은 어떤 존재인가.

이번 정규를 만들면서 내가 결국 작업을 오래 할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아무도 나를 안 찾아줘도 뮤지션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가 끊기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난 할 이야기들이 많다. 또 나는 고민이 많다. 그리고 그걸 글, 영상, 말 등을 통해서 정리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 그걸 인정하고 깨달았다. 어떤 식으로든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할 사람. 느리더라도 계속 이 일을 할 버둥. 확신이 생겨 요새는 마음이 좀 느긋하다. (웃음)

처음 작업을 할 때 뭘 먼저 해야 할 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운이 좋아 시행착오를 적게 겪었다. 이때 선배들의 짤막한 작업기를 보는 게 큰 도움이 됐다. 마찬가지로 이제 활동을 시작하는 분들 중 내 작업방식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프로세스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또 내가 워낙 한 노래에 많은 의미를 담는 편이라 팬분들에게 그 내막을 설명해주고도 싶었고.


<싱어게인>, <슈퍼스타 K7>, '밴드 디스커버리', '오월 창작 가요제' 등 버둥이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 손의 손가락을 다 접어도 부족하다. 그 싫어하는 경쟁에 직접 참여한 건 그만큼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버둥은 나를 알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엔 각양각색의 버둥을 만날 수 있는 'Q&A', '브이로그', '라이브 스트리밍' 콘텐츠가 가득하다. 현재 5천여 명의 구독자와 소통 중. 음악 외의 영상, 사진 작업 또한 찰떡같이 제 색을 찾아 잡는다. 다재다능과 선명한 욕심, 그리고 열심을 기반으로 버둥은 부단히 길을 닦고 있었다.



슈퍼스타가 된 버둥. 전국투어, 노들섬 그리고 고척돔!

고민 많은 버둥. 요즘 삶은 어떤가?

과분한 관심에 감사해하며 지내고 있다. 가끔 어떻게 하면 지금 버둥 정도로 자리를 잡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근데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다. 나는 EBS '헬로루키'를 비롯한 경연 덕을 많이 봤다. 지금은 코로나로 경연, 오디션 자체가 줄어 들었으니... 나 또한 1년만 늦었으면 누렸던 많은 기회를 놓쳤을 거다.

정규를 내면서 솔직히 업무량이 꽤 많아졌다. 이걸 내가 다 혼자 처리하면 음악 활동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지만 노래를 연습하고 창작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진다. 같이 일해줄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속사의 손길이 필요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한 해 한 해 나이가 차니까 조급해지는...

정규 1집 발매 전후로 체감되는 외부의 반응 차이가 있는지.

차이라기에 예전에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웃음) 과거엔 그냥 버둥이라는 애가 있더라 정도였다. 정규 1집을 내면서부터 내 음악에 대한 깊은 평가나 이야기들이 생겼고.

반면 버둥의 '찐팬'은 활동 초창기부터 있더라.

너무 감사하다. 나를 오랜 시간 좋아해 주는 것을 보면 또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가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걸 봐도 버둥이 해석하는 틀이 있고 거기에 디테일한 관점을 더하는 편이다. 이런 관점에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내 음악을 사랑해주는 것 같다. 팬들을 통해 내 시선을 의심하지 않아도 됨을 느낀다.

자신의 아픈 서사를 드러내고 이를 좋은 선율과 시선으로 녹여내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첫 곡 '처음'. 모르는 걸 물어봤을 때 잘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말을 섞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조금 구분할 수 있게 됐지만 첫 EP를 낼 때만 해도 정말 힘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아는 척 해야 하고, 모르는 걸 언제까지 숨겨야 하는지. 얼마나 웃어야, 얼마나 울어야 하는지... 그런 마음들을 가사와 멜로디로 잘 정리한 것 같다.

EP 2개와 이번 정규 음반까지 모두 밴드 줄리아드림의 박준형 PD님과 작업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준형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웃음) 이번 작품이 보다 대중적이어 진 데는 준형의 의견이 한몫했다. 슈퍼스타가 된 버둥. 준형의 이번 프로듀싱 키워드였다. 녹음 디렉팅을 줄 때 여기가 고척돔이고 4만 명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더라. 상상은 잘 안 됐지만... 하하하.

고척돔? 물론 가능이다. 가사도 너무 좋고, 기획도 너무 잘하고, 음악도 끝내주니까!

1월 말에 노들섬에서 크게 쇼케이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 전국 투어도 준비 중이고. 표를 다 팔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현장에서 앞서 제작한 에세이집을 판매할 예정이니까 아직 구매하지 못한 분들은 참고해달라. 투어 일정은 조만간 공개하겠다. (웃음)

버둥을 위로해주고 지탱하게 한 작품이나 뮤지션이 있다면?

이번 앨범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랑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이다. 관계에 있어 늘 자책했다면 이 음악을 통해 여유를 많이 얻었다. 내 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게 내 탓만은 아니다 하는 깨달음. 많은 위로가 됐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그들로 인해, 그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데에 랑의 노래가 큰 역할을 했다.

음악 일을 멈출 수 없는 동기 중 하나 역시 이런 뮤지션들 때문이다. 멀리서 즐겨듣던 음악가 곁에 가볼 수 있고 그들의 음악을 때로 '미리', '먼저' 들어볼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주는 큰 매력이다. 이번 에세이집 아이디어도 랑의 <신의 놀이>를 통해 얻었다. 나 역시 꾸준히 다양한 시도를 하며 언젠가 직접 회사도 운영해보고 싶다. (웃음)


하나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비하인드 가득한 대화였다. 벽장 아래 살며 자신의 가치를 모르던 한 캐릭터처럼 버둥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석인양 빛났다. 자신을 잘 알았고 그걸 잘 꺼낼 줄 알았으며 적절하게 포장까지 할 줄 아는 영리한 아티스트. 지지 않는 곳으로 부단히 발걸음을 옮기는 버둥. 그의 여정을 계속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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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울 디바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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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그 파급력과 영향력은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그 어느 나라 가수든 흑인 가수처럼 노래하면 훌륭한 가창력을 가진 가수로 인정받으니까요. 하물며 미국과 DNA가 가장 유사한 나라 영국에서 이런 소울 가수들이 많이 탄생한 건 당연합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등 영국의 백인 여성 소울 싱어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그 시작은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이즘 특집에서는 팝 역사에서 인정받은 영국의 백인여성 소울 싱어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

이 분야에서 단 한 명만 꼽으라면 저는 이 사람을 선택하겠습니다. 그의 메조소프라노 음색은 깊고 푸근하죠. 제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저를 다 이해하고 감싸줄 것 같은 그 엄마 같은 음색은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안아 줍니다. 우리나라 기성세대는 웅대한 발라드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나 'Windmills of your mind'를 사랑했고요. 1997년에 개봉한 영화 < 접속 >에 삽입된 재즈 스타일의 'The look of love'로 X세대에게도 알려진 그는 1999년에 59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또 저처럼 1980년대에 팝송을 열심히 들으신 분들에게는 펫 샵 보이스와 함께 부른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로도 유명하죠.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았지만 그 진가는 후배 가수들에 의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아이돌 밴드 베이 시티 롤러스와 닐 영의 백업 싱어 출신의 니콜레트 라슨, 1980년대의 댄스팝 가수 사만사 폭스가 커버한 명곡'I only want to be with you'를 비롯해 모던 포크를 들려준 페미니스트 싱어 송라이터 애니 디 프랑코가 부른 'Wishin' and hopin'', 개러지 리바이벌의 선두주자 화이트 스트라이프스가 부른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가 바로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원곡이거든요. 영국 소울의 여왕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노래는 대중음악의 거룩한 유산입니다.



애니 레녹스(Annie Lennox)

1983년에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가 여장을 하고 등장하자 유리드믹스의 보컬리스트 애니 레녹스는 남장을 했습니다. 여기에 중성적인 외모, 낮은 목소리 톤, 무표정한 얼굴은 애니 레녹스를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죠. 사실 이런 휘발성 화제 때문에 그의 가창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애니 레녹스는 분명 뛰어난 보컬리스트입니다. 유리드믹스의 대표곡인 'Sweet dreams'나 'Here comes the rain again'보다는 큰 히트곡이 아닌 'Who's that girl?'과 'There must be an angel'을 들으면 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아레사 프랭클린이 유리드믹스의 노래 'Sisters are doin' it for themselves'에서 애니 레녹스와 함께 호흡을 맞췄는데요. 천하의 아레사 프랭클린이 아무하고나 듀엣을 부를 리는 없겠죠. 이것만 봐도 그의 가창력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나요?



앨리슨 모이에트(Alison Moyet)

낯선 이름이지만 1980년대 초반에 인기를 얻은 'Don't go', 'Situation', 'Only you'의 주인공 야즈의 보컬리스트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의 낮은 톤에서 느껴지는 힘과 거침없이 질주하는 활화산 같은 보컬은 냉정한 신시사이저 소리와 대비되며 야즈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뉴웨이브/신스팝 그룹들과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죠. 그는 1984년에 솔로로 독립해서 'Invisible'이라는 멋진 노래를 영국 차트 21위, 빌보드 31위에 안착시켰는데요. 이 곡의 작곡가는 모타운의 포 탑스와 슈프림스의 명곡들을 만든 작곡자 중 한 명인 라몬트 도지어입니다. 이 작곡 명인이 'Invisible'을 선뜻 제공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앨리슨 모이예트의 소울풀한 감성은 이미 증명된 거죠. 또 1985년에 열린 역사적인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는 영국의 또 다른 블루 아이드 소울 싱어 폴 영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리사 스탠스필드(Lisa Stansfiled)

1990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3위, 영국 차트 정상에 오른 'All around the world'로 인기를 얻은 리사 스탠스필드의 첫 인상은 '배우 소피아 로렌과 비슷하네'였습니다. 광대뼈 나온 볼과 두꺼운 입술이 소피아 로렌을 떠올렸거든요. 그의 음악은 댄스팝과 어반 알앤비의 기초 위에 쌓아올린 조화로운 결과물입니다. 돌이켜보면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미국의 블루 아이드 소울 가수 테일러 데인에 대한 영국의 대답이었죠. 데뷔앨범에 수록된 'What did I do to you'는 바로 테일러 데인의 판박이니까요. 리사 스탠스필드의 가창력과 감성은 검정색에 가까웠고 그의 열정은 존경하는 선배 배리 화이트에게 맞닿았습니다. 배리 화이트의 'Never never gonna give you up'을 커버했고 나중에는 그와 함께 자신의 유일한 히트곡 'All around the world'를 함께 부르는 영광까지도 누렸으니까요.



조스 스톤(Joss Stones)

조스 스톤을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17살이던 2004년이었습니다. 16살에 데뷔한 조스 스톤의 음악은 예상과 달리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댄스팝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님 세대가 좋아할만한 1960, 1970년대의 소울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음반사에서도 10대 소녀 조스 스톤을 보컬 천재로 홍보했었죠. 데뷔앨범 < Soul Sessions >는 실제로 1960, 1970년대의 노래들을 리메이크한 음반인데요. 컨트리 가수 웨일런 제닝스의 'Chockin'kind', 미국의 하드록 밴드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Some kind of wonderful', 개러지 록 밴드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Fell in love with a boy' 같은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가 10대 소녀에 의해 진득한 소울/블루스로 환복했습니다. 2000년대 영국의 네오 소울의 시작은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아델도 아니었습니다. 2019년에 북한에서도 공연했던 용감한 여성 조스 스톤입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조스 스톤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인생은 불꽃같았습니다. 영화 < 이유 없는 반항 >의 주인공처럼 무모했고 재니스 조플린처럼 무절제했죠. 술과 약물은 그의 몸과 정신을 좀먹었지만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그 혼돈을 음악에 쏟아 부었습니다. 진한 화장으로 자신을 가린 그의 노래가 처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진 건 바로 가짜가 아니기 때문이죠. 대표곡 'You know I'm no good'과 'Rehab'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일기 같은 곡입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소울 가수로 알려졌지만 그의 음악 바탕은 재즈인데요. 그래서 자유롭게 구애받지 않고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 에이미 >에서 그의 경호원이었던 사람의 마지막 멘트가 생각납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자기 노래를 듣고 그 경호원한테 “나, 노래 꽤 잘하네”라고 말하자 경호원은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이렇게 대답하죠. “그 재능 다 물리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27살에 눈을 감은 영국 소울의 여제가 원했던 것은 음악이 아니라 자유였습니다.



더피(Duffy)

저는 2000년대 등장한 영국의 소울 여가수 중에서 더피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제가 과거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이후에 발표한 2집이 별로였기 때문이지만 2008년도 데뷔앨범 < Rockferry >는 저에겐 그해 최고의 음반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그 어느 네오 소울 가수의 앨범들보다 < Rockferry >가 제일 복고적이었는데요.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떠오르는 외모의 더피가 1960년대의 월 오브 사운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고전적인 분위기를 도입한 이 음반에서는 메가 히트곡 'Mercy'가 사랑받았지만 감정을 서서히 이끌어내는 'Rockferry'와 처연한 'Warwick avenue'가 핵심입니다. 이 두 곡만으로도 더피는 인생 곡을 얻었죠. 같은 시기에 경쟁한 아델이 'Chasing pavements'로 2009년도 그래미에서 올해의 신인과 최우수 여성 팝 보컬 부문을 수상할 때 더피는 < Rockferry >로 그래미에서 최우수 팝 보컬 앨범을 수상했습니다.


 

아델(Adele)

19, 21, 25, 30. 간격이 점점 넓어지는 이 숫자의 행렬은 아델이 발표한 앨범의 제목입니다. 이 음반들을 제작할 때 자기 나이를 타이틀로 정한 거죠. 데뷔앨범에서 알 수 있듯이 아델 역시 조스 스톤의 방법처럼 어린 나이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조스 스톤이 처음부터 선배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한 것과 달리 아델은 밥 딜런의 'Make you feel my love'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작곡 혹은 공동작곡한 노래들이었습니다. 조스 스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 조스 스톤과 아델의 미래는 결정된 거죠. 덕분에 아델은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싱어 송라이터로서의 위상도 확실히 다지며 201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5곡의 빌보드 넘버원과 영화 < 007 스카이폴 >의 주제가 취입, 15개의 그래미 수상 등 그동안 아델이 얻은 이 훈장들은 그의 음악이 거둔 승리에 따라오는 전리품일 뿐입니다.



 픽시 로트(Pixie Lott)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더피의 성공에 이은 후발 주자로 낙점된 픽시 로트 역시 2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데뷔한 영국의 네오 소울 가수입니다. 2009년에 공개한 데뷔앨범 <Turn It Up Louder>에서는 'Mama do'와 'Boys and girls', 'Cry me out'이 연달아 인기를 얻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음반이 발표됐지만 당시 국내에선 영국 네오 소울 3인방의 그림자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죠. 그러다가 이하이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Mama do'를 부르며 뒤늦게 알려졌고 그 여파로 소규모 쇼케이스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노래는 알앤비와 댄스팝이 섞인 'Mama do'보다는 복고적인 소울을 재생한 'Cry me out'인 것 같습니다.

 


팔로마 페이스(Paloma Faith)

28살에 첫 음반을 냈으니 위에 언급한 가수들보다 늦었고 세계적인 인지도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죠. 보통 사람들은 팔로마 페이스를 알지도 못했고 또 알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복고를 지향하는 다이안 워렌 작곡의 'Only love can hurt like this'와 소울과 댄스팝이 균형을 이룬 데뷔 싱글 'Stone cold sober'에서 드러나는 팔로마 페이스의 에너지는 범상치 않은데요. 내면의 광기와 키치적인 외면이 독한 매력의 팔로마 페이스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가짜도, 허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음악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요.




미국과 DNA가 유사한 영국은 대중음악의 세포도 비슷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미국 흑인의 음악인 소울 역시 영국 뮤지션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이것을 영국화시켜 전 세계에 수출했죠. 위에 소개해드린 가수들 외에도 조 카커, 폴 영, 샘 스미스 등 수많은 영국의 남성 가수들도 흑인 창법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0년에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미국 사회는 보수적인 색체를 띄기 시작했고 덩달아 컨트리 뮤지션 캐리 언더우드나 테일러 스위프트, 미란다 램버트, 리앤 라임스, 딕시 칙스, 레이디 안테벨럼 등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과 비슷한 상황이었죠. 이때 영국은 이와 반대로 흑인음악인 알앤비/소울을 구사하는 여성 싱어들을 주목하고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 계를 장악한 영국의 백인 소울 가수들은 흑인음악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았죠. 되돌아보면 흑인음악을 하는 백인 가수는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백인음악을 하는 흑인 가수는 적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세계 역사에서 흑인은 늘 피해자 입장이었지만 대중음악 분야에서만큼은 흑인과 흑인 문화는 완벽한 승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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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하, 늘 발전하는 보컬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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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에 만난 정동하는 그가 경연 프로그램에서 펼친 다채로운 퍼포먼스만큼이나 유연했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승승장구하며 자신을 각인했지만 솔로 명의로 발표한 곡들의 존재감이 옅었던 게 사실. 그러던 그가 경사를 맞았다. 작년 1월께 발표한 싱글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서서히 인기를 높이더니 어느덧 노래방 애창곡이 된 것이다. '이 곡을 통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채웠다.'라고 말하는 그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행형 보컬'이라고 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대응해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어가고 있다는 설명. 팬데믹의 기간 그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음악적 성숙을 이뤄냈다는 그는 록커의 정체성에 매몰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덧 솔로 경력 10년 차에 접어든 정동하는 '부활의 보컬' 다섯 글자가 주는 무게감 혹은 책무감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만나서 반갑다. 근황은 어떠한가?

코로나로 인해 평년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수 소향과 공연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원래는 KBS2의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이하: 불후의 명곡) 에 자주 출연했지만, 경연 가수의 이미지가 강해지는 것 같아 요즘엔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2012년 말부터 2013년도까지 고정 출연하다가 그 이후로는 특집 때에만 나갔습니다. (정동하는 우승 트로피 15개를 보유, 2021년 현재까지 <불후의 명곡> 최다 우승자다) 2016년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리 음악 쇼 복면가왕>에 출연해 36대 가왕이 되었죠.

경연 프로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경연 프로그램은 마치 F1 레이스 같았습니다. 500명 소규모 대중에게 노래의 매력을 전달하는 게 목표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실험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전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 노래를 시작할 때에는 기량을 선보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그 후로는 이야기, 메시지, 감정선의 전달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노래하게 되더라고요.

부활 활동을 하면서도 점차 가창에 힘을 빼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목소리에 이끼가 낀 가수'라는 표현을 기억합니다. 예전 가요들을 들으며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 힘을 빼고 자기 안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메시지의 훌륭한 전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의 대표곡을 얻었다!”

2021년에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꾸준히 불리는 곡이 탄생했다.

개인적으론 '나름'을 넘어선 '최고'의 성과였습니다. 2005년 7월 데뷔하여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생각이나', '사랑이란 건' 등 부활 곡으로는 종종 언급되었으나 솔로 경력을 대표하는 곡은 없었어요. 그래서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더욱 소중합니다.

감동적인 가사와 애절한 음색이 잘 어울린다. 소위 말해 '부르는 맛이 있는' 곡이기도 한데, 가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작곡자 문성욱이 부활 시절의 '생각이나'를 듣고 음악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훗날 작곡가로 데뷔해 저와 꼭 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요. 그 친구는 꿈을 이룬 셈이죠. 이번 곡에서 '생각이나'의 장점과 감성을 재현하려고 했는데 유튜브 댓글을 보면 대중도 그 의도를 파악하셨더라고요. 히트곡을 향한 갈망, 좋은 음악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픈 열망이 결합해 좋은 시너지를 낳았습니다. 일종의 노래방 도전 곡처럼 된 것도 성공 요인입니다. 부르기에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쉬운 곡도 아니라 많은 분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정동하에겐 여전히 록커의 이미지가 강하다.

저는 록커의 정체성, 록 음악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크게 없어요. 제 음악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 상태가 그냥 좋을 뿐입니다. 틀에 갇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떠한 길이 생기더라고요.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가수들이 특히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수는 백수와 한 끗 차입니다. 시간이 생긴 김에 대학교 학사 졸업을 하고 대학원 한 학기를 마쳤습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요. 그간 바빠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둘 채워가는 중입니다. 레이싱도 작년에 단 두 번 나갔지만,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발전이 있었나?

그간 무대 위에서 노래하기에 바빴지 제 음악을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태까지 발표한 앨범들과 직접 무대 연출을 맡았던 <불후의 명곡>을 점검하며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흉성의 구사 빈도가 높았다면, 지금은 비강을 많이 사용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변화 과정이 짚어가며 가창의 이해도를 높인 것 같습니다.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하며 시대에 맞춰가고 있다!”

정동하 보컬의 핵심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다른 가수들과의 차별점은?

'진행형 보컬'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연구하고 발전하려고 해요. 제 가창을 완성형으로 간주하고 연구를 멈추면 시간이 쇠퇴하게 됩니다. 시대마다 음악이 변하잖아요. 옛날 노래를 주로 트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과거 음악이 시대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음향 장비와 연주, 편곡 스타일, 악기 상태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당대의 숨결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 속 연기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노래에서도 과한 기교의 사용이 어색해진 느낌이에요.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하는 표현법으로 시대에 부응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부족한 면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려야겠죠.

보컬 녹음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가?

오늘 녹음을 만약에 두 개 한다고 가정하면 곡의 색깔에 따라 다른 분위기의 가창이 나옵니다. 녹음 전에 엄밀하게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순간의 감성이 곡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지 자문하거나 보컬 디렉터들에게 질문합니다. 벌스 구간에서 분위기가 잡히고 어느 정도 의견 합치가 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거죠.

'진행형'이라는 얘기는 결국 그 시대의 감성과 호흡이 다르기 때문에, 현시대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이런 측면에서 호응을 끌어낸 것인가?

가급적 담백하게 부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감정의 과잉이 아닌 담담함은 부활 시절 김태원 형님이 추구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진한 보컬을 선호하게 된다면 그 흐름을 따르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노래에 제 자신을 맞추는 편이고 그래서 곡마다 스타일이 다릅니다. (수줍게 웃으며) 아무래도 저는 <히든 싱어>에 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동하의 대표적인 강점은 라이브 실력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에 대해서요. 그런데 저는 싱글과 앨범 녹음을 지속해서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무대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평소 다른 뮤지션 콘서트에 초청받아 가면 객석에서 손뼉 치는 것도 어색한 사람인데 제 무대가 되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순간에 빠져들게 됩니다.


“무조건 많은 무대에 서고자 한다!”

최근 꽂힌 곡은 무엇이 있는가?

사실 요즘 음악을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학구파처럼 음악을 찾아 듣지는 않지만,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한번 들으면 잘 잊지 않고, 그렇게 기억해 둔 음악을 편곡에 활용하곤 합니다.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거위의 꿈'에서 'Over the rainbow'를 삽입한 게 그 예입니다.

최근에는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를 좋게 들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커버했습니다. 예전에는 1980년대 드럼 머신 사운드의 인위성을 싫어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감성이 된 것 같아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위켄드의 강점은 역시나 좋은 송 라이팅일 것이다.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도 곡 자체가 좋다. 성공 가도를 위한 키포인트는 역시나 '좋은 곡과 만남'이 아닐까 한다.

그 의견에 공감합니다. 작년 10월에 나온 '너의 모습'이 소소하게 사랑받고 있고 바로 지난주에 네이버 웹툰 <금혼령>의 OST인 '사랑과 이별 사이'를 발표했습니다. 전주가 긴 것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와 비슷한 결을 가진 곡이에요.



새해 첫 인터뷰인데 올해 계획을 묻고 싶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유가 생긴다면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한 해 계획은 8년째 동일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무대에 서서 관객 여러분들을 만나는 거예요. 무대가 되었든 유튜브던 팬들과 만날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게 목표입니다.

오늘날 정동하를 만든 정동하를 만든 곡, 앨범 혹은 가수를 알려달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릴 때부터 소리에 예민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음정이 불안한 보컬 곡보다는 연주곡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듣고 그런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앨범은 퀸의 <Greatest Hits>입니다.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의 하모니에 감탄했습니다. 학창 시절 하모니 혹은 팀워크를 이룰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그러다 발견한 게 밴드부였습니다. 처음에는 키보디스트로 들어갔지만 남자 학교에 건반 주자가 워낙 희귀해서 주목도가 높아지더라고요. 그걸 피하려고 오디션을 봤는데 어쩌다 보니 붙어서 보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밴드부 보컬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게 퀸의 앨범입니다.

닮고 싶은 보컬리스트로서는 임재범 선배를 꼽고 싶습니다. 진성과 가성의 경계에 있는 '반가성'을 그분처럼 유연하게 쓰는 분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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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서, 다채로운 장르가 어우러진 영화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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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서>(Black Panther)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18번째 작품,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에서 처음으로 존재를 알린 후, 마침내 캐릭터의 기원적인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냈다. 캐릭터 그 자체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한 셈.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인 와칸다가 주요 무대다. 와칸다는 '메탈 비브라늄'이라는 가공할 외계의 금속을 소장한 덕분에 지구상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국이지만, 제3세계 빈국인 척, 그 놀라운 힘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채드윅 보스만(Chadwick Boseman)이 와칸다의 뉴 킹 트찰라(T'Challa) 역으로 나온다. 그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부친의 대를 이어 블랙 팬서의 법통을 연계할 주인공. 새로운 국왕으로 나라를 이끌기 위해 귀국한 트찰라는 마이클 비. 조던(Michael B. Jordan)의 에릭 킬몽거의 위협에 직면한다. 킬몽거는 미국에서 용병으로 살아온 트찰라의 사촌이다. 왕권을 둘러싼 둘의 갈등과 적대로 내전이 벌어지지만, 형제였던 선친 때부터 이어온 악연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왕국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한다. 영화 “흑표범”(Black Panther)의 근간에는 특히, 1966년 창시된 미국의 '흑표당'의 역사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중력이 남다르다.

마이클 비. 조던(킬몽거 분)이 주연한 <크리드>(Creed)의 감독 라이언 쿠글러(Ryan Coogler)가 연출하고, <노예 12년>(12 Years a Slave)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루피타 뇽오(Lupita Nyongo), <겟 아웃>(Get Out)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다니엘 칼루야(Daniel Kaluuya), <라스트 킹>(The Last King of Scotland)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포레스트 휘태커(Forest Whitaker),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의 티나 터너(Tina Turner)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안젤라 바셋(Angela Bassett)과 같은 명배우들의 출연도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대목. 공인된 출연진으로 내구성을 확보한 <흑표범>은 너무 과도하게 심각하지 않으면서, 미국 주류영화로서 그 판도를 바꿀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모양새를 갖췄다.

주연으로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캐릭터를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완전히 다르게 실현했고, 고도로 발달한 문화와 역사는 물론, 다른 등장인물들의 독자적 성향도 강하게 나타난다. <블랙 팬서>는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슈퍼 히어로 액션'영화일 뿐만 아니라, 무기 거래와 노예 제도, 고립주의 대 세계주의자의 정치적 입장, 현대 미국의 흑인 어린아이들이 처한 차별적이고 불우한 환경까지, 중대한 정치, 사회적 논쟁거리들이 문제의식을 불러낸다.


 

<블랙 팬서>는 시각효과와 의상 등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탁이하다. 컴퓨터 생성 이미지(CGI) 효과는 최종 전투 장면 전개에서 특출하고, 유서 깊은 아프리카 시각예술을 건축과 의상에 세련되고 초현대적인 기술과 결합해냈다. 이처럼 탁월한 기술성은 스웨덴 작곡가 루드비히 고란손(Ludwig Goransson)가 영화를 위해 쓴 악보에서도 분명하다.

루드비히 고란손의 문화적 유산은 달라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중 미국 대중음악에 정통한 몇 안 되는 실력자다. 영화에서 작곡가 시어도어 셔파이로(Theodore Shapiro)와 <트로픽 썬더>(Tropic Thunder), <말리와 나>(Marley & Me), <센트럴 인텔리전스>(Central Intelligence)와 같은 영화의 추가 음악을 작곡하게 했으며, 쿠글러 감독과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Fruitvale Station)와 <크리드>(Creed)와 같은 영화의 스코어를 쓰면서 연을 맺었다.

고란손은 한편, 영화와는 별개로 음반 녹음과 제작자로서도 성공한 음악 예술가이다. 도널드 글로버(Donald Glover)와 그의 밴드 차일디시 갬비노(Childish Gambino)와 합작한 곡 'This is America'(이게 미국이야)로 2018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와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를 수상했으며, 하임(Haim), 챈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 등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이처럼 다양한 작곡가의 음악적 이력은 <블랙 팬서>의 스코어에도 반영되었다. 고전음악의 주제에 따른 관현악편성, 힙합과 R&B의 현대적인 리듬과 음의 질감에서 파생한 감응력, 그리고 많은 전통 아프리카 음악의 조합이 바로 그 성과.

아프리카 음악의 관점에서 고란손은 불확실한 민속적 타악기 연주를 음악 구성의 일부로 삽입하는 것으로 적당히 끝냈으면 작업이 매우 손쉬웠을 테지만, 더욱 심층적인 조사를 통해 그의 작업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고란손은 우선 세네갈로 가서 토종 가수 겸 기타연주자 바바 말(Baaba Maal)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와칸다의 정령이 된 세네갈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고란손은 영화의 특정 지점에서 해당 장면의 극적인 내러티브와 감정적 영향을 향상하기 위해 쓰인 큐(cue)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말의 고음으로 치솟는 보컬을 사용한 한편, 세네갈 토킹 드럼(Talking drum), 풀랑 플루트(Fula Flute), 코라(Kora), 부부젤라(vuvuzela horn)까지, 서아프리카의 토속 악기들을 포함한 92인조 오케스트라와 남아공의 코사어(Xhosa)로 노래한 40인조 합창단을 결합해냈다. 풀랑 연주자는 단순히 부는 것 외에도 확장된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세네갈 전통 타악기 사바(Sabar)를 이용해 특정한 음색의 장단을 쳐준 것 또한 색다른 면.



현지답사를 통한 음악적 탐구와 문화적 이해에 따른 음악의 깊이는 물론 그 자체로 이 존경할 만하지만, 영화 내에서 구조적으로 조화롭지 못하면 사실상 그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독립된 음악으로 그 완성도나 우수성은 차치하고라도, 영화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합목적성, 또는 효용성 차원에서 그 가치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 고란손의 작곡은 다행히 기능성 면에서도 성공적이다. 트찰라와 와칸다 그리고 블랙 팬서를 하나의 결합적 개념으로 묶어낸 한편, 킬몽거를 위해서는 구별되는 두 가지의 주제음악을 반복해 사용했다. 이러한 기본적 악상은 악보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얼개를 이루며 지속해 나타난다.

트찰라와 와칸다, 그리고 블랙 팬서의 테마는 다양한 악상을 전파하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두 부분으로 축약된다. 첫 번째 부분은 장엄하고 영웅적인 팡파르이고, 두 번째 부분은 9개의 음이 리듬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종종 관악기의 팡파르를 뒷받침하는 악상으로 전개된다. 9개의 리듬 화음은 단음으로 연주하는 스타카토(staccato)를 특징으로 빠르고 일정하게 율동하는 음형으로 펼쳐진다.

작곡가는 때론 위엄 있는 관현악 협주의 틀을 벗어나 맥동하는 연주로 일관한다. 가장 강력한 주제음악의 표출이며 블랙 팬서의 원초적 공격성을 나타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영광과 위엄으로 무장한 소리 장식을 투영함으로써 와칸다 부족 국가의 권위를 과시한다. 또한 그는 그것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6개, 다른 곳에선 9개의 리듬만으로 독주 되기도 하고, 팡파르를 보강하기도 하는 식이다. 주인공 트찰라, 국가 와칸다, 초능력 영웅 블랙 팬서가 핵심적으로 서로 얽혀 있고, 상호불가분의 관계지만, 상황에 따라 셋 중 하나가 최전선에 나설 수 있음을 다채로운 연주방식으로 보여준다. 매우 독창적인 방식이다.

트찰라의 테마는 악보 전반에 걸쳐 두루 나타나지만, 와칸다 국의 선대 국왕 트차카가 오클랜드에 있는 그의 요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에 쓰인 지시 악곡 'Royal Talon Fighter'의 36초 즈음에 처음 등장한다. '와칸다'에서는 바바 말의 고조되는 영창과 동일성부를 반복하는 9개의 화음을 스타카토 주법의 금관악으로 명징하게 표출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Warrior Falls'에서 트찰라의 금관 팡파르는 트찰라를 연호하는 여성 합창단과 함께 축하조의 화려한 아프리칸 타악기 합주를 관통해 웅대하게 등장한다. 'Phambili'의 후반 1분 49초 즈음,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을 뚫고 웅비하는 메인 팡파르 테마는 그야말로 압권.

 


트찰라의 적수임에도 불구하고, 킬몽거의 테마는 가장 감성적인 테마다. 어두운 과거 역사가 형성한 고통스러운 내면이 그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Royal Talon Fighter'의 3분 12초 즈음에 처음 등장하는 이 주제는 6화음으로 증강하는 현악으로 나타나고, 킬몽거의 사악한 활동을 동반 예고한다. 고란손은 킬몽거 캐릭터의 고뇌에 찬 내면을 6화음의 주제로 표면화하는 한편, 더욱 공격적인 4화음의 악상으로 축소해 나타내기도 한다. 역동적인 장면에서 킬몽거의 캐릭터 성향을 보강하기 위해 반주하는 이 주제음악은 풀라 플루트를 위한 테마로 편곡되고, 때로 악보가 진행됨에 따라 멜로디가 없는 경우에도 특정 사운드가 킬몽거의 존재를 암시하듯 수반된다.

어떤 때는 힙합과 R&B에서 동시대의 전자음악적인 악상을 가져와 주제로 확장함으로써 캘리포니아 도시에서 기원한 킬몽거의 인물됨을 대변한다. 이는 그의 성격의 이분법적 양면성을 전하기 위함이다. 분명 성장기 그는 심히 고통스러운 대우를 받았고, 감성적인 현악이 그러한 그의 내면성을 대변하지만, 그 이면에서 그러한 주제를 변조해내는 방식으로 그의 분노와 좌절을 보여주는 방식임이 분명하다. 그는 또한 두 문화적 차이에서 고뇌하는 자아란 점도 주제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성격은 오클랜드의 비열한 거리에서의 삶에서 비롯됐지만, 그의 고향인 아프리카인으로서의 매력도 마찬가지로 강력하다.

R&B와 힙합의 측면에서 고란손이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캘리포니아 래퍼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와 협업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켄드릭 라마는 이 장르에서 자신의 엄청난 경험적 내공을 가져와 고란손의 스코어에 반영했다. 그 결과 영화 음악의 진정한 가치를 확대했다. 라마는 또한 투 체인즈(2 Chainz)와 위켄드(The Weeknd)를 비롯한 일련의 랩과 힙합 아티스트들과 콜라보해 영화 장면의 큐(cue)로 사용된 노래들을 썼으며, 다수의 원곡들과 특별히 선별된 노래들을 담은 사운드트랙 앨범을 담당했다. 종영인물자막(End Credits)을 선도한 'All Stars'는 일명 사운웨이브(Sounwave)로 유명한 힙합 음반 제작자 겸 작곡가 마크 앤서니 스피어스(Mark Anthony Spears), 영국 음반 프로듀서 겸 작곡가 알 슉스(Al 'Shux' Shuckburgh), 미국 싱어송라이터 SZA(Solana 'SZA' Rowe), 탑 독 엔터테인먼트 대표 앤서니 티피스(Anthony Tiffith)와 함께 라마가 작곡했으며 SZA가 협연했다.



영화는 'A King's Sunset'과 함께 종극을 고한다. 바바 말의 애절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영창으로 시작해, 해 질 녘 와칸다의 풍경을 아름다운 솔로 첼로를 위한 킬몽거의 테마로 반주한다. 감성적 울림을 자아내는 현을 주요 악기로 감동을 불러내는 교향곡 풍의 오케스트라가 실로 매혹적이다. 트찰라와 루피타 뇽오(Lupita Nyongo)의 나키아(Nakia)의 사랑의 불꽃을 섬세한 기타와 풍성한 스트링으로 표현한 'A New Day'의 낭만성. 목관악기와 마림바를 위한 트찰라 테마의 장난기 넘치는 변주 'Spaceship Bugatti', 트찰라 테마를 기막히게 렌더링한 오케스트라와 민속음악의 협연을 기반으로 화려하게 전개되는 종곡 'United Nations/End Titles'까지 종반부의 음악은 영화 전체를 압축해 극적인 감정의 최고조에 관객이 이르게 한다. 영적인 찬가, 부족의 춤을 반주하는 타악기 리듬, 9화음 오스티나토를 특징으로 한 트찰라 테마, 현악과 플루트의 감성적인 협주와 융기하는 합창이 감동적인 킬멍거의 테마가 최종적으로 결합해 거대한 메인 테마를 구성하는 것으로 장대한 스코어는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한다.

슈퍼 히어로의 세계에서 마블의 영화와 음악 경영진은 스코어의 품질과 다양성 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나머지 시리즈에서도 성공적인 모델을 공식화하고 있다. <앤트맨>(Ant-Man)의 크리스토프 벡(Christophe Beck)을 시작으로 마이클 자키노(Michael Giacchino)의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와 <스파이더맨: 홈커밍>(Spider-Man: Homecoming), 그리고 마크 마더즈보(Mark Mothersbaugh)의 <토르: 라그나로크>(Thor: Ragnarok)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범례를 따르고 있다. 공인된 수준 높은 영화음악가와 그들의 새로운 아이디어, 그리고 196-70년대 포크와 록부터 1980년대 일렉트로 신스 팝 등을 아우른 여러 대중음악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마블 시리즈 영화에 세대를 초월하는 감성 코드 접속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제 클래식이 된 팝의 명곡들을 영화에서 재생함으로 인해서 20세기 복고(Retro)의 감정을 환기하고 팝의 위대한 유산을 21세기에 다시금 소환하는 추세이다.

루드비히 고란손의 <블랙 팬서> 영화음악은 그러한 최근의 경향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적합하고, 기악 구성이 매혹적이며, 때론 흥미진진하고, 감성적으로 필요한 때와 부분을 알며, 주제음악을 지능적으로 구성해낼 줄 아는 재능의 소유자다. 현대 동시대의 대중적 감정과 고전음악의 예술성, 양단에 적정한 음악적 문화 코드 읽고 결합해낼 줄 아는 그의 독자적 식견은 결국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슈퍼 히어로 영화 최초 작품상 후보에 오른 <블랙 팬서>에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Best Original Score) 부문 오스카 트로피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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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 임진모 “시대를 보여주는 유행가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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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60주년 특별 기획 라디오 프로그램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는 임진모 진행으로2021년 1월 1일부터 12월31일까지 매일 한 곡씩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유행가를 소개했다. 총 365곡이다. 1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행가 하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짚는 의의를 넘어 시대와 세대의 벽을 허물고 원활한 교류를 자아내는 순환의 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와 동행한 많은 청취자들이 감사와 공감을 보냈다. 한국방송협회 주관 '작품상'과 '이달의 PD 상' 부문에서의 수상 소식 역시 임진모만의 다채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세대 간 접점을 형성한 결과일 것이다. 어느 쌀쌀한 2022년의 초입,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하게 발자국을 남긴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에 대한 감회를 나눴다.



지난 12월 31일,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가 365회의 대장정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진행하신 프로그램인 만큼 소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사실 1년 내내 하루에 한 곡씩 한다는 게 재밌겠다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더군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은 후련한 느낌도 들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뭐랄까, 시원섭섭하다고 할까요.

방송국 측에서 선생님을 진행자로 모신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더 매력적인 인물도 많겠지만, 아무래도 365곡이라는 범위가 굉장히 넓을 뿐더러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노래라는 상당히 광범위한 범주이기 때문에 제가 그나마 적합하겠다고 판단한 것 아닐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일이라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일까요?

평론가라는 타이틀이 주어진 저에게는 국내 음악사를 한번 정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정리와 관련한 제 롤 모델이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폭력의 시대』를 쓴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인데요, 어디를 가도 얘기하지만 대중음악의 덩치를 크게 통사, 작품(싱글과 앨범), 인물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를 통해 그 중 하나인 노래 즉 '작품'이 해결된 거죠. 이렇게 끝맺음하고 나니 부분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뿌듯함이 있습니다.

365곡의 선정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선정위원회를 만들어 볼까도 고려했어요. 하지만 담당자인 MBC라디오 하정민 PD는 진행자인 제 판단에 의한 선곡이 프로그램 제작에 가장 합리적일 거라는 의견을 표했습니다. 5분가량의 짧은 시간이니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죠. 어찌 보면 저의 시각과 해석을 존중해 준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PD께 감사드리고 싶은데요. 평면적인 원고를 입체적 라디오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자료를 다 찾아 곡 해설에 다큐적 역사성을 부여해줬습니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그와 먼저 방향과 관련해 큰 틀을 잡았습니다. 우선 '유행가'라는 프로그램의 타이틀에 집중했어요. 한때 유행가라는 개념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흔히 대중음악과 유사어로 사용되지만 명곡을 포함하는 대중음악이란 용어와 달리 유행가에는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노래가 꼭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예술적으로 미흡하더라도 특정한 시대 속에서 집단이나 대중과의 접점이 이뤄졌다면 유행가 아닐까요.

또 하나 롤링스톤, 빌보드와 같은 음악매체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음악과 관련된 리스트나 앙케트는 흔히 '100곡'틀에 갇히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365곡은 수적으로도 많지만 오랜, 고정된 틀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보통 어떤 조사이든 간에 평론가와 음악관계자가 주도하거나 참여하게 되면 대부분 예술적으로 뛰어난 명곡과 수작들이 뽑히곤 합니다. 이러한 명곡들 사이에는 '저주받은 걸작'이란 수식이 웅변하듯 대중의 호감을 창출하지 못한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는 가능한 한 그런 명곡보다도 대중들이 오랫동안 흥얼거리고 사랑을 보낸 곡, 바로 '리얼' 유행가들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예술성보다는 프로그램 타이틀인 '시대'성에 기준을 둔 셈이죠.

그럼에도 365곡은 양이 방대합니다.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전권을 가진 입장에서 부담이 없지는 않았죠. 그럼에도 모르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건방졌나요. (웃음) 365일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인 만큼 한 해를 기준으로 잡고 방영 날짜와 시점에 부합한 곡을 하나씩 찾아 나갔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고 각각 철에 맞는 노래가 있죠. 여름 시즌 환영 받는 쿨의 '해변의 여인'이나 걸그룹 f(x)의 'Hot summer' 그리고 가을철 하면 떠오르는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과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곤 간 사람'이 그렇습니다. 4.19 혁명, 두차례의 오일쇼크, 5.18 광주항쟁, IMF 같은 역사적 사건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겠죠.

아쉽게 빠진 곡이나 사정상 실리지 못한 곡도 많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모든 곡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방송국 관련 문제로 등장하지 못한 아티스트도 있고, 친일전력이 있는 음악가의 곡도 대부분 제외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1960년대까지 맹활약한 작사가 반야월과 톱 가수 남인수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지만 그들 작품이라고 다 빼면 시대적 유행가를 고르기가 정말 힘들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 곡들은 예외로 한 거죠. 그래서 종전 후 부산에서 서울로의 환도라는 시대적 배경을 담은 남인수의 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리스트에 들어갔죠. 방송사에서 금지했거나 사실상 방송을 제한한 빅뱅('거짓말'), 룰라('날개 잃은 천사'), 김건모('핑계', '잘못된 만남'), 휘성('안되나요')의 노래들은 유행가에서 빠졌습니다. 하지만 출판계약이 이뤄진 상태에서 책으로 풀어낼 때는 이들 노래를 살려내려고 합니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존재들이니까요.

자료 조사에 있어 힘드신 부분은 없었나요?

물론 지금 정보도 잘만 조합하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테지만, 해외에 비하면 많은 자료들이 유실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전설적인 옛날 뮤지션들이 상당수 돌아가셨어요. 따라서 지금은 기존 남아있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워낙 부족한 탓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음반에 제작 발표 연도만 표시가 되어있어도 어느 정도 시점이 정리가 되는데 그게 없거든요. 이전과 이후 자료나 가수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기억를 조합해 추정해야만 한다는 거죠.

여러 시간대를 번갈아 여행하다가도, 가끔은 옛 음악만 나오는 주간이 있었습니다. 방영 순서는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순서는 다양하게 하려 했지만, 일부러 비슷한 연대의 노래를 겹치게 배치한 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농 시대를 이야기할 때라던가, '전선야곡'과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같은 6.25 전쟁 관련 노래를 다룰 때가 그랬죠. 젊은 친구들에게 재미가 반감될지라도, 창사 특집이라는 명목 상 역사적인 측면도 강조했어요.

짧은 러닝타임이 지닌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에서의 5분은 생각보다 깁니다. 다만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의 경우, 곡에 대한 설명과 역사적 사료를 포함해 약간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노래가 나갈 시간이 적습니다. 대개 곡의 2절이 시작할 즈음 방송이 끝나곤 하죠. 예를 들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처럼 90년대 이후 발라드들은 기본적으로 5분이 넘습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청취자들 누구나 완곡을 듣고 싶어 하기에 지적을 많이 받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한 60대 여성은 저를 보더니 대뜸 “음악에 관계하시는 분이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잘라요?”라며 호통을 치더군요.



종합적인 수치와 밸런스를 통해 산출된 이 지표에서 우리는 단순한 개별 곡의 나열이 아닌 대중음악사에서의 중요도와 영향력을 일견 엿볼 수 있다. 조사 결과 365개의 곡 가운데 최다 선정된 가수는 조용필('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친구여', '여행을 떠나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Bounce')로 총 6곡이 선정되었다. 다음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Come back home', '하여가', '난 알아요')와 BTS('피땀눈물', '봄날', 'Dynamite'), 현인('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굳세어라 금순아')이 3곡으로 동률을 이뤘다.

최다 선정 작곡가의 타이틀은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많은 히트 유행가를 남긴 박춘석(11곡)이 차지했으며 그 뒤를 이은 작곡가는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까지 대표적 유행가를 독점적으로 써낸 박시춘이었다. 작사가의 경우 박시춘 시대부터 많은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쓴 레전드 유호(8곡)와 가사의 명인 반야월(7곡)의 이름이 차례로 등장했다. 무엇보다 아티스트, 작곡, 작사 세 가지 전 부문에 걸쳐 공히 상위권에 랭크된 인물은 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 신중현이었다.


최다 선정자로 조용필이 뽑혔습니다. 조용필이라는 존재를 대중음악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해방 이후의 최고가수죠. 범접할 수 없는 '가왕' 타이틀답게 대중에게 사랑받은 곡이 무척 많습니다. 사실상 안정애의 '대전 블루스'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도 조용필의 지분이 큰 곡입니다. 국내 앨범 예술의 확립은 조용필의 공헌이 큽니다. 과거에는 타이틀 이외의 곡은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가 수록된 1980년 <조용필 1집>은 수록곡 전곡이 히트하면서 대중이 앨범 단위의 가치를 의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구축했습니다. 

물론 조용필은 앨범뿐만이 아니라 단일 곡으로도 최강자였지요. '오빠부대'나 '가왕'이라는 수식은 이후가 아니라 그가 활동할 당시인 1980년대에 이미 완성된 단어인 거죠. 과거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에서 조용필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영구 결번 1번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솔직히 하다 보니 6곡도 부족했어요. 더 들어가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PD와 공유했으니까요.

또, 조용필 노래는 시기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던데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온 1975년부터 'Bounce'가 유행한 2013년까지 간격이 무려 38년입니다. 그동안 꾸준하게 히트곡을 창출한 것 자체가 독보적 펀치력 아닐까 싶어요. 심지어 'Bounce'는 가벼운 일렉트로니카, 'Hello'는 힙합을 접목했습니다.

작곡가에서 박춘석과 박시춘이, 그리고 작사가 중에서는 유호와 반야월이 선두에 있습니다. 독보적인 결과만큼이나 이들의 음악이 사랑받을 수 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해방 직후의 음악 시장은 강자가 싹쓸이하는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빼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적 소수가 모든 작업물을 독점하던 시기였죠. 그런 의미에서 박춘석과 박시춘, 그리고 유호와 반야월을 빼고는 과거 음악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금이랑 비교해 보면 현재는 굉장히 많은 가수가 활약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박춘석의 작법은 클래식의 영향 하에 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박재란의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를 들어보면 알 수 있듯, 대중의 감성을 선율로 완벽하게 표현한 작곡가죠. 박시춘은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감성적 멜로디가 특징입니다. '신라의 달밤', '낭랑 18세',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리스트에 수록되지 않은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등 유명한 곡을 많이 남겼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분야의 상위에 오른 음악가는 신중현입니다.

한국 록의 대부, 한국 대중음악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오랜 수식이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작곡과 작사는 물론, 가수로도(에드포 때의 곡 '빗속의 여인', 신중현과 더 멘 때의 '아름다운 강산', 엽전들 때의 '미인') 상위권에 존재하니 말이죠. 어떤 면에서 보면 대중음악의 기여도가 제일 높은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지요. 1970년대를 맞이해 포크 음악의 태동이 시작하면서 김민기, 이장희, 한대수와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대거 등장했는데요. 이때 전문적인 작사 작곡 집단에서 벗어나 스스로 곡을 만들어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물결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 바로 신중현입니다.

진행하면서 유독 인상 깊었던 곡이 있을까요?

녹음을 하던 도중 '아, 이게 유행가구나!'라는 깨달음을 내려준 곡이 바로 정난이의 '제7광구'입니다. 요즘 친구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과거 1973년과 1979년에 오일 쇼크가 터져 전 세계 경제가 얼어붙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안 나오는 상황이었기에 피해가 막심했죠. 그러던 어느 날 일본과 협조를 맺고 제7광구에서 석유 시추를 하게 되면서 국가적으로 산유국이 될 수도 있다는 부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이를 담은 노래가 바로 '제7광구'입니다. 유행가란 단순히 유명한 것을 넘어 '시대성'과 관련한다는 선정 기준을 제공해준 곡입니다.

시대성의 예시를 또 하나 들자면 코미디언 서영춘이 불러 전국적인 유행을 가져온 '서울 구경(시골영감 기차놀이)'이라는 번안곡이 있습니다. 오늘날 랩의 효시로 언급되는 곡이기도 하죠.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 차표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라는 가사에는 해학이 담겨있지만, 한국이 급격한 공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생긴 충돌을 다루는 곡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새로운 문화에 대한 두려움이 표현된 거죠. 



선정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만화 주제가가 수록되기도 했어요.

실제로 유행가에는 세대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지코의 '아무노래'가 SNS 시대를 빛낸 빅 히트송임에도 어르신들은 잘 모르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런 경우도 유행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KBS에서 방영한 <날아라 슈퍼보드>의 OST인 김수철의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노래입니다. 산울림의 '산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죠. 특히 '산 할아버지'는 가사가 정말 이쁜 곡이죠. 당시 산울림이 아이들을 위한 대중음악이 없는 게 안타까워 동요앨범을 세 장 연속으로 내는데요. 3형제 중 둘째 김창훈이 쓴 곡입니다. 최근에는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가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죠.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곡은 세대 간의 교두보 역할보다는 오히려 분리의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음악의 주인은 'Young Generation'이지요. 1950년대의 남인수, 고복수, 황금심이 활약하던 시절 기록을 보면 수요층이 전부 20대들이었어요. 1980년대에는 조용필과 전영록 같은 가수가 틴 마켓을 만들어내고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 김승진 박해성 안혜지 이지연과 같은 '틴에이저 가수 집단'이 부상하면서 10대가 위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20대를 중심으로 각각 나이가 많은 어른과 적은 아이로 퍼져나갔다면 지금의 유행가는 세대 간 확대로 이뤄지기는 어려운 시점입니다. 음악 자체가 확장성보다는 특정 세대나 더 정확을 기하자면 팬덤을 겨냥해 만들어지는 추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무엇보다 대중가요도 역사가 오래되면서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들을 음악이 정말 많아졌어요. 옛날에는 민요밖에 없었죠.

그러고 보니 리스트 가운데 번안곡도 굉장히 많습니다.

'산 할아버지'와 '사랑을 했다'가 어린 친구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아무래도 멜로디가 쉽고 개사에 용이하다는 점이죠.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일명 '노가바'는 옛날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입니다.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팝송을 우리말로 바꿔 소화하려는 의도가 컸어요. 보니 엠의 'Rivers of Babylon'이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Physical' 같은 곡들이 그렇습니다. 사실 365개의 곡 중 외국 원곡이 10곡이나 됩니다. 캔의 '내 생에 봄날은…'과 박효신의 '눈의 꽃'은 일본 곡이 원곡이고,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오리지널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입니다.

물론 번안곡과 관련해 1970년대 초반 건전가요 노래 붐을 일으킨 전석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치 밀러(Mitch Miller)를 모델 삼아 합창의 개념을 가져와 전 국민이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번안해 보급하며 '싱어롱(Sing-along)' 즉 '다 함께 노래 부르기' 문화를 전파한 인물이죠. 당시 군사독재 시대에 짓눌려 있는 분위기 속 활기를 불어넣으며 포크 운동으로 연결시키는 데도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전석환이 번안한 유명한 노래가 바로 교실에서 부른 '그리운 고향'이죠. 비치 보이스가 끄집어내 세계적으로 알린 'Sloop John B'를 번안한 곡입니다. 서수남, 하청일의 '동물농장'도 해리 벨라폰테의 'I do adore her'를 번안한 곡인데 냉정하게 비교해 보면 사실상 반은 창작곡이라 할 정도로 서수남의 아이디어가 빛나지요. 그리고 리스트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번안 곡 중 오정선의 '마음'은 참으로 창의적인데요. 한번 들어 보기를 바랍니다.

번안 곡에 대해 우호적 시선이신데요.

저는 번안 작업을 통해 현재 K팝이 세계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내공을 쌓았다고 규정합니다. 약소국 시절부터 영미 팝과 이탈리아의 칸초네와 프랑스의 샹송 등, 전 세계 각국의 민요와 문화를 흡수하고 받아들인 것이 지금 글로벌 성공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시기적인 배분에 있어서도 신경을 쓰셨나요?

하정민 PD와 합의를 본 부분이 통상적인 앙케트를 보면 옛 음악에 비해 요즘 음악이 홀대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대별 비율을 신경 써서 해방 이후 음악부터 오늘날 사랑받는 음악까지 골고루 다루고자 했죠. 40-50년대 곡이 33곡, 60년대 곡이 42곡, 70년대 60곡, 80년대 96곡, 90년대 72곡, 2000년대 43곡, 2010년대 19곡의 분포였습니다. 70년의 세월을 관통한 겁니다. 마치 한 사람의 일생과도 같은 세월 동안 우리 대중음악이 이렇게 길게 호흡해왔구나 싶습니다.

최근 음악을 다룬 이유는 세대 접점의 측면에서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리스트를 보면 1980~1990년대 곡이 제일 많은데, 이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엄청난 장르가 쏟아져 나오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음악 산업의 규모가 커진 것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황금기인 거죠. 그때는 국민 모두가 라디오로 음악을 듣고, 레코드점으로 가서 음반을 구입하던 시기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국내 대중음악에 대한 소견이 궁금합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얘기하겠지만 지금의 글로벌 시장에서 K팝이 날갯짓할 수 있던 것은 어떤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 8군 시절부터 등장한 모든 음악이 혼합과 겨루기를 거쳐 이어진 것이 지금의 세계적인 K팝입니다. 한국의 음악적 자산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같이 이제 아이돌만이 아닌 다른 한국적인 음악들도 소개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 거죠. 또한 빛과 소금, 김현철의 음악이 시티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소환되어 젊은이들에게 낡은 음악으로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그 당시에도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던 실험의 흐름이 명백히 있었다는 증거겠죠.



흥미롭게도 첫 곡이 BTS의 'Dynamite'고, 마지막은 브레이브걸스의 '롤린 (Rollin')'이 장식했습니다. 이 두 곡을 양 끝으로 선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각각 시작과 끝의 의미를 상징합니다.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의 시작은 어느 누구보다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BTS의 첫 빌보드 넘버원 송인 'Dynamite'를 골랐고 마지막은 역주행의 신화를 기록한 '롤린 (Rollin')'을 골라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어렵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 늘 강조하죠.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이라고요.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이 프로그램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염두에 둔 주제가 바로 세대와의 화합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현인과 박재란의 음악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어른들은 요즘 애들의 음악은 어렵다고 하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이런 음악이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기뻤던 건 청취자들이 보내준 반응이었어요. 어르신들에게 '요즘 노래를 자꾸 들어보니 좋다'고, 그리고 젊은 친구들로부터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이렇게 역사가 깊은 줄 몰랐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음악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함께 공감할 수는 있다. 결국 세대 화합의 가장 훌륭한 재료가 음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만약 먼 훗날 후세가 또 한 번 유행가를 선정한다면 지금의 리스트 또한 많이 달라질까요?

그럼요. 시대는 흐르면서 반드시 일을 저지릅니다. (웃음)


약 한 시간 반가량의 치열한 인터뷰 끝에도 열정적인 대답을 거듭한 임진모의 입가에서는 행복의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음악평론가의 길을 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순수한 초심을 유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들 역시 피곤함을 잊은 채 어느덧 그의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생생한 설명을 경청하고 몰입해 있었다. 그는 마치 음악이라는 불변의 매개체를 통해 다른 세대와 온도를 공유하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는 듯 보였다.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로 큰 일을 끝낸 직후지만 그의 손은 좀체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본문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듯 국내 대중음악에서 '노래'의 결을 매끄럽게 정리한 그는 '통사'와 '인물'에도 도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어쩌면 그가 나이에 개의치 않고 음악평론가의 직함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던 것은 실력뿐만이 아닌 이러한 아가페적 열정에 기인하는 것 아닐까. 임진모에게 필요한 것이 음악이라 하지만, 음악 역시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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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쿨러 “일상의 작은 희망을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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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를 죽여줘'. 2018년 '죽여줘'란 싱글로 화려하게 데뷔한 밴드 보수동쿨러. 이들은 늘 맑고 밝은 것보단 조금은 탁한 감정의 불순물을 노래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종일 담배만 물고 있던 날들, 삶이 그 자체로 내게 시험과 실험을 던지는 것만 같은 순간을 낚아채 잔잔하고 무뚝뚝하게 확대, 위로를 건넸다. 새어 나오는 시린 마음과 차갑기만 한 공기 사이 그저 따뜻한 온기를 툭, 툭. 인생의 시큼함을 조금이라도 앓아봤다면 보수동쿨러 곁에 비친 자신을 찾는 게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작년 11월 말 그런 이들의 첫 번째 정규 음반 <모래>가 발매됐다. 그룹은 입을 모아 '변화'를 말한다. "EP까지는 좀 더 세련되고, 힙한 것에 신경 썼다면 이번엔 최대한 자연스러움에 초점 맞췄다"는 한 멤버의 답변처럼 과연 음반은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를 풍긴다. 조금 더 가까이서 감정을 표현하고 일상을 바라봤다고나 할까? 보컬 탈퇴란 큰 위기 이후 새 멤버 김민지를 영입해 완벽한 정비를 마친 밴드를 12월 중순 이즘 사무실에서 만났다. 굵은 내진을 이겨낸 이들에게서 성장과 성숙의 아우라가 선명하게 뻗어 나왔다.


좌측부터 이상원(베이스), 김민지(보컬), 구슬한(기타), 최운규(드럼)

드디어 정규 1집 <모래>가 발매됐다. 소감을 듣고 싶다.

운규 : EP <Yeah, I Don't Want It>이 무작정 부딪히며 만든 느낌이었다면 <모래>는 기획 단계부터 생각한 대로 작업이 이뤄졌다. 전작도 좋았지만 이번 앨범은 과정과 결과 모두 다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굉장히 뿌듯하고 특히 뜻깊다.  

앨범명이 '모래'인 이유가 궁금하다.

슬한 :일상에서 겪는 우울감이나 자조적인 마음속에서 보이는 작은 희망, 행복 등에 집중했다. 모래사장은 넓고 큰 데 이에 비해 모래는 작다. 작은 일상들이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 사이 알맹이들에 조그마한 행복이 묻어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달까.

실제로 만난 밴드는 밝고 에너지 넘친다. 반면 밴드 그룹의 음악에는 늘 어떤 서늘함, 멜랑꼴리함이 서려 있는데.

슬한 : 밴드의 방향을 전과 다르게 가져가려 했다. EP까지는 좀 더 세련된 것에 주목했다면 이번엔 최대한 자연스러움에 초점 맞췄다. 네 명이 뭉쳐지며 만드는 에너지에 중점을 두고 의상이나 편곡 같은 것들도 소위 말하는 힙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약간 거친 면이 드러날지언정 다듬지 않은 사운드와 감정을 표현했다. 우리끼리 둘러앉아 곡을 듣고 느낀 점을 취합해서 다 같이 노래의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말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멜랑꼴리함이 형성됐을 수도 있겠다.

언급한 밴드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곡이 있다면?

상원 :타이틀곡 '모래'가 우리의 변화를 잘 담고 있다. 과거와 다른 자세로 만든 음반에 '모래'를 타이틀로 한 이유도 모든 수록곡 사이에서 중심이 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곡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연결성이 있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구슬한(기타)

'모래'의 '우울에 얼어붙은 새벽의 모래를 밟아 / 쉽게 부스러지는 / 멀어져가는 새들과 / 흩어져 날아가는 말들'이라는 가사가 참 인상적이었다.

슬한 : 2020년 핵심 멤버이자 보컬이었던 주리의 탈퇴를 겪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밴드에서 보컬이 나간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변화이지 않나. 그래서 원래는 그룹 해체를 결정했었다. 당시 마음이 답답해 새벽 산책을 자주 했다. 부산도 추울 때 바다와 모래가 얼어붙는다. 얼어 있는 모래 위를 걸을 때마다 모래가 바스라졌다. 그게 마치 우리 같았다.

해체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은 계기가 있었나?

운규 : 일단 하고 싶은 얘기와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남아 있었다. 주리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던 건 사실이지만 슬한이 많은 곡을 썼다. 빈자리를 충분히 채울 수 있다고 봤다. 처음에 다 같이 해체하는 게 맞다고 결정했지만 내가 먼저 '다시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다들 비슷한 시기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정규 1집이 정말 밴드의 첫 시작일 수도 있겠다.

슬한 : 멤버 교체란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하려 했다. 물론 대중이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겨우 EP 한 장 발매했을 뿐이니 굳이 걱정하지 말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밴드 포지션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다. 예전에는 보컬이 맨 앞에 섰다. 지금은 네 명이 비슷한 라인에서 반원 형태로 선다. 시각적으로 서로가 더 잘 보인다. 밴드 아이덴티티가 바뀌고 하고 싶은 것을 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 주셔서 감개무량하다. (웃음)


김민지(보컬)

새로운 얼굴 민지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다. 보컬을 지원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민지 : 보수동쿨러 팬이라 SNS를 팔로우하고 있었다. 주리의 탈퇴 소식도 보았고 새 보컬 모집 글도 확인했지만 지원하지는 않았다. 쟁쟁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부산에 살고있는 사람을 뽑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러던 중 예전에 올린 커버 영상을 보고 먼저 연락이 왔다. 큰 기대 없이 합주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오디션에 왔었다. 지금은 연고가 전혀 없지만 밴드를 하려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떤 노래의 커버였나? 

민지 :'죽여줘'였다. 예전에 보수동쿨러 곡뿐만 아니라 취미로 기타 연습도 할 겸 영상을 몇 개 올렸었다. 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만... 그 영상을 보면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내가 그날 어떤 기분으로, 어떤 상태에서 영상을 찍었는지 보일 정도랄까? 그래서 스스로는 되게 부끄럽다. (웃음)

보컬이 된다는 게 쉬운 결정이진 않았을 것 같다.

민지 : 부산에 내려가기 전까지 근 3주 동안 정말 심장이 요동쳤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할 정도로! (웃음) 짐까지 싸서 오니까 멤버들도 나도 서로 진지하게 지금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보컬적인 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주리의 팬이었던 사람으로서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고. 완전히 그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지만 각자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을 좋게 봐주셨으면 한다.

수많은 지원자 중 민지를 헤드헌팅한 이유가 있을까?

슬한 : 커버 영상에서 민지가 기타 치며 노래하는데 '이 사람이 우리 보컬이다'라고 운명처럼 느꼈다. 무엇보다 밴드와 감각이 비슷하다는 인상이 있었고. 민지가 최종 합류하기로 했을 때 그래서 더 내 판단에 대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민지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까지 왔으니 내색은 안 했지만 어떤 부담과 긴장이 쌓인 거다. 한참을 서로 '~씨'라 부르며 존칭을 쓸 정도로. 그 시간을 거쳐 더 각별해졌다. 재밌게 밴드를 하고 있다. 


한 장의 EP를 거쳐 이제 첫 풀 렝스를 발매했지만 보수동쿨러는 부산을 대표하는 밴드로 우뚝 섰다. 그룹 결성 초창기부터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받은 걸 체감했느냐 물으니 상원이 짐짓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뒤이어 슬한이 말을 덧붙인다. "부산에서 활동할 때는 사실 잘 몰랐다. 싱글 '목화'를 낼 때쯤 진짜 인디 밴드만 공연하는 제비다방 등지에서 불러주니까... 그때 실감이 났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들이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진짜 좋은 음악은 여전히 입소문만으로도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당도한다.


최운규(드럼)

부산에 위치한 라이브 펍 오방가르드에서 종종 공연하는 것 같다. 작년 3월 민지가 게릴라 공연으로 처음 데뷔한 곳이기도 하고.

운규 : 공연의 음향이 어떻게 송출되는지까지 전부 뮤지션의 책임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실제 음향이 매우 뛰어나고 사장님들이 우리 입장에서 반영을 잘해주신다. 음향 장비도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최근에는 부산 인디신의 모든 공연이 오방가르드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에서도 홍대 인근 클럽처럼 오픈 마이크 제도들을 통해 무대에 설 수 있는지 궁금하다.

슬한 : 일단 바이널언더그라운드, OL' 55, HQ, 그리고 베이스먼트 등의 공연장이 있다. 이중 바이널언더그라운드, HQ에서 매주 오픈 마이크를 진행한다. (특히 지역 공연장의 공연 정보가 적다고 말하니) 우리도 밴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막막했다. 어떤 무대에서 서고 어느 공연장에서 우리를 불러줄지 모르니까. 그래서 공연할 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면 모여서 머리 맞대고 유튜브 영상을 찍곤 했다. (웃음)

유명 관광지인 보수동(책방골목)을 이름에 달고 있고, 심지어 '오랑대'라는 부산 명소를 곡으로 썼지만 뮤직비디오와 음반 커버는 제주도에서 찍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운규 : 큰 의미는 없다. 그전에는 부산에서 자체적으로 뮤직비디오와 커버 사진 등을 찍었다. 이번 음반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 했기에 이를 잘 담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부산, 울산, 제주도를 물망에 올렸다. 답사도 다 다녔다. 제주도가 음반의 이미지와 가장 부합하더라. 그래서 제주도가 촬영지가 됐다.

앨범의 마무리를 장식한 '오랑대'에는 처음으로 멤버 전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슬한 : 오랑대에 친구들과 캠핑을 갔었다. 그때 참 행복했다. 이 곡은 무조건 행복한 가사를 쓰겠다고 아껴놨다. 멤버들끼리 모여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을 가사로 옮겨 쓴 게 '오랑대'다. 그래서 꼭 다 같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상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들을 마주해도, 그래도 끝 곡 '오랑대'처럼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의미에서 앨범의 끝에 배치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곡이다.


이상원(베이스)

'오랑대'의 명가사 '흘러 들어오는 느린 날에 / 불안함은 저 멀리 떠나가네'란 글은 누구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인가.

상원 : (느릿하게 손을 들며) 내가 쓴 부분이다. 나는 보통 항상 매 순간 불안함을 느낀다. 개인적인 부분이나 여러 가지를 돌아봐도 안정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늘 그런 상황과 감정 속에 놓여있었다.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젠지 그려보니 휴일에 영화를 보며 조용히 술 한 잔 할 때가 떠올랐다. 보통 집에서 혼술을 자주 한다. 굉장히 조용하고 느긋한... 편안한 순간을 담은 가사로 읽어달라. 

밴드에게 <모래>란 어떤 의미일까.

상원 : 발매 일인 11월 30일 정오에 지하철에 있었다. 학원에 일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앨범이) 풀렸다는 걸 듣는 순간 이유 없이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나 지하철 한쪽 구석에 가서 울었다. <모래>에 특히 소중한 게 많이 들어있다. 앞으로는 힘든 우여곡절 없이 승승장구하고 멋진 미래를 만들어가고 싶다. 그런 기점이 되는 작품이길 바란다.

운규 : 먼저 음악관이 바뀌었다. EP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조건 멋있어야 한다며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반면 1집은 곡 콘셉트와 음악 방향성 등 밴드의 본질에 집중했다. 결국 오랫동안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게 훨씬 더 건강하게 그룹을 지속할 수 있을 거다. 

두 번째는 드러밍에 대한 자신감. 내 드러밍에 확신이 없었는데 스승님이 테크닉적인 부분만 실력이 아니라 고집부리지 않고 밴드에 녹아드는 사회성도 실력에 포함된다고 하시더라. 그런 측면에서 내가 가진 장점이 팀에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모래>를 발매하는 모든 과정이 우리의 자양분이 됐다. 의견 충돌로 시행착오를 겪고 감정이 상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 나아갈 미래의 거름이라고 본다. 멤버들의 성향도 잘 파악하고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의미가 크다. 

마지막으로 1년 뒤의 보수동쿨러를 그려본다면.

운규 : 현재는 세이수미 연습실에서 대여료를 지불하고 얹혀살고 있다. 지금도 편안하게 작업하고 있지만 1년 뒤에는 우리만의 합주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하하.

민지 : 약간의 도움은 있었지만 실제로 에이전시 없이 순전히 멤버들의 노력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원래 주변에 연락을 잘 안 하는데 들어보라고 연락할 정도로 음반에 마치 자식 같은 애착이 있다. 가능하다면 얼른 록 페스티벌에서 우리 노래를 부르고 싶다.

상원, 슬한 : 늘 그랬듯 곡을 쓰고 새 앨범을 준비하지 않을까?


인터뷰가 있던 주말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의 음반 발매 공연을 끝으로 밴드는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금세 매진됐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사진 너머 이들의 얼굴엔 그만큼 상기된 흥분이 가득했다. 보수동쿨러, 보수동쿨러. 이들이 밟고 선 진짜 스타트라인에 이제 막 선명한 4개의 발자국이 찍혔다. 우여곡절 많던 시기를 지나 새롭게 펼쳐질 밴드의 앞날을 응원한다.



보수동쿨러 1집 - 모래
보수동쿨러 1집 - 모래
보수동쿨러
비스킷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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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한 때의 슈퍼스타였던, 우상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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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좋아했다. '안티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외치며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던 하얀 분장의 프론트맨이 세상이 싫었던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보고 나서는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록스타의 환상까지 더해졌다. <Antichrist Superstar>, <Mechanical Animals>, 1997년 MTV 어워드에서의 'The beautiful people' 라이브, 베스트 앨범 <Lest We Forget> 등등. 많이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젠 어디서도 마릴린 맨슨을 좋아했노라 이야기할 수 없다. 현재 그는 추악한 성폭행 범죄 의혹을 받고 있다. 2007년 당시 19세 나이로 맨슨과 교제하던 배우 에반 레이첼 우드가 지난해부터 맨슨의 그루밍과 학대,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Heart shaped-glasses'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 성폭행을 가했고, 하루 152번 이상 전화를 걸었다는 등 집착이 심했다는 주장이다.

일방적인 내용도 아니다. <왕좌의 게임>에 출연한 배우 에스미 비앙코 역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마릴린 맨슨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맨슨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만 15명이다. 맨슨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레이블에서 쫓겨났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맨슨은 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대중 앞에 섰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카니예 웨스트였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다 '생일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래퍼, 악명 높은 강간범 빌 코스비의 무죄를 외치며 관심을 끌고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며 망언을 내뱉다 아내 킴 카다시안에게 버림받은 래퍼, 카니예 웨스트였다.

카니예 웨스트는 소문만 무성하던 앨범 <Donda>의 2차 리스닝 파티에 마릴린 맨슨을 초대했다. 시카고 솔져 필드 한가운데 지어진 저택 세트장에서 난간에 기댄 채로 모습을 드러낸 맨슨은 수록곡 'Jail pt.2'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맨슨의 옆에는 래퍼 다베이비가 있었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메가 히트 싱글 'Rockstar'와 두아 리파와의 콜라보레이션 'Levitating'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티스트였던 그는 7월 마이애미의 힙합 페스티벌 공연 도중 "에이즈, 성병에 걸려 2~3주 안에 죽을 일 없는 사람들, 게이, 문란한 여자들 제외하고 핸드폰을 높이 들어"라 발언하며 장내를 침묵에 빠트렸다.


 

논란이 된 후에도 다베이비는 소셜 미디어에 실언을 늘어놓고 조롱 격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고 엘튼 존, 마돈나, 릴 나스 엑스 등 아티스트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도 'Jail Pt.2'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릴린 맨슨과 다베이비가 참여한 <Donda>는 '인디펜던트'지에게 0점을 받았다. 불공정하다고? '인디펜던트' 지를 제외하고도 카니예 웨스트의 작품에는 문제가 많았다. 2020년부터 작업을 알렸던 앨범은 수차례 발매 연기된 끝에 8월 29일 기습 공개됐고, 그마저도 미완성본이라 두 번의 추후 수정을 거쳐야 했다.

실망이 컸음에도 나는 <Donda>를 동정했다. <Jesus Is King>부터 의아한 행보만 보여준 칸예지만, 호불호를 떠나 지난 20년을 지배한 시대의 아이콘이 정신을 차리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지난 1월 13일 사인을 요청한 남성 팬을 때려눕혀 LA 경찰에게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탕한 록스타들과 갱스터 래퍼들의 음악이 친숙했던 나는 예술가들의 경거망동에 관대한 편이었다. '예술과 인성은 별개'라 믿기도 했고, 대놓고 자랑할 순 없어도 일종의 길티 플레저처럼 아쉬움을 곱씹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인내심이 낮아진 것일까?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물들어버렸나? 아니다. 이것은 배신감이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가수의 노래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이 사실은 추악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는 당혹감과 분노다. 마릴린 맨슨, 카니예 웨스트, 다베이비의 음악을 좋아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된 허탈함이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논란 없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예술가들이 있다. 우상은 그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다른 우상이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The Nearer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를 발표한 블러, 고릴라즈의 데이먼 알반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스로 곡을 쓰지 않는다"며 논란을 자초했다. 평가 절하, 여성 간의 비교, 어이없는 변명까지 현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삼대 금기를 충족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기타 히어로에서 백신 반대 운동 투사로 직업을 변경한 에릭 클랩튼은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제약회사들에게 속아 백신을 접종”했노라며 접종자들은 '집단 최면 형성' 이론의 희생자들이라 열변을 토했다. 과거의 유산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는 애써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의 권위는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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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당신을 위한 퓨전 재즈 입문곡 1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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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재즈는 어려워요"음악 좋아하는 친구들도 혀를 내두르곤 한다. 3~4분 내외의 규격화된 팝송에 익숙한 이들에게 작곡과 연주가 즉흥적인 이 장르가 당혹스럽다. 하지만 재즈만큼 해방감을 주는 음악이 있을까? 무궁무진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담쟁이덩굴처럼 뻗어 나간다. 재즈의 다른 이름은 자유다.

퓨전 재즈는 1960년대 말 재즈가 소울과 펑크(Funk), 록과 손잡아 탄생한 음악 장르다. 1980년대에 들어 점점 정통 재즈와 거리가 먼 아리송한 음악이 되어 순혈주의자들의 지탄을 받았으나 대중 친화성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순기능도 수행했다.

초기 스타일부터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갈래를 펼치는 등 재즈 입문의 경로는 다양하지만 처음부터 난해한 비밥이나 프리재즈를 들으면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 재즈의 향취를 드리우면서도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오는 퓨전 재즈가 있다. 당신을 위해 엄선한 퓨전 재즈 열 곡을 들으며 재즈의 대양에 발을 담가 보는 건 어떨까?


제프 벡(Jeff Beck) 'You know what I mean' (1975)

퓨전 재즈 입문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동네 백화점 꼭대기 층에서 구매했던 제프 벡의 1975년 작 <Blow By Blow> 시작이 아닐까 싶다.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함께 그를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에 올려놓았고 세 명의 기타 영웅 중에서도 벡의 경력은 특히 변화무쌍하다. 블루스 록과 퓨전 재즈를 거쳐서 테크노까지 시도하는 다변적 음악색의 정점에 <Blow By Blow>가 있다. 스티비 원더가 벡에게 주려고 했던 'Superstition'을 불가피하게 먼저 발표해 그 부채감으로 선물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는 신성함을 품고, 초절정 기교가 빛나는 'Scatterbrain'는 면도날 연주를 들려준다.

앨범의 문을 여는 'You know what I mean'은 제프 벡 펑키(Funky) 기타의 진수를 보여준다. 두 대의 기타가 각각 선율과 리듬을 연주하며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그 밑을 맥스 미들턴의 간결한 건반 연주가 받쳐 주었다. 놀랍도록 정교한 프로덕션은 비틀스의 영광을 공유했던 조지 마틴의 솜씨. 국내에서는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의 오프닝 BGM으로 사용된 바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Black satin' (1972)

재즈의 개척자 마일즈 데이비스는 <Birth Of The Cool>로 쿨재즈의 시작을 알렸고 <Kind Of Blue>로 모달 재즈의 이정표를 세웠다. 누구보다도 시대에 민감하게 감응했던 그는 1960년대 말부터 퓨전 재즈를 시도했고 <Bitches Brew>란 금자탑으로 넘보기 힘든 아성을 구축했다.

어느 장르가 그렇듯 퓨전 재즈도 아티스트별로 색채가 다르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들은 특히 전위성이 강해서 포플레이류의 편안한 음악을 예상한 이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다만 마일즈도 마커스 밀러와 손을 잡은 1980년대부터 힘을 뺀 대중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펑크(Funk)와 아방가르드를 섞은 1972년 작 <On The Corner>의 수록곡 'Black satin'은 마일즈의 고유색을 칠하되 상대적으로 곡 길이가 짧고 멜로디가 명확해 잊지 못할 잔상을 남겼다.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Sorceress' (1976)

2021년 2월 세상을 떠난 칙 코리아는 방대한 경력으로 현대 재즈를 대표하던 피아니스트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72년 '영원으로의 회귀'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밴드를 조직해 총 8장의 정규 앨범을 남겼다. 그 기간 정통 재즈 스타일의 앨범들도 발표했으나 리턴 투 포에버의 인상이 강렬했던지 퓨전 재즈를 대표하는 건반 연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후에 스티비 원더와 알 재로가 커버한 인스트루멘탈 명곡 'Spain'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리턴 투 포에버의 경력 중후반기에 발표된 1976년 작 <Romantic Warrior>는 갑옷 기사의 앨범 커버와 수록곡 'Medieval overture'처럼 중세의 숨결을 담고 있다. '여자 마법사'라는 뜻의 'Sorceress'는 기승전결의 전형적 구조를 탈피한 채 하나의 테마에 조금씩 변주를 주며 긴장감을 쌓아가고 이러한 곡 구성은 칙 코리아(키보드)-알 디 메올라(기타)-스탠리 클락(베이스)-레니 화이트(드럼)로 이뤄진 황금 라인업의 연주력으로 가능했다.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 'Birdland' (1977)

193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조 자비눌은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미국에 당도한다. 알토 색소폰 연주자 캐논볼 애덜리의 음반에 참여하며 1960년대를 보낸 그에게 전기를 마련해준 건 마일즈 데이비스의 걸작 <In A Silent Way>와 <Bitches Brew>. 퓨전 재즈의 청사진을 제시한 두 장의 앨범에서 칙 코리아와 함께 건반 연주를 맡은 자비눌은 추진력을 얻어 1970년 불세출의 퓨전 재즈 밴드 웨더 리포트를 조직하게 된다.

체코 출신 베이시스트 미로슬라브 비투오스가 떠난 이후로 웨더 리포트의 음악은 더욱 펑키(Funky)해지고 대중적으로 변모했다.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과를 기록한 1977년 작 <Heavy Weather>는 그 두 가지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던 퓨전 재즈 장르를 되살렸다. 동명의 뉴욕 재즈 클럽에 헌사를 바치는 'Birdland'는 웨인 쇼터의 상쾌한 테너 색소폰과 일렉트릭 베이스의 혁명아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프렛리스 베이스 사운드가 빛난다. 후에 보컬 그룹 맨하탄 트랜스퍼와 거장 퀸시 존스가 색다른 커버 버전을 들려주기도 했다.


허비 행콕(Herbie Hancock) 'Chameleon' (1973)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의 음악 여정은 저 위대한 마일즈 데이비스만큼이나 복잡하고 장대하다. 연미복을 빼입고 모달재즈를 연주하던 청년은 약 20여 년 후 브레이크 댄서들과 좌우로 몸을 흔드는 'Rockit' 의 퍼포먼스로 마이클 잭슨의 박수갈채를 끌어냈다. 정(靜)에서 동(動)으로, 그의 음악은 늘 꿈틀댔다. 1970년대를 오롯이 퓨전 재즈에 바친 행콕이 1973년에 발표한 <Head Hunters>는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를 기록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인정 받았다.

15분에 달하는 오프닝 트랙 'Chameleon'에서 행콕은 펜더 로즈, 클라비넷, 등 다양한 건반 악기를 활용하여 펑키(Funky) 사운드의 극대치를 기록한다. 베니 모핀의 테너 색소폰 솔로는 행콕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현란한 선율을 보좌하는 폴 잭슨과 하비 메이슨의 리듬 섹션도 탄탄하다. 근래의 많은 하우스 디제이들이 이 곡의 감각적인 소리샘을 추출해 퍼포먼스에 활용하고 있다.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Morning dance' (1979)

대중음악사에 한 줄이라도 언급될만한 위의 팀들에 비해 스파이로 자이라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하나 '깊이가 덜한 음악'이란 마니아들의 평가를 감내한 이들은 1974년 조직된 이래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활동하며 퓨전 재즈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 중심엔 밴드의 창립자이자 건반 주자인 제이 베켄스타인이 있고 '녹조류의 일종'인 Spirogyra에서 따온 독특한 밴드명도 그의 작품이다.

싱그러운 마림바 연주와 베켄스타인의 아늑한 알토 색소폰 등 각 악기의 매력을 충실히 뽐내는 'Morning dance'는 빌보더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1위, 싱글 차트 24위에 오른 밴드의 명실상부 최고 히트곡. 남아메리카 국가 트리니다드토바고가 고안한 타악기 스틸팬이 이국적 향취를 드러내기도 한다. 왠지 미용실 그림처럼 키치적인 느낌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편하게 다가오는 퓨전 재즈 곡이다. 이목을 끄는 도입부 덕에 국내의 다양한 광고가 이 곡을 지목했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애청되고 있다.


리 릿나워(Lee Ritenour) 'Rio funk' (1979)

1980년대를 대표하는 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는 귀공자같이 곱상한 외모와 그에 상응하는 뛰어난 연주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솔로 활동 이외에도 퓨전 재즈의 올스타 밴드 포플레이의 초대 기타리스트로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조지 벤슨의 명곡 'Give me the night'와 패티 오스틴의 'Through the test of the time'에서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그가 1979년에 발표한 7번째 정규 앨범 <Rio>는 막강한 지원사격을 자랑한다. 퓨전 재즈 전문 레이블 GRP를 대표하는 데이브, 돈 그루신 형제가 건반 선율을 제공했고 <Heavy Weather>의 드러머 알렉스 아쿠나가 6, 7번 트랙에서 드럼 스틱을 쥐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이름은 마커스 밀러. 오프닝 트랙 'Rio funk'에서 훗날 퓨전 재즈의 대표 베이시스트가 되는 밀러와 릿나워가 합을 주고받으며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MBC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일요일 코너 <Sunday Special>의 시그널이기도 하다.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 'Give it all you got' (1979)

트럼펫 사촌 동생 격인 금관악기 플루겔호른. 이름도 어려운 이 금관악기를 대중에게 알린 공은 이탈리아계 미국 음악가 척 맨지오니에게 있다. 1960년대부터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와 더 내셔널 갤러리 같은 밴드에서 활약했지만, 전성기는 명실상부 1970년대 후반. 국내 라디오 프로에서 숱하게 나온 1977년 작 'Feel so good'으로 시대에 회자할 선율을 남겼고, 다음 해에 발표한 앨범 <Children Of Sanchez>가 1979년 제21회 그래미 시상식의 'Best Pop Instrumental Performance'를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다.

'네 전부를 걸어봐'라는 제목처럼 도전적인 분위기의 이 곡은 6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지루할 새 없다. 곡의 주인공은 맨지오니지만 쉴 새 없이 여백을 채우는 찰스 믹스의 베이스 연주와 그랜트 가이스만의 감칠맛 나는 리듬 기타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80년 미국 레이크 플래시드 동계 올림픽의 공식 주제곡으로 특유의 역동성을 맘껏 뽐냈던 이 곡은 1980년대를 주름잡던 KBS 2FM 라디오 프로그램 <황인용의 영팝스>의 시그널로 사용되어 국내 청취자들에게 추억의 멜로디로 남아있다.


카시오페아(Casiopea) 'Fight man' (1991)

어쿠스틱 기타에 푹 빠진 학생들이 일본의 기타리스트 코타로 오시오의 'Fight', 'Wind song'에 도전하는 것처럼 '연주 꽤나 한다는' 실용음악과 학생들은 'Fight man'으로 합주 실력을 검증하곤 한다. 3분 약간 넘는 짧은 곡이지만 쫀득한 베이스라인과 기타 키보드의 더블링 등 속이 알차다. 곡의 중반부 복싱 경기처럼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베이스와 펑키(Funky) 기타가 용호상박의 자웅을 겨룬다.

티스퀘어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퓨전 재즈 밴드 카시오페아는 1979년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래 장장 40년 넘게 현역으로 활약 중이다. 밴드의 주축은 기타리스트이자 메인 작곡가 노로 잇세이. 3기로 나뉘는 밴드의 타임라인에서 유일하게 밴드를 떠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카시오페아 2기에 나온 1991년 작 <Full Colors>의 오프닝 트랙인 'Fight man' 속 화려한 기타 솔로로 일본 최고의 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지위를 공고히 했다.


빛과 소금 '오래된 친구' (1994)

MBC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의 진행자로 활약했던 장기호와 김현식의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을 작곡한 박성식이 의기투합한 2인조 그룹 빛과 소금은 지난 몇 년간 시티팝 붐이 일면서 김현철, 윤수일과 함께 '한국 시티팝의 원류'로 재조명되었다. 이들은 동시대의 봄 여름 가을 겨울보다 인지도는 약했지만 1990년대 가요의 세련미를 책임지며 마니아를 결집했다. 후대에 다양한 후배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샴푸의 요정'과 감정에 충실한 발라드 넘버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가 대표곡.

이들의 정규 4집 <오래된 친구>의 타이틀곡인 '오래된 친구'는 빛과 소금의 곡 중에서도 특출나게 펑키(Funky)하다. 초반부 재치 있는 보코더의 사용은 장기호 특유의 감미로운 음성으로 이어지고, 간결과 화려를 넘나드는 박성식의 건반 연주가 곡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 결혼식 입장곡을 연상하게 하는 오르간 소리와 통통 튀는 베이스 슬랩으로 간주도 빈틈없이 채웠다. 기교를 뽐내면서도 대중적 감각을 포용한 한국 퓨전 재즈의 보석 같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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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엘비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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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힘내라는 말이 더 힘든 걸 알아

또 고작 그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냐고'

_'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中


청춘은 왜 아파야만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이해와 공감이 결여된 사회는 많은 사회 초년생들을 점점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빛나는 힙합 스타들의 주변을 맴돌던 래퍼 최엘비 역시 여러 아픔을 겪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는 귀를 막고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택했다. 세상의 어떤 말보다 노래 가사 한 줄이 주는 울림을 몸소 깨달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음악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꿈꿨다.

그 염원은 작년 11월 정규 3집 <독립음악>으로 결실을 맺었다. 열등감으로 물들어 일그러진 과거는 물론 냉혹한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조연들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가장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최엘비는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우뚝 서있었다. 2021년의 끝자락, 어느 때보다 행복한 연말을 보내고 있던 최엘비와 함께 그의 마지막 20대를 정리해 봤다.


최근 발매한 정규 3집 <독립음악>의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인기를 실감하는지.

여태까지 냈던 것들과 확실히 다르다. 음원 사이트에 댓글도 많이 달리고 SNS 개인 메시지로 장문의 감상평을 보내주시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녹인 자전적 앨범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조연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나 평론 사이트에서도 언급을 많이 해줘서 사람들이 내 음악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변화를 하루빨리 무대 위에서 체감하고 싶을 뿐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장치로 극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적 연출의 배경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독립영화를 생각하고 작업했다. '최엘비'라는 배우가 오디션장에서 주인공 배역을 따내려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렇게 처음 탄생한 곡이 '아는 사람 얘기'다. <독립음악>의 시작은 무조건 내가 오디션 보는 걸로, 대본을 읽는 걸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중간중간 감독이 하는 평가는 따로 정해둔 것 없이 프리스타일로 녹음을 했다. 큰 틀만 정해두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진행했다.

첫 곡 '아는 사람 얘기'부터 <쇼미더머니 5> 예선 탈락처럼 가장 초라했던 시절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단정 짓는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 후련할 것 같았다. 앨범 작업할 때 보통 그 당시의 나를 데리고 와서 다시 꺼내곤 한다. 이번 앨범에 그때의 모습을 기록해야 이 답답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왕 하는 거 최대한 솔직하게 다 표현했다.

'최엘비 얘기를 하는 최엘비를 연기하는 최엘비'가 화자로 나선 것도 같은 이유인지.

정확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때 내 얘기는 아니라면서 대화를 끌어가서 열등감의 밑바닥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비꼬아서 들려주면 사람들이 듣기에 몰입감도 있고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거라 판단했다.



열등감과 비교의 중심엔 친구 비와이와 씨잼이 있다. 두 친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고등학교 시절 비와이는 같은 반, 씨잼은 옆반이었다. 그 둘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닌 반면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내가 쉬는 시간에 앉아서 가사를 쓰고 있으면 둘이 옆으로 다가와 서로 랩도 들려주며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학생 때도 그 둘은 잘 했다. 작업량도 상당했지만 무대 위에서의 끼가 장난이 아니었다. 학교 축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는데 내가 제스처를 소극적으로 하는데 비해 걔네들은 웃통까지 벗고 난리가 났었다. 얘네는 나중에 진짜 크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으로 그들과 어느 정도 격차를 두었던 것 같다.

가사에도 나오지만 둘과 음악 취향도 달랐다. 크루를 함께 하면서 의견 차이는 없었는지.

애들이 피프티 센트나 릴 웨인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겐 잘 와닿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협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냥 랩하는 게 재미있었다. 단체곡을 할 때도 내가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잔잔한 재즈 비트에 내 노래를 따로 만들어 보는 게 전부였다. 사실 섹시 스트릿이란 이름도 맘에는 안 들어서 처음 들어갈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웃음)

스스로 그들과 거리를 두고 열등감을 느끼긴 했지만 유명한 친구들 덕분에 이름을 알리기 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최엘비를 항상 '누구누구 친구'로 기억하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는지.

한 번은 행사에 가서 기리보이 형의 백업 더블링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여럿이서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함성이 가득하다. 나는 그 환호를 즐기면서 랩을 하는데 그날 문득 정신 차리고 관객들을 바라보니까 전부 기리 형을 찍느라 바빴다. 내가 랩을 하고 있는 중에도 다른 사람이 집중 받는 상황을 접한 후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변화의 필요를 느끼고 작업을 결심했다.

기리보이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초기 활동명 '레이지본즈'에서 지금의 '최엘비'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일조를 한 걸로 알고 있다. 기리보이와 크루 우주비행은 어떤 존재인가.

사실 <쇼미더머니 5> 예선 탈락 이후 열등감이 극에 달했던 24살 즈음 음악을 관두려고 했었다. 랩은 그만하고 원래 하던 그림을 그리자고 다짐했을 때 우주비행에 래퍼가 아닌 아트 디렉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리 형이 요즘엔 랩 안 하냐고 물어보면서 피처링 한번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마음은 접어둔 상태였지만 가사 쓰고 서울 가서 같이 녹음도 해보니까 또 재미있었다. 기리 형은 내가 다시 음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은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기리보이의 열렬한 팬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박한 감성을 우리나라 힙합 음악에 가장 처음, 그리고 제일 많이 접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까 기리 형도 나처럼 인디밴드를 좋아했다. 심지어 즐겨 듣는 팀까지 많이 겹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음악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인디밴드를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예전에 아는 교회 집사님께서 mp3에 노래를 넣어주셨는데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이었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검색해 보니까 인디밴드들의 노래에 그런 향취가 묻어있었고 그때부터 유명한 팀들을 하나씩 찾아 들었다. 꼭 인디밴드가 아니더라도 잔잔한 음악들을 많이 들었다.

주로 어떤 밴드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타이틀곡 '도망가!'의 피처링을 맡아주신 브로콜리너마저는 나에게 많은 음악적 영감을 안겨준 밴드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찌질함의 극치와 맞닿아 있는 팀이 십센치다. 1집의 '그게 아니고'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캐스커, 한희정, 롤러코스터, 디어클라우드, 요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파고, 못처럼 많은 인디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년 전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에서도 브로콜리너마저에게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고2 때부터 2년 동안 브로콜리너마저만 계속 들었다. 1집 <보편적인 노래>, 특히 '속좁은 여학생'이란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내가 여학생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가 눈앞에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앨범을 들으면 당시 미술 학원의 물감 냄새, 걸레 말리는 냄새까지도 다 떠오른다.

동경하던 밴드를 실제로 만난 건 언제인지.

한 유통사 인터뷰에서 깜짝 이벤트로 덕원 님이랑 전화 연결을 해 주셨고 나중에 콜라보 할 일 있으면 같이 하자고 말씀해 주셨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우리 공연하는데 같이 할 수 있겠냐?'라고 연락을 주셔서 인연을 쌓게 되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래퍼가 갑자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란 노래를 들고 나와서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부담스러워하시면 어쩌나 하고 고민도 했었다. 실제로도 처음에 듣고 살짝 부담스러웠다고 하셨다. (웃음) 그래도 지금은 다 같이 단체 방에서 꾸준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전작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마지막 곡 '도망가!'에서 밴드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며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그들과 함께 실현했다. 같이 작업한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거의 10년 넘게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 듣던 목소리가 내 눈앞에 실존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직접 만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작업 의뢰를 드린 이후도 적잖이 놀랬다. 특별히 내가 주문한 게 없었다. 정해진 멘트 없이 곡 내용만 설명해 드렸는데 단번에 의도를 파악하셔서 녹음도 바로 오케이가 났다. 브로콜리너마저로 출발했던 내 음악에 그들이 도착한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선망하는 아티스트임은 틀림없지만 분명 독립이라는 취지에 맞춰 피처링을 완전히 걷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을지.

원래 전부 혼자 하려고 했었다. 근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누군가가 마지막에 등장해서 '하나 둘 셋 하면 도망가'라고 밀어주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내가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듣고 자랐으니까 내 우상의 격려로 마무리를 지어주는 게 이 앨범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앨범 전반에 부모님을 향한 존경과 애정도 느껴진다.

'독립음악'의 노랫말에도 쓰여있지만 나는 특이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행동 강박이란 걸 앓았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끈을 보고 뱀을 떠올리고, 그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 때의 포근함까지 연상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애들이 멀리하던 편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믿고 기다려 주셨다. 내가 혼자 빠져있는 그 세계를 즐기도록 놔뒀고 오히려 그 공상을 발전시켜서 그림 같은 걸로 표현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때 받은 사랑이 아직까지도 내 음악의 영감이 되고 내 화법으로 자리 잡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집중력 있는 행동이 곡 작업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상황을 볼 때 멀리서 보는 게 아니고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최대한 가까이 관찰하려 한다.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다 보니까 들었을 때 그 장면들이 상상되고 가사, 연주의 색깔과 온도로도 드러난다. 음악을 하게 되면 브로콜리너마저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이런 점들이 고스란히 내 노래에 녹아들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도드라지는 곡을 뽑아보자면.

처음 담배 피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만든 '구름구름'이란 노래가 있다. 만화를 그릴 때 속으로 하는 생각을 말풍선에 담곤 하는데 구름처럼 피어나는 담배 연기가 꼭 말풍선 같았다. 그래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두고 그 말풍선 속에 표현들을 채워나갔다. 다른 곡들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만화처럼 몇 개의 컷으로 구체화하는 편이다.

그림이나 학업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앨범 커버 작업할 때도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지만 요즘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하나하나 내 손을 거쳐서 하나의 아트워크 단편집을 만들어보고 싶다.

과거 퍼그 모양의 복면을 눌러쓰고 활동했을 만큼 강아지 '율무'도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애완견을 넘어 또 한 명의 가족인 '율무'는 어떤 존재인가.

감정이 메말랐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항상 옆에 있길 바라다보니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었고 실제로 키우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씨잼과 행사를 뛰면서 5만원씩 벌었고 그렇게 모은 40만원으로 데리고 온 친구가 강아지 율무다.

퍼그는 얼굴에 주름이 져있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고 있지만 슬픈, 웃픈 모습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고 내 음악도 퍼그와 닮아 있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 처음엔 엄마가 반대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더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분신이다.

'율무'는 물론이고 용궁으로 떠난 물고기 '삼칠이'와 현재 키우고 있는 햄스터 '콜리'만 봐도 동물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키우기 전에 한 다섯 달 정도는 공부를 한다. 나한테 온 친구들은 최고의 환경에서 살게 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애착이 좀 남다르긴 하다. 그 동물의 역사까지 찾아보고 하니까. (웃음) 조만간 내가 키운 동물들의 기억을 모아 하나의 얘기, 하나의 앨범으로 제작하려 한다.



<독립음악> 이후에 세워둔 계획이 있는지.

당장 대면 행사로 진행하긴 어렵겠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단독 콘서트를 꼭 열고 싶다. <오리엔테이션>부터 <CC> 그리고 <독립음악>까지 엮어서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 짧은 연기 사이사이에 랩을 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연을 구성하고 싶고 코로나가 풀리면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그럼 이번 앨범으로 대학교 시리즈가 마무리된 것인가.

내가 계획한 건 4부작이다. 아직 <MT>가 남아있다. <독립음악>이 혼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 <MT> 즉 멤버십 트레이닝은 전곡 피처링으로 채워 멤버들과 랩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태까지의 작업 중에 제일 즐거운 감정으로 임하고 있다. 학교를 다닌 지 하도 오래돼서 나중에 재입학 해서 엠티를 한번 다녀와 볼까도 생각했다. (웃음)

그 전에 앞서 얘기했던 동물들이 커버를 장식하는 앨범을 먼저 발표할 예정이다. 제목은 <푸른바다38>이 될 것 같다.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들을 상자에 담아 나룻배를 타고 미지의 섬으로 찾아가는 스토리를 기획하고 있는데 결말은 안 정했다. 그걸 두고 올지 아니면 그대로 다시 가지고 나올지는 모르겠다. <독립음악>처럼 내 경험을 담아 또 한 편의 서사를 써보려 한다.

최종적으로 <독립음악>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 대상은 누구인가.

빛나는 주연 뒤엔 현실에 맞춰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당신들이 결코 패배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꿈을 향해 나란히 같이 걷고 있는 모두가 결국엔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노래를 듣고 스스로를 많이 아껴줬으면 좋겠다.

<똥파리>라는 영화가 있는데 극의 주인공은 흔히 우리가 피하고 신경도 안 쓰는 그런 사람이다. 근데 그런 사람도 결국 자기 모습을 조명하는 영화 안에선 주인공이 된 거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는 거고 그래서 나도 조연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 같다.

인간 최재성의 20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 이유는.

최근에 보고 있는 웹툰의 제목이기도 한데 내 20대는 '찌질의 역사'다. 패배감에 젖어 있고 연인과의 이별에도 힘들어하며 찌질하게 살았는데 이제 그 역사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래도 <독립음악>을 통해 열등감으로 물들었던 내 과거를 어느 정도 털어낸 기분이 든다. 실제로 씨잼, 비와이는 알지만 나를 몰랐던 분들도 이제 너도 주인공이라고 말을 많이 해주신다. 사람들이 보내주는 글을 보면서 위안을 얻은 만큼 감사한 마음을 담아 꾸준히 곡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30대, 앞으로의 '최엘비 유니버스'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가길 바라는지.

어린 티만 살짝 벗어도 만족이다. <오리엔테이션>이든 <CC>든 다 대학생, 젊을 때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좀 어른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앨범 속에 투영하는 '나'도 같이 성장하는 느낌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이다. 서른이 된 만큼 또 말도 안 되는 거 막 시도하고 만들어 볼 예정이다. (웃음)


재차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그의 한 마디. 지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는 걸 창피해하지 말자.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아껴주자. 아픈 과거를 드러내면서도 인터뷰 내내 수줍게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청춘의 얼굴이 아닐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내 얘기'를 음악으로 다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선언한 최엘비. 또 어떤 평범한 이야기로 가장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지 기대하며, 그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지길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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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음악의 시대가 다시 오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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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이 세계화되면서 송캠프를 주최하는 기획사가 늘어나고 해외 작곡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변화된 시스템에 의해 앨범을 이끄는 프로듀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진 가운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내 작곡진들이 있다. 모노트리(MonoTree)는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프로듀싱 팀이다. 황현, 지하이, 이주형을 주축으로 시작한 작가(작곡/작사가) 회사는 많은 엔터테인먼트와 아이돌 팬들이 찾는 프로덕션으로 성장했다.

회사를 이끄는 황현은 샤이니의 '방백', 온앤오프의' 사랑하게 될 거야' 등 숨은 K팝 명곡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믿고 듣는 황현', '황토벤' 등으로 불리며 리스너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는 프로듀서를 지난 1월 모노트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상쾌함 속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그의 음악처럼 황현은 진지한 태도로 음악 세계를 풀어놓으면서도 위트가 넘쳤다.


본인과 회사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작곡가 겸 프로듀서이자, 모노트리의 대표다. 모노트리는 작가들이 모인 프로덕션이자 저작권을 관리하는 퍼블리싱 회사다. 최근에는 옐로라는 아티스트를 필두로 뮤지션 제작도 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들이 모여 활동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회사의 설립 계기가 궁금하다.

도제식으로 작곡을 배웠고 혼자 일할 때는 비즈니스까지 스스로 했다.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일본의 작가 사무소 경험과 영미권 소규모 프로덕션과의 교류에서 얻은 힌트로 회사를 세웠다. 목적은 후배 양성이다. 히트곡을 만든 선배들이 여러 문제로 몇 년 안에 역사의 뒤안길로 가는 모습을 보며 작가 보호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황현, 지하이, 이주형 작곡가 세 분이 함께 모노트리를 창립했다. 각자의 역할이 어떻게 되나.

막연하게 운영하다가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나는 전반적인 운영을 하고 이주형은 신인 작가를 발굴한다. 지하이는 해외 송캠프에 가거나 외국 작곡가가 국내 송캠프에 참여하는 등 영어가 필요한 일을 맡고, 해외 교류가 줄어든 지금은 저작권 협회와의 소통과 퍼블리싱을 담당하고 있다.

2014년 말 모노트리 설립 이후 어떤 점이 힘들었고, 어떤 점이 좋았을까.

우선 셋 다 회사 경험이 부족해서 법인 회사를 만드는 초반 과정이 힘들었다. 나만 MBTI(성격유형검사)가 J(판단형)라서 경리 업무를 담당했다. 세금계산서 같은 오피스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느라 첫 6개월은 작업을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친한 동료들이 모여 시작할 때는 크루의 느낌이 컸기에 회사가 점차 모양새를 갖추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었다. 다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나도 작가들과 대화할 때 대표로서 말하는 건지 지인으로서 말하는 건지 헷갈리더라.

지금은 안정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지.

아직 안정기는 아니다. 옐로를 제작하면서 기존에 없던 지출이 많이 생겼고 보험료가 오르는 문제도 있었다. 그렇지만 뮤지션의 제도권 편입화를 위해 우리 프로듀서들은 모두 4대 보험을 적용 중이다.

곡을 팔아서 돈을 벌자는 목표보다 시스템이 먼저였기 때문에 친한 동료가 모노트리를 레퍼런스 삼아 시스템을 구축할 때 가장 뿌듯하다. 내게 조언을 구하러 오면 가감 없이 답변하며 최대한 도와준다. 표준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본보기가 된 것 같다. 나는 데모 CD를 들고 발로 뛰며 회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요즘 신인 작가들은 제작사보다 우리 같은 프로덕션에 먼저 메일을 보내주니까. 보내오는 연락만큼 모노트리에 들어오길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 감사할 따름이다.


좌측부터 지하이, 황현, 이주형

기업의 대표이자 프로듀서, 작사, 방송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비추는 황현이지만 결국 그 근간에는 음악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도 '황현 스타일'이 무엇인지 콕 집어 얘기하지 못한다. 만화 주제가 같은 감성적인 노래부터 전공을 살려 다양한 클래식 악기를 사용한 곡, 재즈, 라틴, 전자음악까지, 그 넓은 스펙트럼이 어디서 왔는지 가늠해 보았다.


어떤 계기로 음악을 좋아하고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냥 한 느낌이다. (웃음) 외가 친척들이 모두 미술을 해서 음악보다는 미술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나와는 맞지 않아서 다섯 살 즈음 피아노 학원으로 보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본인 시간을 가지고 싶으셔서 그랬던 것 같다. 그 후로 계속 피아노를 치면서 칭찬을 받으니 '관종'의 끼가 생겼다. 또 그림은 반응이 미지근하지만 피아노는 잘 못 쳐도 환호를 많이 해주지 않나.

초등학교 6학년 때 메탈에 빠지면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고 루나 씨, 엑스 재팬 등 일본 비주얼 록을 통해 아이돌 문화를 받아들였다.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시기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4년제 음대에 가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클래식 작곡을 지망했다. 그때도 대중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고 군대를 다녀온 후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으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대중음악으로 접어든 특별한 계기나 동기는 무엇인가.

특별한 계기라면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던 것이다. 19살에 상경하면서 만난 캐스커 이준오를 통해 일렉트로니카를 접했고 제대 후 컴퓨터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학교 3학년 무렵 영화 음악 작가 정재형의 어시스턴트를 하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거기서 전공을 살리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요 스트링 편곡이라든가 악보 작업이라든가. SG 워너비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스트링이 꼭 들어갔다. 이렇게 점차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때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경험이 지금 프로듀싱의 자양분이 된 건지.

그런 것 같다. 모든 작곡가가 그렇듯이 나만의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코넬리우스나 사카모토 류이치같이 완전히 예술도, 대중음악도 아닌 것을 꿈꿨다. 돈도 벌어야 하고 빨리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곡을 파는 쪽으로 궤도를 수정했지만. 지금은 아이돌 음악이 제일 재밌다.

작업물을 보면 라틴 음악도 좋아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개인적 선호, 둘째는 사람들이 잘 안 해서다. 중학교 1학년 때 음반 가게 형의 추천으로 스탄 게츠와 주앙 지우베르투의 <Getz / Gilberto>를 처음 접했다. 어떤 언어인지도 모르고 재즈와 보사노바 음악을 몇 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들었다. 당시 '제3세계'라는 표현 때문에 더욱 신비롭고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윤상과 작업하던 시기 박창학을 만나면서 더 좋아지기도 했다. 정서적으로도 라틴과 우리나라가 잘 맞는 것 같다. 내가 작업했던 카라 박규리의 솔로곡 '백일몽'도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탱고 장르다.

다른 장르에도 관심이 있나.

주로 록을 듣다 보니 록 기반이지만 록이 아닌 음악을 만들려고 고민을 많이 한다. 그 결과 탄생한 곡이 레드벨벳의 'Day 1'이다. 시퀀싱을 첨예하게 찍어 페퍼톤스와 일본의 심벌즈라는 팀의 스타일을 입혔다. 최근 온앤오프가 부른 <연애혁명>의 OST '이별 노래가 아니야'에도 같은 방식을 접목했다.

최근 들은 곡 중에서 재미있던 곡이 있을까.

지금 생각나는 것은 위켄드의 'Out of time'이다. 1980년대 일본 시티팝을 통째로 샘플링해 구성한 탑라인이 마음에 들었다. 3년 전부터는 일본 밴드 오피셜히게 단디즘을 미친 듯이 좋아하고 있다. 내가 썼다고 착각할 정도로 맞춤양복 같은 음악을 하는 팀이다. 국내에서는 새소년의 'Joke!'나 적재의 <서로의 서로>, 아이돌 음악은 에스파의 'Next level'을 꼽고 싶다.


(좌) 스탄 게츠, 주앙 지우베르투 <Getz / Gilberto> / (중앙) 레드벨벳 ‘Day 1’ / (우) 위켄드 ‘Out of time’

2008년 소녀시대의 '오빠 나빠'로 데뷔한 황현은 SM엔터테인먼트의 송캠프에 참여하던 때부터 마니아층을 형성했지만 그의 음악은 타이틀곡이 아닌 수록곡에 머물렀다. 그랬던 그가 모노트리의 이달의 소녀 프로듀싱에 이어, 홀로 WM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온앤오프의 음악을 전담하며 전면에서 앨범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데뷔부터 함께한 온앤오프 프로듀싱을 중점으로 황현의 음악 세계를 속속들이 살폈다.


처음으로 전담 프로듀싱을 맡은 그룹 온앤오프에 황현의 특색이 많이 이식된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전담한 계기가 궁금하다.

모노트리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WM엔터테인먼트 이사에게 연락이 왔다. 오마이걸도 데뷔한 지 별로 안 됐을 때다. 당시 이달의 소녀 프로듀싱에 집중하고 있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냥 한번 만나자고 해서 갔다. 그 자리에서 신인 그룹이었던 온앤오프의 전담 프로듀싱을 의뢰받았다. 앨범 전체를 도맡아서 프로듀싱해 본 경험이 없다고 해도 잘할 거라고 하더라. (웃음)

그때 덜컥 맡은 인연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데뷔 초반에는 다른 남자 아이돌에게 데모를 주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다. 솔직히 앨범 한두 장 정도 발매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장이나 엔터테인먼트 상황이 녹록지 않더라. 그러다 보니 오기가 생겨서 더 집중하게 됐다.

온앤오프를 프로듀싱하면서 구현하고자 한 음악 스타일이나 이미지가 있나.

팬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바뀌지만 일단 나와 회사의 공통적인 의견은 '다른 그룹에게 어울리는 곡은 쓰지 말자'다. 다른 작가의 트랙을 가지고 수정을 해도 무조건 온앤오프의 색깔이라는 말이 나오게끔 팀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려고 했다. 대형 기획사보다 자본 규모가 작은 중소 기획사가 시장 상황을 이겨낼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룹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이나 멤버가 있을까.

곡마다 주인공이 다르고 매 앨범의 타이틀곡이 멤버들의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기에 답하기 어렵다. 타이틀곡 콘셉트가 연달아서 비슷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곡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유추하는 방향과 일치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음악에 확실한 캐릭터성이 있어야 뮤직비디오부터 안무까지 박자가 맞는다. 조금이라도 이전과 비슷한 음악이 나오면 의상이나 화장 등도 비슷해지고 재미도 덜해진다.

온앤오프가 처음 반응이 왔던 곡이 '사랑하게 될 거야'였던 것 같다. 지금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 곡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가사가 온앤오프의 캐릭터를 크게 결정한다. 보통 남자 아이돌을 보면 멋있고 화려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서사와 감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화려하고 세면 해외 팬은 확실히 빨리 붙는다. 온앤오프는 서사와 감성에 포인트를 맞추다 보니 해외 팬을 빨리 모으지 못했지만 대신 탄탄한 국내 팬덤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특히 가사의 어떤 부분에 신경 썼나.

'사랑하게 될 거야'에서 주구장창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원래 그 말은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좋아한다' 쪽으로 간다. 혹여 쓰더라도 화자가 고민이 많은 편이라 3절에서야 등장한다.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가사 역시 상대방한테 하는 말이지만 독백일 수도 있지 않나.

두 번째 타이틀곡 'Complete'부터는 범용적인 관계를 위해 인칭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다. 꼭 필요할 때는 '그'라고 표현하거나 성별을 모호하게 쓰려고 한다.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친구 간의 우정일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등 넓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온앤오프의 두 번째 앨범인가, 세 번째 앨범 최종 수정녹음 전에 가사지를 다 확인해서 바꾸기도 했다.

과거에는 앨범 작업만 맡으면 됐지만 요즘은 경연 프로그램이나 연말 시상식에 사용할 색다른 편곡까지 필요하다. 온앤오프 역시 <로드 투 킹덤> 출연으로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무 관객, 360도 스테이지라는 시각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었는데 그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웃음) 일단 온앤오프가 편곡적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형 기획사에서는 매번 다른 프로듀서에게 의뢰하지만 나는 멤버들이 어떻게 무대에 서는지 다 알기 때문에 잘 나왔다. 이 프로그램으로 온앤오프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도 이 시간을 보상받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때 안무가와 소통하면서 배운 것도 많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내가 먼저 편곡하면 멤버들과 스태프들이 다 같이 들으며 의견을 냈다. 나는 음악만 해온 사람이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무대장치, 동선, 구간별 속도, 체력 안배 등 신경 쓸 부분이 많더라.

작년 온앤오프가 첫 정규앨범의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로 결실을 거뒀다. 멤버들이 방송에서 1위를 하며 황현 프로듀서를 언급했다.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 심정이 어떤가.

일단 온앤오프의 작업물로 피드백이 올 때 가장 고양된다. 결국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나는 대국민 히트송이 있는 작곡가도 아니고 가수도 아닌데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비슷한 상황의 작곡가가 거의 없어서 감사하고 신기하지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관심을 많이 받는 만큼 허투루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온앤오프 멤버들이 동반 입대했다. 그동안의 추억도 많고 걱정도 될 텐데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내게 친구 같은 사람들이다. 다섯 명이 한 번에 입대한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와이엇과 엠케이는 더 늦게 갈 수 있었는데 멤버들끼리 합의해서 시기를 맞췄다. 함께 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전역 후 바로 컴백한다면 공백기가 길진 않다. 여름 스페셜 앨범 발매 후 번아웃이 왔을 때도 멤버들의 상황을 알다 보니 책임감을 갖고 <Goosebumps>까지 작업할 수 있었다.


(좌) 온앤오프(ONF) ‘사랑하게 될 거야’ / (중앙) 온앤오프(ONF) ‘신세계’ /
(우) 온앤오프 (ONF) ‘Beautiful beautiful’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하다.

내 인생을 참치에 비유한다. 부레가 없는 참다랑어과 물고기는 멈추면 죽어서 잘 때도 헤엄을 친다. 내 생활패턴도 그렇다. 계속 바쁘게 보내다가 12월 중순 온앤오프 단독 콘서트 이후 여유가 생겼다. 10년 만에 한가로운 연말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작업실에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불안하더라. 1월 초에도 할 일이 없었지만 괜히 불편한 마음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작업을 했다.

11~12월에 걸쳐 끝낸 일로는 2020년부터 참여한 부산음악창작소의 인디 뮤지션 싱글 프로젝트가 있다. 수연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인데 지하이가 선발하고 내가 프로듀싱했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맞지 않는 일이지만 인디 아티스트와의 작업이 재밌다. 앞으로는 온앤오프에 열중하느라 놓쳤던 회사 시스템들을 보완하려고 한다.

SM 송캠프 참여, 모노트리 설립, 이달의 소녀와 온앤오프 프로듀싱 등 길고 다양한 커리어 속에서 작곡가가 지켜오고 있는 신념이 궁금하다.

음악의 시대가 다시 오길 꿈꾸고 있다. 물론 꿈을 위해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직업의식만 가지고 하면 금방 지친다. 음악을 오래 하려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 발전해야 한다.

모노트리의 대표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일까.

기존에 없던 형식의 프로덕션이 되길 바란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 자본이 들어가는 일이라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K팝의 굵직한 작가 회사가 된 모노트리를 프로덕션 위주의 팀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한 회사에서 비주얼과 매니지먼트, 음악 제작까지 모두 담당하지만 해외는 분리된 경우가 많다. K팝을 선도하는 프로덕션 회사가 되면 재밌겠다. 가수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우리는 프로듀싱만 잘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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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시스 하세빈 "꾸준히 내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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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00년대 초반, 노래방을 휩쓸었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솜사탕'을 기억한다. 두 대표곡이 대변하듯 클래시컬 록이라는 독자적인 깃발을 흔들면서도 대중성을 놓지 않은 밴드 네미시스가 있고 그 중심에는 기타리스트 하세빈이 서 있다. 네미시스의 대다수 수록곡이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면 특정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이러한 열정이 지금까지도 계속되었기에 그를 종횡을 아우르는 스펙트럼의 소유자라 할 수 있겠다.

지난 8월 31일, 골든 핑거 페스티벌에서 출연자로 연이 닿아 그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록의 호흡이 약해진 음악 시장에 대해 하세빈은 '흐름을 바꾸기보다 내가 지금 있는 자리를 지키고 내 음악을 할 것'이라며 단단한 생각을 전했다. 피아노를 두드리듯 부드러운 기타 연주를 닮아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다가도 '초심을 늘 생각한다는' 음악 삶의 신념을 논할 때의 묵직함은 록 그 자체였다.


네미시스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고 유튜브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다수의 뮤지션이 그렇겠지만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무언가를 준비하면 상황이 안 좋아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원래는 올 하반기에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잘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일정이 미뤄지기도 하고 간간이 온라인 공연을 참여하고 있는 정도다.

네미시스 공연을 준비했다는 뜻인지.

그렇다. 네미시스 공연도 있고 다른 것도 준비하고 있다.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골든 핑거 페스티벌 말고는 오프라인 공연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든다. 차라리 곡을 쓰는 것에 집중하고 만약 공연을 한다면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해야겠다고 시작한 시기는 고등학교 때다. 그전에는 생각만 좀 하고 음악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학원이 있네, 가봐야지' 해서 친구들과 함께 다녔고 '밴드부도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마침 학교에 없어서 동창끼리 하나둘씩 모여서 시작하게 되었다.

악기 중에선 왜 기타를 잡게 된 건가.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와서 기억나는 게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생 즈음 엠넷에서 해외 뮤지션의 영상을 자주 방영했는데, 그중 스티브 바이(Steve Vai)가 인상 깊었다. 스티브 바이의 'Bad horsie'와 같은 곡을 들으면서 기타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좀 트리키하고 현란하면서 우아한 연주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거 같다. 피아노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이런저런 학원 다니라고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오래 하니 너무 지겨웠다. 자아 없이 기계적으로 하느라 지겨워하면서 손 놓고 있다가 기타를 배우면서 피아노에도 또 관심이 생기더라.

스티브 바이로 기타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따로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없는가?

아무래도 처음을 스티브 바이로 시작했던 것이 임팩트가 컸다. 지금 꾸준히 영상을 보는 건 아니지만 항상 처음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려고 하는 편이다. 사실 여러 유명한 기타 뮤지션들이 계시지만 나에게 있어 초반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를 제일 존경한다.

2005년 1집을 시작으로 지금 16년 차인데 인디 뮤지션으로 오래 활동하게 된 비결이 궁금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쉽지 않다는 게 금전적인 문제, 불화, 혹은 음악적 견해를 말하는 것이라면 아마 모든 밴드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16년 동안 같이 하다 보면 가족도 싸우는데 의견이 안 맞는 경우도 당연히 있고 밴드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는 예전부터 해서 그런지 어느 정도 맞춰가는 법을 안다. 안 좋게 말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가져갈 건 가져가면서 타협을 하다 보니 오래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팀워크에 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인디 신에서 활동도 힘든데 음악 자체도 흔치 않은 장르를 택했다.

네미시스 나름대로 색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쿠스틱이 유명하다고 어쿠스틱으로 치우치거나, 인디 안에서 대중적인 장르, 비주류 장르를 나누기보다는 다양한 게 좋지 않나.

네미시스 특유의 클래시컬한 사운드를 만든 시작점은.

드러머는 스피드 메탈을 좋아하고 나 같은 경우는 잔잔한 브릿 팝 위주로 들었고 다른 멤버는 멜로딕 한 곡들을 좋아했다. 다들 좋아하는 장르가 달랐다. 그렇게 비트감도 있으면서 서정적이고 멜로딕 한 걸 섞어보자 해서 지금의 색깔이 나왔다. 클래식의 경우는 내가 기본적으로 좋아한다. 물론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시도했는데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은 장엄하고 서사적 사운드가 밴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사실 '솜사탕'은 전혀 클래시컬한 느낌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가벼운 느낌도 좋아한다.

작사, 작곡하는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다양하다. 책을 보고 혹은 영화를 보고 작업한 것이 한두 곡 정도 있지만 대부분 피아노 앞에서 다양한 것을 떠올리면서 시작을 한다. 먼저 상상으로 큰 그림을 그려놓은 후 작업하고 또는 기타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일상에 있던 모든 게 모여서 상상으로 나오는 결과물이라고 본다.

작업하다가 힘든 경우가 있었는가, 극복 방법은?

항상 그렇다. (웃음) 20대 초반에는 그냥 매일 한 곡 이상을 일기 쓰듯이 써보자 해서 한두 개씩 테마별로 작업했을 때도 있었다. 지나서 보니까 확실한 임팩트가 있는 것이 아니면 이걸 다 쓰는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곡들이 비슷하게 나올 때도 있고. 너무 곡에 몰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하다가 만드는 등 지금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하고 있다.

골든 핑거 페스티벌 1회부터 쭉 참여했던데, 처음에 섭외 받았을 때 기분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유명하신 선배님들과 함께 하는데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불러주셔서 영광이었다. 먼저 감사하단 생각이 들고 그다음에는 엄청난 선배님들 사이에서 내가 껴도 되는 건가 하는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골든 핑거 페스티벌 2회가 고향인 통영에서 열렸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방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했고 음악을 할 때 결핍 같은 것이 있었다. 공연 하나 보기가 어렵고 학원도 별로 없다 보니 겨우 찾아서 고등학교 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구가 적으니까 음악 시장이 활발하지 않아서 안타까웠는데, 이런 문화를 지방에서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많이 오진 않았지만 그런 공간이 점차 커지면 좋을 것 같다.

페스티벌 3, 4회는 비대면으로 진행했는데, 느낀 차이점이 있다면?

확실히 에너지가 다르다. 내가 나올 수 있는 에너지 강도도 달랐고 현장의 분위기도 달랐다. 관객이 있고 없고 차이가 크더라.

공연에서 10대 뮤지션들의 참여가 점차 늘고 있다.

점점 더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번 골드 핑거 페스티벌에 참여한 10대 뮤지션 중 '진산'의 영상을 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배울 때 나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을 한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기타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내 음악을 해야겠다!'라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한 악기의 대가가 되기보다는 악기들을 두루두루 다루면서 그냥 내 음악을 꾸준히 해왔던 것이다. 지금의 10대 뮤지션들 모두 잘해주고 있지만 너무 한 분야의 톱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난 안돼'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여러 악기도 시도해 보고 전체적인 음악을 위해 접근했으면 한다.


 

네미시스나 개인 작업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음악은 무엇인가?

사실 제일 최근에 작업한 곡일수록 가장 최근의 생각을 담았기 때문에, 추천하는 작업물은 4집 앨범 < White Night >이나 작년에 싱글로 나온 '세상의 끝'이다. 1집 < La Rose de Versailles >은 초기의 열정을 담고 있다. 음악을 시작할 때의 에너지가 담긴 1집과 지금의 4집을 들으면 '이 밴드는 이런 식의 음악을 하는구나'를 더 잘 느낄 수 있을 거 같다.

음악가로서가 아닌 하세빈 개인의 목표나 삶의 지향점이 있다면?

20살 초반에 음악을 할 때는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바라보고 해야 하나?'라는 목표 없이 했다. 밴드가 어디까지 올라가면 성공일까? 공중파 TV에 나와야 하나? 당시 성공했던 팀처럼 유명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꾸준히 내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음악이 아닌 다른 것으로 경제적 자유를 이루어 좋아하는 음악을 평생 즐겁게 해 나가는 것이 목표이다. 지속 가능한 음악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한다고 본다.

연주자로서 개인의 자아실현과 경제적 삶과 같은 현실적인 면에서 충돌이 있었는지.

사실 홍대에서 나름 성공한 밴드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벌이는 뻔하다. 활동 초반부터 느낀 문제다 보니 '아무리 성공해도 이 정도 수준이구나'하는 마음이 들어 재테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웃음) 이전부터 음악으로 잘 되면 오케이, 안되면 힘든 문제니까 다른 걸로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무언가 만들어놔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럴 것 같다.

1집부터 내가 직접 대표해서 회사를 만들었는데, 음악 관련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음악 하는 사람들은 돈 생각하면 안 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듣다 보니 나한테 사기 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을 확실히 만들어놓고 시작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아직까지도 음악 시장에서 돈 관련한 문제를 터부시하는 문화가 남아있는 게 이상하다.

하세빈이 봤을 때 기타리스트면서 곡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는지?

어릴 때는 본 조비의 리치 샘보라가 음악을 잘 만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면 스티브 바이나 익스트림(Extreme)의 누노 베텐코트 그리고 본 조비가 있었다. 리치 샘보라는 스티브 바이처럼 매우 테크니컬한 기타리스트는 아니지만 송라이터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본 조비 같은 팀이 이상적이라고 본다.



내가 뽑는 나의 명반이 있다면?

내가 왜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시작점 그리고 음악 인생 초반에 대해 생각을 자주 한다.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 어떤 장르를 듣고 확 꽂힌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들어보고 추천도 받으면서 점차 단계적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팝과 같은 이지리스닝부터 시작해서 매니악한 소규모 음악까지 닿게 되더라. 나에게 처음 밴드 음악의 임팩트를 주었던 음반은 본 조비의 <Crossroad>였다. 근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면 잘 안 듣게 되더라. (웃음)

기타가 위주가 아닌 팝 앨범도 들었을 텐데.

시간이 너무 지나다 보니까 지금은 듣는 게 많이 달라졌는데 어렸을 때는 마이클 잭슨, 라디오헤드를 많이 들었다. 사실 그런 음악을 하고 싶었다.

요즘 들어 찾아 듣는 음악이 있는지.

핑거스타일 기타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의 사토시 고고 음악을 들으면서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 그 외에는 새로운 곡들을 들으려고 랜덤 재생으로 많이 듣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만 들으면 너무 한정적이고 신곡을 잘 안 듣는 거 같아서... 요즘은 추천이더라도 개인 취향 위주로 해준다더라. 아이돌이나 댄스 음악도 잘 듣고 있다.

최근에 쓰고 있는 곡의 스타일은 어떤 쪽인가? 어떤 스타일의 곡을 쓰고 싶나?

아까 말했다시피 핑거스타일 기법을 연습하고 있다. 기타로만 만들 수 있는 곡에 신경 쓰고 연습하면서 재밌어하기도 하고 또 스트레스도 받고 있다. 그 외의 음악으로는 재즈적인 느낌을 차용하기도, 다 차치하고 통기타로 하는 담백한 발라드도 쓰는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직접 노래할 생각은 없었나?

노래를 못한다. (웃음) 데모를 만들 때도 일단 내가 가이드를 불러서 녹음하고 나중에 보컬한테 해보라고 하면 '나는 노래를 하면 안 되는구나'를 확연하게 느낀다. 그걸 모를 수가 없다.

네미시스 앨범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집에서 계속 작업하고 있다. 지금 시기보다 더 괜찮아졌을 때 발매해서 공연도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상황 때문에 연기되고 있다.

코로나가 해제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아무래도 네미시스 공연이다. 작년에 온라인 공연을 제외하면 1년 8개월 정도 됐다. 2019년 연말 때 콘서트에서 '내년에 또 봐요'라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웃음) 결국 연기되고 또 연기되었다.

네미시스 활동하면서 20여 년 세월이 흘렀는데 음악적인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와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인지?

2005년에 1집을 내기까지가 힘들었다. 2000년부터 2004년 사이에 1집을 만들었다가 폐기했고 다시 2005년에 발매하게 되었다. 음반을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하고 이제까지 노력했던 게 다 헛수고가 될 것 같고 힘들었다.

가장 좋았던 때는 네미시스 1집을 내고 활동했을 때. 그리고 밴드 이브 6, 7집에 참여했을 때다. 방송 활동도 많이 했었고 반응도 좋았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즐거운 시기였다.



네미시스 (Nemesis) 4집 - White Night
네미시스 (Nemesis) 4집 - White Night
네미시스
SonyMusic
네미시스 (Nemesis) 1집 - la rose de versailles(베르사이유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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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돌풍 속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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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꾼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사람들이 신음하는 2045년 지구, 척박한 일상 속 가상 세계 '오아시스'만이 피난처다. 이곳에서 유저들은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게임에 참가하며, 고전 영화를 배경으로 한 퀘스트와 대중문화 속 전설적인 캐릭터를 만나는 등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허물고 비로소 모두의 꿈을 실현하는 인류의 새로운 생태계, '메타버스(Metaverse)'다.

먼 미래처럼 보이던 모습이 이제 코앞에 다가왔다.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 세계를 일컫는 메타버스는 이미 금융, 의료, 교육 등 사회 다방면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뜨겁게 동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VR 기기 '오큘러스 퀘스트2'로 애플의 초기 아이폰과 맞먹는 판매량을 기록한 페이스북과 하이엔드 VR 헤드셋을 발표할 예정인 애플, 그 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도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기 위해 저마다 발 빨리 움직이고 있다.

메타버스가 새 시대의 문명으로 자리 잡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핵심이 '콘텐츠'에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최첨단 기술을 겸비해도 그 속에 즐길 거리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이야기다. 메타버스 관련 기업들의 성패도 참신한 놀잇거리가 있는지에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음악계 역시 이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현실 너머의 광활한 땅을 맞아 조금씩 시류에 탑승하고 있는 국내외 팝 신의 면면을 살펴본다.


에스파, 무한한 가상 세계의 광야로

K팝 신에 화끈한 신기술의 돌풍이 인다. 2020년 11월 'Black mamba'로 데뷔한 에스파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6월 'Next level'로 공개 32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1억 건을 돌파하며 매서운 기세를 입증했다. 국내 음원 사이트 정상에 안착하는 것은 물론 독특한 팔 꺾기 '디귿 춤'은 각종 SNS에서도 유행했다. 'Next level'은 이렇게 끝난다. "Next level /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그룹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장대한 이상을 그려가는 기획사의 미래관까지 압축한 한 줄이다.

에스파는 현재로서 K팝이 다다른 세계관의 절정이다. 인원 구성부터 독특하다. 실제 멤버 네 명에 그들의 분신 넷이 공존한다. 개인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제공된 데이터로 설계된 각 멤버의 아바타들이다. '싱크(Synk)'를 통해 이들과 교감하고 그를 방해하는 악당의 존재를 찾아 가상의 땅 '광야'로 떠나는 등 그 스토리도 장대하다. 어느 순간 멤버들과 교차되고 무대 위에서 직접 춤추기도 하는 아바타. '삶의 기록'을 뜻하는 '라이프로깅(Life logging)'과 '가상 세계' 메타버스를 결합했고 이를 뒤받치는 건 최첨단의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이다.

SM은 세계관을 음악에 한정하지 않겠다는 야심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지난 SM 콩그레스 2021에서 '음악을 기반으로 이전에 없던 경험을 만들기 위한 도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모션 그래픽, 아바타, 소설의 앞글자를 딴 'CAWMAN'을 자사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콘텐츠가 디지털 세상에서 팬들을 통해 확장해 가수와 대중이 그 속에서 호흡할 것이라는 귀띔이다. K팝 산업 최전선에 선 SMCU의 미래, 그 중심에 메타버스가 있다.


새 시대의 콘서트 컬쳐, 포트나이트와 로블록스

팬데믹으로 부닥친 일상 구금은 공연 업계에 큰 타격이었다. 가수는 무대 뒤에서 팬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메타버스가 대중음악계에 관심사로 급부상한 것도 사실 이런 사정에서였다. 메타버스는 멈춰버린, 그리고 앞으로 크게 바뀔 콘서트 업계에 방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게임 산업이었다.

미국의 에픽게임즈가 제작한 '포트나이트'는 온라인 게임에서 대표적인 메타버스 서비스로 거듭난 플랫폼이다. 지난해 4월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이곳에서 가상 공연을 펼쳐 큰 화제를 모았다. 2,770만 명의 관객, 200억 원이 넘는 수익으로 오프라인 공연보다 더 많은 돈을 번 대규모 쇼였다. 방탄소년단도 'Dynamite'의 새 안무 버전 뮤직비디오를 포트나이트에서 최초 공개했고, 올해 8월에는 아리아나 그란데가 '리프트 투어'로 유행의 열기를 이어갔다.



월간 사용자 수 1억5000만 명에 달하는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의 움직임도 주목해야 한다. 작년 래퍼 릴 나스 엑스는 로블록스 내에서 물리 기반 렌더링, 안면 인식 기술 등을 앞세운 빼어난 몰입감의 가상 공연으로 3,600만 명의 접속자를 모았다. 이 밖에도 트웬티 원 파일럿츠의 콘서트에서는 밴드를 콘셉트로 한 미니 게임과 퀘스트도 선보였다.

로블록스는 대형 음반사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기업이기도 하다. 연초 워너 뮤직에 5억 2천만 달러를 투자받은 데에 이어 7월에는 소니 뮤직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더 많은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로블록스 안에서 울려 퍼질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K팝 팬들의 새로운 소통 창구

미국에 로블록스가 있다면 한국에도 이에 뒤처지지 않는 콘텐츠가 있다. 네이버 자회사 네이버제트가 개발한 제페토다. 증강현실 기반의 3차원 아바타 플랫폼이자 글로벌 10대들에게 하나의 소셜 미디어 앱으로 자리매김한 서비스로 전 세계 2억 명이 넘는 유저가 뛰어놀고 있는 새 시대의 놀이터다.

제페토는 K팝 신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회사는 YG엔터테인먼트다. 지난해 9월 블랙핑크는 제페토에서 멤버들의 아바타를 앞세운 가상 팬 사인회를 개최해 4,600만 명의 세계 팬을 끌어모았다. 그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현한 '블핑하우스'는 연일 팬들이 사진을 찍고 춤을 추는 '블링크(BLINK)'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됐다.

기존에 있던 단상에 가수의 아바타를 올려놓은 것은 비교적 간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내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자체적인 온라인 팬 플랫폼 제작에도 열성을 다한다. 재작년 하이브는 팬 커뮤니티 서비스 '위버스'를 론칭해 팬과 가수의 다양한 교류 방식을 하나의 채널에 취합하는 전략을 펼쳤다. 게임 회사 엔씨소프트가 카카오 산하 엔터테인먼트 업체들과 합작한 '유니버스'도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곳에서 팬들은 아티스트의 아바타를 코디하거나 직접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메타버스가 선사한 K팝 신 스타와 팬들의 새로운 소통 방식이다.


다시 음악을 소장하는 시대로? NFT를 만나다

메타버스가 일상에 고착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경제시장과의 연결이다. 가상 세계가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상호운용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개인이나 기업이 자유롭게 수익 모델을 창출해 판매하고 화폐를 벌어들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이에 최근 몇 년 사이 가상자산 NFT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NFT는 'Non-Fungible Token'의 약자로 소유권, 판매 이력 등의 정보가 블록체인에 저장되어 위조가 불가능하고, 각각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인식 값이 부여되어 대체 역시 불가능한 암호화폐를 말한다.

대중음악계에도 NFT를 활용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Blinding Lights'의 스타 위켄드는 예술 경매 플랫폼 니프티 게이트웨이(Nifty Gateway)에서 낙찰자만 소유할 수 있는 미공개 음원을 판매했다. 수익은 229만 달러(한화 약 26억 원)였다. 이 밖에도 린제이 로한, 미국 밴드 킹스 오브 리온, DJ 저스틴 블라우도 앨범 발매에 NFT를 적용했다. 음원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음악 청취 방식이 된 지금 다시 과거처럼 노래를 개인이 소장하는 형국이 도래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K팝 산업의 발걸음도 바쁘다. JYP엔터테인먼트는 7월 블록체인 업체 두나무와 NFT 플랫폼 사업을 위한 업무 제휴를 맺었다. 국내에서는 산업에 공식적으로 뛰어든 최초 기획사다. 보이그룹 에이스는 4월 미국 블록체인 플랫폼 왁스(WAX)를 통해 멤버들의 사진 등이 담긴 굿즈를 선보였다. 가수뿐만 아니라 인플루언서, 화가, 사진작가 등 다양한 창작자들의 작품을 다루는 K컬쳐 전문 NFT 마켓 플레이스 스노우닥도 등장했다.

NFT 시스템은 가수와 팬 모두에게 윈윈(win-win) 될 수 있다. 아티스트는 무분별한 복제를 막아 창작물의 희소성을 지킬 수 있고, 팬들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독점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가격대가 지나치게 높아 대중이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은 풀어야 할 숙제다. 투기성 거래의 위험이 크다는 지적도 고민해볼 만하다. 대중음악계와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체적인 적정선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다.


마케팅 수단 그 너머로, 라디오헤드의 특별한 전시회

앞서 언급했듯 미국의 에픽 게임즈는 메타버스와 대중음악을 연결할 방법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포트나이트에서 유저들은 트래비스 스콧의 신곡을 들었고 아리아나 그란데와 함께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디오헤드다. 엥? 라디오헤드? 의외의 인물이다. 라디오헤드가 아바타로 변신해 포트나이트에서 오징어 춤을 추면서 'Creep'을 연주하기라도 하는 걸까?

뭐, 그것도 재미있겠다만 정확히는 아니다. 기술 혁신과 실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세기의 록 밴드는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지난 9월 8일 에픽 게임즈와 콜라보한 <Kid A Mnesia Exhibition> 프로젝트의 티저가 플레이스테이션 쇼케이스에서 공개됐다. 밴드의 2000년대 걸작 <Kid A>와 <Amnesiac>의 20주년과 21주년을 기념하는 가상 전시회다.



오는 11월 플레이스테이션5, 맥, PC를 통해 정식 출시 예정이지만 아직 아무런 추가 정보가 없어 정확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고편에서부터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리더 톰 요크와 비주얼 디자이너 스탠리 돈우드가 협업한 아트워크와 프로듀서 나이젤 고드리치가 맡은 오디오 디자인이 지하 세계에서 1인칭 시점의 관람자를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으스스한 전경으로 초대한다.

가상 공연이나 팬 커뮤니티 기반의 서비스와 달리 아티스트의 명작을 박물관 형식으로 재현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라디오헤드는 매우 난해한 음악을 하는 밴드다. 어쩌면 그들이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팀의 예술 세계를 메타버스에서 구현할 지도 모를 일이다. 메타버스가 단순 마케팅 수단을 넘어 뮤지션의 내면과 감정을 보다 정교하게 채색하는 캔버스로 진화할지. 결과는 11월에 확인할 수 있다.



Radiohead (라디오헤드) - Kid A
Radiohead (라디오헤드) - Kid A
Radiohead
BeggarsXL Recordings
Radiohead (라디오헤드) - Amnesiac
Radiohead (라디오헤드) - Amnesiac
Radiohead
BeggarsXL Recor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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