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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모, 랩에서 중요한 것은 삶이고 그것을 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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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의 피아노 치는 래퍼에서 'Meteor'의 별똥별에 이르기까지. 창모의 성공 신화는 강렬하고도 명쾌한 음악의 승리였다. 이제는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각종 미디어에 자주 등장해 주류로 올라섰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언더그라운드 록스타'라 칭한다. 예술적 고집과 독자성만큼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게 또한 창모가 힙합 애호가들과 대중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두드려온 동력일 것이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창모만이 털어놓는 '솔직함'과 대중 영합을 넘어서는 '진정성'이 공감을 부른다는 사실을 안다. 첫 정규 앨범 <Boyhood>의 성공 스토리는 경기 덕소의 꿈나무 래퍼가 새 시대의 전국 힙합스타로 솟아오르는 신분 상승을 엮어낸 강력한 자기 서사였다.

음악만큼이나 그는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이야기하는 데에 솔직담백했다. 음악적 다양성에 대한 야망과 더불어 '돈'에 대한 나름의 철학까지 거침없이 자신의 진면(眞面)을 공개했다. 하지만 편안하고 밝은 목소리 안에는 살짝 고민도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와 나눈 대화는 한 편의 자서전을 읽는 것 같았다.

첫 정규 앨범 <Boyhood>와 타이틀 'Meteor'로 202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성공에 대해 현재 기분은 어떤가?

일단 덤덤했다. 'Meteor'로 1위 했을 때, 항상 꿈꾸어 왔던 거라 상기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나를 보여줬구나.' 싶었다. 결국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내가 그걸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줄 거라는 목표도 있었고. 나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음악 산업의 성공 모델은 아니다. 다른 모델이면서도, '이런 식으로도 음악을 하면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구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모델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대중음악 신에 싱어송라이터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나는 그중에서 드문 힙합 신의 싱어송라이터다. 그리고 음악 외적으로 봐도 활동할 때 스타일리스트도 없고, 회사가 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거나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창의력을 현실로 옮기는 일에만 몰두했다. 다른 아티스트들의 성공에는 여러 요소가 들어있기도 하지 않나. 음악을 통한 승리라고 말하고 싶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개념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생각하는 언더그라운드는 홍대의 공연장, 라이브 클럽과 같은 문화 그 자체다. 사람들은 언더그라운드와 소위 말하는 오버그라운드 힙합을 나누기도 하는데, 나는 다 힙합이고 공연하는 곳과 활동하는 곳이 언더와 오버를 가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잘되고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항상 언더그라운드에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거리에서 더 보기 쉬운 아티스트였다. 까다롭고, 숨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Meteor'를 발표했을 때, 히트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다. 오히려 작업하면서 너무 많이 듣고 익숙해지는 바람에 어떤 감각을 잃어서인지 막판에 타이틀곡으로 안 한다고 했다. 회사에서 뜯어말렸었다. 형들이 무조건 타이틀로 해야 된다고 말하더라. 형들 말을 들어보자 해서 타이틀로 냈다.

'Meteor'는 한 방에 오는 곡이었다. 힙합 신에 실력 있는 래퍼들의 작품도 잘 만들었다지만 대중적으로는 어렵게 다가오는 곡이 있는데, 'Meteor'는 아주 잘 들렸다. 그 이유를 발성과 음색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거친 스탠스?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웃음)

<Boyhood>는 첫 정규 앨범인데,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서 준비 과정이나 기간에 다른 점이 있었나? 그리고 <Boyhood>가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이전까지의 앨범들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만든 노래들이 많았다. 그런데 <Boyhood>의 곡들은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만들어 놓고 나중에 정규앨범에 내기 위해 빼놓은 곡들이 많다. 그래서 장독대에 묵은 김치처럼, (웃음) 메시지도 더 깊고 진득하게 담긴 것 같다.

본인의 래핑, 음악에 있어 앞으로 보완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메시지다. 뇌에서 생각나는 대로 바로 쓰기보다 시 같은 가사를 쓰고 싶다. 한 번 정제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그런 메시지 말이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버스(verse)와 코러스 부분이 음색 차이가 분명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새로운 피드백을 받는 걸 좋아한다. 원래는 남의 의견을 잘 안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안 듣다가는 더 새로운 걸 못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반드시 있으니. 옛날에 활동했던 밴드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그 이유가 밴드는 멤버 수가 많아서 더 창의적인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다. 공동체, 커뮤니티이니까.

최근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피쳐링 등을 통해 협업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내 음악과 피쳐링은 구분하는 편이다. 피쳐링은 나에게 있어서는 래퍼로서 폼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최근 피쳐링 제의를 많이 받는데, 그건 그만큼 래퍼로서 현재 폼이 좋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샤이니의 신곡 'Atlantis' 작사 / 작곡에도 참여했는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SM에서 나의 랩을 원한다고 요청이 먼저 왔다. 협업하려는 법도 배울 겸 멤버 민호 씨의 스타일과 목소리를 생각해서 랩 메이킹에 참여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창모를 가리켜 '랩 피지컬'이 좋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그런데 내가 랩의 '정석파'이기는 하다. 요즘 랩에서 영감을 받기보다 예전 투팍(2Pac) 같은 거장들에게 영감을 받는다. 그 사람들은 악보를 그릴 때 무조건 지켜야 하는 오선처럼 무조건 지켜야 하는 존재다. 랩 피지컬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본'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주시는 거 아닐까 싶다.

창모를 이야기할 때 오토튠을 빼놓을 수 없다. 약간 고집스러운 면도 느껴지는데, 오토튠의 강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2008년쯤에 미국과 한국에 오토튠이 붐이 일었다. 그때 15살이었는데, 거기에 많이 영감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는 노래를 잘 못 불렀는데 멜로디는 부르고 싶었고, 그걸 보정해주는 게 오토튠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음악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오토튠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는 장치 정도로 생각했다. 음이 어긋나고, 기계음처럼 들리는 것도 나이 탓인지 몰라도 자연스러웠다. 내가 부족한 싱잉 부분을 보완해줬다.

그리고 피아노를 쳤다 보니 연주를 하는 것과 음악을 만드는 것은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연주는 시간을 들이고 손을 움직이면서 노력한다는 점에서 체육 같은 면도 있는데, 많은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음악의 개념도 있다. 나도 어렸을 땐 피아노를 쳤었는데 힙합을 접하고 화성 형식도 없고 그냥 무한 반복인 걸 보고 '와, 이런 음악도 있구나.' 느꼈었다.

피아노를 치다가 힙합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작곡가들이 써놓은 걸 쳐야 하는 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걸 치기만 하는 게 음악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작곡해서 치는 게 음악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만드는 쪽에, 재현보다는 창의에 더 끌렸다.

창모의 음악은 강하게 때리는 드럼 부분이 만들어내는 타격감이 있다. 반드시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카니예 웨스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느낌이다.

그렇다. 내가 음악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에 카니예 웨스트의 영향이 7할 정도다. 카니예 웨스트의 음악에는 모든 게 다 섞여 있으니까.

카니예 웨스트를 배웠다면 음악을 어렵게 할 법도 한데 몸속에 대중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결코 어렵게 음악을 풀어내지 않는다.

내 음악이 소위 말하는 '뽕끼'가 있다고 한다. 팬들과 리스너들도 꼭 한 번씩 언급한다. 내가 학생 때는 모두가 한 장르에 빠지면 그 장르가 최고고, 타 장르나 한국에서 나오는 그 장르의 음악들은 무시하기 마련이었다. 나도 힙합에 빠졌을 때, 힙합이 좋으면서도 한국에서는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랩을 하고, 한국인의 감성이 배어있는 걸 보고 한편으로는 이건 진짜 힙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이 나누게 되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모든 걸 그냥 받아들였다.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건데 이 감성이나 내가 살아온 생활 방식이 남아있는 게 과연 나쁜 걸까. 어떻게 보면 해외 사람들이 들었을 때는 또 새로운 느낌일 테니까.

힙합 말고 다른 대중가요도 많이 듣나?

깊게는 아니지만, 한국 록을 들었다. 예전에 국내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충격을 받았던 게 들국화와 산울림이었다. 메시지에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 있는 게 좋았다. 1970-80년대 나왔던 굉장히 착한 노랫말로 만들어진 건전 가요도 신기하게 느껴진 건 한국의 시대상이 담겨 있어서였다. 앨범 하나만으로도 역사니까. 거기서 위대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걸 아예 듣지 않은 래퍼들과 다른 표현법이 나오나 보다. 거기에 카니예 웨스트, 투팍 등 외국 래퍼들의 음악도 접목되니 완벽한 창모의 스타일이 나온 게 아닌지.

맞다. 나도 그 100대 명반 리스트를 본 게 인생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시야가 넓어졌다. 한국 음악이 결코 안 좋은 게 아니고 엄청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였다.

유튜브 채널 딩고 뮤직,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등 미디어에 자주 출연한다. 그런 게 사실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에서는 경계했던 부분이다.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운지 이 부분 얘기를 들려 달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서 차트 1위에 오른 사람은 없지 않은가. 내가 음악적으로 좋은 곡을 만들고 계속 음악 생활을 하면서 마치 정원 나가듯이, 산책하듯이 그런 프로그램들에 나가면 그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한다.

'Swoosh flow'에서 UK 드릴을 선보였다. 이 곡이 속해 있는 폴 블랑코와의 협업 앨범 <BIPOLAR>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장르에 있어 한계를 두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이다.

항상 다양한 것을 하고 싶어 한다. 힙합의 태도를 가지고 만든 음악과 시도하고 싶어서 만드는 다른 여러 음악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항상 힙합의 태도를 지키고 있다. 그런 애티튜드만 있다면 장르는 내가 창의적으로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창모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중음악계의 스타로 거듭났다. 'Meteor'와 미디어를 통해 그를 접한 이들도 많겠지만, 힙합 신에서 창모가 인지도를 다지는 데에는 <돈 벌 시간 2>와 그 수록곡 '마에스트로'가 지대한 밑거름이었다. 그 무렵을 회상하며 그는 “앞길이 안 보이던 시절 '마에스트로'는 내 최후의 한방 같은 노래였다”며 노래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기에도 그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날 것의 메시지에서 오는 '리얼함'이 있었다.

그간의 미니 앨범 제목에 '돈'이 자주 언급되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를 덧붙였다. 그는 그것을 어린 시절의 생활 환경과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유년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고향 '덕소'가 가지는 의미는 그에게 생각보다 큰 듯 보였다.



오늘날의 창모를 만든 데에는 <돈 벌 시간 2>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면 'Meteor'보다 더 중요한 곡이 '마에스트로'와 '아름다워'가 아닐까.

'아름다워'는 만들어 놓은 지 좀 됐었고, '마에스트로'는 앨범 작업하면서 급하게 쓴 곡이다. 좋은 음악이 나오려면 빡세게 살아야 한다고 그러던데, 그때가 음악을 하면서 제일 막막하던 때였다. '이걸 접어야 하나'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왕 포기할 거면 마지막으로 좋은 곡을 하나 내보고 끝내자 싶은 마음으로 쓴 곡이다.

'마에스트로'의 반응은 조금 느렸는데, 그 곡이 왜 통했다고 보나?

여러 가지가 작용한 것 같다. 그 당시에 사장님들이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서 나와 계약을 하다 보니 나에 대한 관심이 쏠렸다. 그때 내가 노렸던 건 사람들이 하던 '랩 문법'을 피해서 하는 거였다. 그때 힙합 신은 그야말로 '돈 자랑'의 시대였다. 그런데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의 돈 자랑이 아닌 근본 없는 돈 자랑의 나열이었다. (웃음) 그래서 '이런 건 안 되겠다.' 생각했다. 내가 밑바닥에서 올라왔는데, 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실한 메시지를 담아서 보여준다면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흙수저'라 부르는 창모의 신분 상승 같은 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계층이 나누어져 있다. 결코 올라갈 수 없는 장벽도 우리 세대 때부터 더 심해졌다.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계급 구조를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무렵 영국 밴드들에게 영감을 받기도 했는데, 오아시스도 자기를 '워킹 클래스'라 부르고, 비틀스도 그랬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단점이 아닌 강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간 발매한 음반 제목들에서도 알 수 있지만, '돈' 이야기를 유독 많이 한다. 돈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 같은데.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있다. 내 인생을 바꾼 책 중 하나다. 그 책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재정적으로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본 한국 문화는 그랬다. 내 또래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도 어릴 때 아버지가 자주 돈 이야기 하시는 걸 보며 자랐다. 상황은 하지만 개선되지 않았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가업을 완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성공하고 난 후에는 부모님도 많이 기뻐하신다.

버클리 음대에 합격을 했는데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처럼 이렇게 뜨고 나서는 음악을 더 오래 하기 위해 꼭 버클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을 통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계획도 있는지.

뭘 배우려는 생각보다는 요즘이 협업의 시대이다 보니 음악을 만들 때 나에게 플러스 요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울타리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그런 걸 공부하고 싶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법? 곤조가 센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꾀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웃음)

만약 지금 버클리 음대를 다니고 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해본 적 있나?

해봤다. 지금처럼 못 됐을 거다. 그냥 그 나이 때 제때 대학 들어간, 그 나이 때 해야 할 것들을 했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릴 적 살았던 고향 '덕소'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주 작은 동네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이어져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친구를 잘 모르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가 내가 자주 가는 미용실 원장님의 아들이었다던가. (웃음) 그리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던 건 관심사가 비슷했다. 옷 좋아하고 랩 좋아하고. 친근한 작은 커뮤니티, 공동체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학창 시절 밴드를 했다고 들었다. 밴드를 했을 때의 감성이 지금 창모의 음악과 연관이 있는지.

밴드에 들어갔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들어갔는데, 피아노도 치고 했으니 여자애들에게 이름도 알릴 겸, 공연도 할 겸 그렇게 들어갔다. 당시 나는 힙합 키드여서 밴드 형들이 하는 연주가 신선했다. 그리고 그 무렵 서태지를 제대로 알게 됐다. 기타 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옛날 록 음악의 기타 리프들을 들으면서 멜로디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 같다. '힙합 비트 루프를 만들 때도 이런 멜로디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피아노, 밴드 두 가지를 경험하며 그러한 확신을 얻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만든 곡 중 대중들에게는 덜 알려졌는데, 나에게 자랑스러운 곡이 있다면?

달달한 노래다. <닫는 순간>에 수록된 'Interlude'. 2분짜리의 짧은 곡인데 그게 나의 감정도 잘 담겨 있고, 멜로디도 괜찮고, 노래의 독창성도 있다. 그래서 애정이 간다.

단순하게 '마에스트로'와 'Meteor'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마에스트로'. 이거는 나의 사소한 고민이었는데, 'Meteor'의 발음이 완전 한국식이다. 그런데 적어도 훅에 나오는 영어 단어만큼은 영어 발음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웃음) 멋있어 보이게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Meteor'는 유성, 별똥별이라는 뜻인데 분명 여기에도 메시지를 담은 것 같다. 'Meteor'의 정확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박히게 된다'라는 뜻이다. 내가 사람들이 원하는 스타상은 아닐지라도, '너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차트도 점령하고 너희 거리 주변에 다 나오게 해줄게'. 이런 승리의 표현이다.

창모는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래퍼이기도 하지만 프로듀서로서 다른 래퍼들을 지원하거나 그들에게 비트를 줘본 적이 거의 없다. 프로듀서 창모로서 다른 래퍼들을 키워보거나 발굴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있다면 작업해보고 싶은 래퍼는?

나는 내가 2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프로듀서로서 '래퍼 창모'에게 맞춰 그 사람을 프로듀싱 해 1위 가수로 만들었다. 이제 '창모 프로듀서'는 완성이 된 거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아티스트의 프로듀싱도 도전하려고 한다. 작업하고 싶은 래퍼는 어린 래퍼들. 왜냐하면 내 음악도 그 친구들이 들었을 때는 신선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어린 친구들이 만족한다면, 내가 여전히 'Fresh' 하다는 거 아닐까.

<고등래퍼 4>에서 앞으로 회사를 만들어 사장이 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어떤 포부에서 한 말인지 궁금하다.

항상 뭔가를 이루려면, 미리 그 마인드로 살아야 한다는 게 나의 좌우명이다. 혼자 마음속으로 이미 사장 놀이를 하고 있다. 레이더에 있는 래퍼들도 있다. 하지만 다른 회사가 낚아채 갈 수도 있으니 말하지는 않겠다. (웃음)

래퍼가 꿈인 팬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가 앨범을 제대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반응도 얻을 때쯤에는 20대로서 삶을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와 가사를 쓸 수 있었고 그게 전달이 된 거다. 요즘에는 랩만을 잘하려고 랩 레슨을 받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랩에서 중요한 것은 삶이고 그것을 담는 것이다. 래퍼가 되려면 막살든, 잘 살든 생각을 할 수 있게 일단 살아봐야 한다.



나를 음악인, 래퍼, 프로듀서로 만든 앨범이나 가수가 있다면.

카니예 웨스트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다. 예술이라는 걸 그때 접했다. 그전에도 음악을 들었지만, 포괄적으로 비주얼, 음악, 퍼포먼스, 그리고 약간의 허세까지 모든 게 들어가 패키지화되어있다. '이게 예술이야'라는 걸 알려준 앨범이다. 그리고 카니예 웨스트의 <Yeezus>. (웃음) 투팍 노래 중에서는, 'All about you'를 꼽겠다. 그 곡이 약간 지 펑크(G-Funk) 스타일의 말랑한 곡인데, 거기서 힙합 문법을 이해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가사를 보고 놀랐다. 노골적이면서도 그 나름의 달콤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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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를 역주행한 팝 9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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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행은 차량이 달리는 방향과 반대로 달리기 때문에 위험하지만 음악에서 역주행은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가수나 노래가 뒤늦게 인기를 얻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음악계의 역주행은 기분 좋고 안전하다. 그런데 이런 은혜로운 상황이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미국에도 꽤 많은 노래들이 다행히 부활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역주행 리스트의 기준은 처음 발표했을 때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노래이기 때문에 플리트우드 맥의 'Dreams'나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Unchained melody', 로이 오비슨의 'Oh! pretty woman'처럼 처음 공개했을 때 더 높은 인기를 누렸던 곡들은 과감하게 제외했다.



홀 앤 오츠(Hall And Oates) 'She's gone'(1973)

1980년대에 'Kiss on my list', 'Maneater', 'Private eyes', 'I can't got for that' 같은 명곡을 배출한 대릴 홀과 존 오츠의 첫 번째 히트 싱글이다. 백인임에도 묵직한 소울 발라드를 구사한 이 듀엣은 1973년 말에 'She's gone'을 발표해서 이듬해에 빌보드 싱글차트 60위를 기록했다.
이후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RCA로 이적한 홀 & 오츠가 발표한 'Sara smile'이 빌보드 싱글차트 4위에 오르자 배가 아팠던 애틀랜틱은 'She's gone'을 다시 싱글로 발표해서 빌보드 싱글차트 7위 곡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재활용의 좋은 예. 이후 'Rich girl'로 빌보드 정상을 밟은 홀 & 오츠는 그 여세를 몰아 1980년대에 가장 성공한 듀오로 입지를 다졌다. 이 모든 성공의 출발점은 바로 'She's gone'이다.



에어로스미스(Aerosmith) 'Dream on'(1973)

1973년에 공개한 데뷔앨범의 첫 싱글로 당시에는 빌보드 싱글차트 59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고향인 보스턴의 지역 라디오는 'Dream on'을 줄기차게 틀어댔다. 덕분에 에어로스미스는 고향 보스턴과 매사추세츠 주에서만큼은 '떠오르는 스타'가 아니라 이미 '떠오른 스타'였다.

2년 후인 1975년에 공개한 3집은 모든 걸 바꿨다. 이 앨범에서 'Walk this way'와 'Sweet emotion'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자 음반사인 컬럼비아 레코드는 재빨리 데뷔곡 'Dream on'을 다시 싱글로 발매해 빌보드 싱글차트 6위를 기록했다. 이후 보컬리스트 스티븐 타일러와 기타리스트 조 페리의 불화로 부대낌을 겪은 에어로스미스는 1987년에 발표한 <Permanent Vacation>으로 부활해 현재까지 아메리칸 록을 상징하는 밴드로 생존해 있다. 심지어 에미넴이 'Sing for a moment'에서 'Dream on'을 샘플링하기도 했으니까.



샬린(Charlene) 'I've never been to me'(1977)

이 곡도 에어로스미스의 'Dream on'처럼 라디오의 지원사격을 받아 역주행에 성공했다. 1977년에 빌보드 97위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곧바로 사라진 'I've never been to me'를 좋아했던 전직 모타운 직원 출신으로 지역 방송국 디제이였던 스코트 섀넌은 샬린이 모타운과 재계약을 하도록 도움을 줬고 이 곡은 1982년에 재발매 되어 빌보드 싱글차트 3위까지 진격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곡 분위기와 달리 노래 내용은 한때 화려하고 허세에 찌든 삶을 살았던 중년의 여자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닮은 여인에게 충고해 주는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다.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solitary man'(1966)

자기 얼굴을 앨범커버로 대문짝만하게 내건 대표적인 가수는 필 콜린스와 닐 다이아몬드다. 차이점이 있다면 두 사람의 외모. 1970년대 가장 성공한 싱어송라이터 닐 다이아몬드를 상징하는 'Solitary man'은 1966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55위를 기록한 그의 첫 번째 차트 진입곡이다.

당시엔 큰 인기를 누리진 못했지만 이후 'Cherry cherry', 'Girl you'll be a woman soon', 'Holly holy', 'Sweet Caroline'이 성공을 거두자 음반사는 1970년에 'Solitary man'을 다시 발표해서 빌보드 싱글차트 21위까지 올랐다. 이후 이 노래는 히트곡이 많은 닐 다이아몬드의 시그니처 송으로 영구 박제됐다.



포인터 시스터스(Pointer Sisters) 'I'm so excited'(1982)

영국 걸그룹 걸스 얼라우드가 리메이크 했던 'Jump (For my love)'의 주인공인 친자매 트리오 포인터 시스터스가 1982년에 발표한 이 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30위를 찍고 하락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4년에 'Jump (For my love)'와 은지원이 커버했던 'Automatic'이 연속으로 히트하자 아쉬움이 남았던 'I'm so excited'를 살짝 리믹스해서 부활시켰다. 결과는 대성공.

빌보드 싱글차트 9위까지 상승해서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룬 'I'm so excited'는 'Jump', 'Automatic'과 함께 그해 그래미에서 포인터 시스터스에게 최우수 팝 보컬 그룹 트로피를 수상하는데 힘을 보탰다.




빌리 베라 & 더 비터스(Billy Vera & The Beaters) 'At this moment'(1981)

1987년 초에 음악 관계자들에게도 낮선 가수의 노래가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것도 라이브 실황이. 어리둥절했지만 그 의문은 곧바로 해소됐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마이클 제이 폭스가 출연하던 시트콤 <패밀리 타이즈>에 이 노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10대 후반이었던 1962년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한 빌리 베라는 1981년에 'At this moment'를 발표했지만 빌보드 싱글차트 79위를 정점으로 금방 하락했다. 컨트리 팝과 뉴웨이브가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던 1980년대 초반에 약간은 청승맞은 알앤비와 재즈, 카바레 음악 스타일이 혼용된 'At this moment'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비좁았다. 결국 시트콤의 지원사격으로 발표 6년 만에 빌보드 넘버원을 찍었지만 더 이상의 후속곡이 없는 빌리 베라 & 더 비터스는 원히트원더 가수로 남았다.



제임스 인그램 & 패티 오스틴(James Ingram & Patti Austin) 'Baby come to me'(1981)

알앤비 가수 패티 오스틴이 1981년에 발표한 앨범 <Every Home Should Have One> 수록곡으로 1982년 4월에 싱글로 커트했지만 빌보드 싱글차트 73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그렇게 묻힐 수 있었던 이 곡 역시 텔레비전 드라마 <제네럴 호스피털>에 등장하면서 역류를 시작해 1983년 2월에 싱글차트 넘버원에 올랐다.

영국의 펑크(Funk) 밴드 히트웨이브의 리더 출신으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Off the wall', 'Rock with you', 조지 벤슨의 'Give me the night' 같은 명곡을 작곡한 로드 템퍼튼이 만든 'Baby come to me'는 세련된 도시적 분위기를 반영한 어반 알앤비를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다양한 가수들이 커버해 곡의 완성도를 인정하고 추앙했다. 이 중에는 박진영도 있다.



퀸(Queen) 'Bohemian rhapsody'(1975)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노래다. 1975년에 발표돼서 빌보드 싱글차트 8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금지곡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1990년대 초반에 그 족쇄에서 풀렸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Bohemian rhapsody'는 금단(禁斷)의 노래였다.

1991년 11월 24일에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추모 분위기가 형성됐고 미국에서는 1992년에 다나 카비와 마이크 마이어스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 <웨인스 월드>에 'Bohemian rhapsody'가 삽입되어 빌보드 싱글차트 2위까지 올랐다. 영화 <웨인스 월드>에서 얼간이 5명이 자동차 안에서 헤드뱅잉을 하는 그 유명한 장면은 신드롬을 일으키며 이후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패러디 소재로 활용됐다.

2018년에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설득했던 음반사 사장 역을 맡은 배우가 마이크 마이어스가 이런 대사를 읊는다. “차 안에서 'Bohemian rhapsody'를 들으면서 머리를 흔드는 사람은 없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성공으로 이 노래는 2018년에 세 번째로 빌보드 싱글차트에 올라 33위를 기록했다. 'Bohemian rhapsody'는 불멸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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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밀스 “에너지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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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밀스는 수많은 대체재가 범람하는 힙합 신에서도 독자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개인 작업물을 비롯한 여러 협업으로 독특한 존재감을 피력하고,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활약을 펼치며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본인만의 영역을 꾸려 나갔다. 그가 추구한 노선은 유일무이한 캐릭터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초창기 레이블의 성장에 실질적인 양분을 제공했다.

하지만 성장한 것은 레이블뿐이 아니었다. 그저 '기세로 덤벼들었다'는 말처럼 신인의 저돌적 포부를 내비치던 '88'의 그는 대중과의 극적인 '화합'을 거치고 완성형의 '미래'와 조우하며 본인만의 고유 문법을 정착해 나갔다. 그리고 정규 2집 <F.O.B>는 한층 정돈된 모습을 가져오며 또 한 번의 성장을 선언한다. 서교동에 위치한 비스메이저 컴퍼니, 야심에 찬 복귀만큼이나 할 말이 쌓여 있던 그를 만나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전역 후 싱글과 정규 앨범 발매는 물론 <딩고 프리스타일>과 <랩하우스 온에어>, 그리고 <마이크 스웨거>까지 출연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허슬하는 배경이 있을까.

사실 매일매일 일정이 있는 건 아니다. 스케줄이 잡힐 때만 조금 정신이 없지, 나머지는 집에 있거나 운동을 하며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낸다. 일단 군대에 간 동안 2년을 쉬었으니까 시간이 아깝더라. 피처링 제안이 들어오면 웬만해서 다 하려 하고, 개인적인 작업물도 내면서 올해는 내 목소리가 쉬지 않고 계속 나오게끔 할 예정이다. 사실 이런 게 좀 당연한 건데 조금만 쉬어도 게을러지니까. 근데 요즘 또 작업하는 게 재밌어서 최대한 많이 할 수 있을 때 하고 있다.

평소에도 규칙적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 스타일인지.

속으로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운동 가기 전에 정신도 좀 깨고 싶은 게 있다. 근데 막상 일어날 때가 되면 졸려서 마음처럼 잘 안되더라. 제대하고 나서 일주일은 여섯 시 반에 자동으로 기상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기억도 안 날 정도다. 어떻게 새벽에 깨서 야간근무도 나가고 아침에 깨서 뛰고 소리 지르고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국군장병 여러분들, 참 대단하다.

신병훈련소 종교 활동에서 부른 '88'의 영상 조회 수가 벌써 80만을 넘어가고 있다. 많은 분들이 던밀스의 군 생활에 대해 궁금해할 것 같다.

너무 재미있었다. 포병으로 복무하면서 탄을 운동 삼아 들곤 했다. 사실 그때 군기가 바짝 든 내 모습에 취해있었다. 처음 신병 위로 휴가를 나가서도 3박 4일 동안 전투복을 입고 다녔을 정도다. 근데 이제 상병 분대장 정도 되니까 짬이 좀 차더라. 주머니에 손도 들어가고.

군대에서 음악 생각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작업에 대한 구상도 틈틈이 이뤄졌나.

군대가 일과시간에 단 1초도 쉬지 않고 뭔가를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쉬는 시간이 있고, 청소를 하다가도 해이해지는 시간이 생긴다. 자주포 안에 수첩이 항상 있었다. 선임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겨졌을 때 머릿속으로 BPM을 상상하면서 랩도 해보고, 가사도 많이 썼다.

최근 결혼 소식을 발표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이후 삶의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코로나 때문에 혼인신고만 해놓고 아직 식을 올리지 못한 상태인데, 자연스럽게 같이 지내게 된 터라 인생에 있어 크게 달라진 점은 잘 모르겠다. 요즘 밖에 나가질 못하니까 집에서 같이 넷플릭스 보고, 칵칵대며 웃고, 살 빼야 한다고 말하다가도 어떤 음식을 시켜 먹을지 고민하면서 보내곤 한다. 그야말로 신혼의 삶을 즐기는 어린 부부인 셈이다. 나중에 저스틴 비버와 헤일리 비버처럼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데 아직은 참고 있다. 또 내가 한국의 저스틴 비버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중에 'Peaches' 같은 곡을 기대해봐도 될까.

'복숭아쓰'로 해보겠다. 천도복숭아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특히 넉살 팬들이 경악했다고.

코로나가 없던 시절, 군대 휴가를 나가 혼인신고를 마치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VMC 멤버를 모아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고깃집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는데 다들 갑작스러워하더라. 지금이야 멤버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기혼자가 거의 없었으니까. 군대를 한 번 떠나보냈더니 여기서 또 한 번 더 떠나보낸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비록 내가 넉살과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웃음) 영원한 동반자로서 서로 부족할 때 채워주는 관계로 남을 테니 팬분들 너무 섭섭하지 말아달라.

앨범의 제목을 '북미 대륙에 막 내린 이민자'를 뜻하는 슬랭, 'Fresh off the boat'로 지었다. 이유가 있을까.

처음 유학을 갔을 때는 영어를 아예 할 줄 모르고, 한국말처럼 발음하니 'fob'이라는 단어에 예민해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를 봤을 때 '한국에서 이제 막 온 친구네' 이런 시선보다는 겉모습은 동양인이더라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2세처럼 보이고 싶었던 거다.

앨범을 준비하면서 여러 제목을 생각해 봤고, 결국 내가 살면서 가장 예민하게 생각했던 그 단어로 제목을 정하게 됐다. 군대에 있다가 사회로 다시 복귀했을 때 이 사회 입장에서는 갓 전역한 내가 '뜨내기'다.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으로서 'Fresh off the boat'라는 말을 떠올렸고, 캐나다에 살 때 있던 일들과 느꼈던 감정을 가사로 풀어냈다. 그러다 보니 앨범의 서사가 만들어졌다.

유독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캐나다와 한국을 필두로 서사를 풀어낸 뒤, 노래방과 플스방 등이 세부적으로 등장하고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오는 구성이다.

처음부터 자세하게 구상한 건 아니고, 그냥 한 곡씩 작업하다 보니 퍼즐처럼 맞춰졌다. 앨범이 80% 완성됐을 때 여기에는 이런 주제가 필요하겠다 싶어 추가한 곡도 있다. 'Home sweet home'이 그런 경우다.



정규작으로는 <미래> 이후 5년 만이다. 앨범의 준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훈련소 때부터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앨범을 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F.O.B.>에 들어간 곡 중 군대에서 쓴 가사는 '다시 서울'밖에 없다. 이 트랙만 휴가 때 녹음을 해서 완성했고 나머지는 전부 작년 9월부터 만들었으니 제작 기간은 5~6개월 정도인 셈이다. 도중에 고민을 많이 했다. 풀어내는 스타일을 바꿔볼까 싶어 여태까지 하지 않은 랩을 한번 해봤는데 뭔가 이상하고 나에게 잘 묻지도 않고, 소위 '야마'가 없더라. 그래서 깔끔히 정리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시 시작했다. 그 후로는 술술 나왔다.

'F.O.B. Interlude'의 외국인 승무원 역할을 화지가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원래 예정에 없던 트랙인데, 딥플로우 형과 앨범을 공유하면서 'Fresh off the boat' 앞에 유기성을 위한 스킷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아이디어를 주고받다가 입국심사 느낌으로 해보면 어떨까 해서 나오게 된 곡이다. 입국심사는 받아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혼자서 1인 2역을 하면 너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그래서 영어가 유창한 멤버를 찾았고, 로스는 이미 피처링에 참여했으니 화지가 한번 해보면 재밌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Fresh off the boat'에 참여한 로스 역시 교포 출신이다. 의도가 있는 기용인가.

원래 로스와 작업을 하게 된 건 단순히 내가 웨스트 코스트 힙합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다. 1집 <미래>에도 'That shit'이라는 웨스트 코스트 풍의 비트가 있고, 또 이런 랩을 한국에서 제일 멋있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로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둘 다 절묘하게 외국에서 온 공통점이 있다 보니 'Fresh off the boat'에 맞는 가사와 곡이 나왔다.

타이틀곡 '대박인생'의 경우에는 피처링 라인업이 상당히 독특하다. 노스페이스갓(Northfacegawd)과 언에듀케이티드 키드(Uneducated Kid)와는 어떻게 협업하게 되었나. 혹시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까.

'대박인생'은 앨범이 완성되고 추가로 한 두 곡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작되었다. 공연장에서 많은 분과 재밌게 떼창을 할 수 있는 곡이 필요했고, 평소 하는 말 중에 알아듣기 쉬운 단어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조금 위트있는 느낌의 '대박인생'이란 말을 떠올렸다. 원래 혼자 하려 한 곡인데, 녹음을 다 하고 들어보니 미니멀한 비트에 내 목소리만 계속 나오니까 너무 지루하더라.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어 2절을 날려버리고 이 'B급 감성'과 어울릴 만한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와 노스페이스갓에게 연락을 했다.

노스페이스갓과의 작업은 원테이크로 끝났다. 작업실로 데려온 뒤 테스트 삼아 한번 녹음을 해봤는데, 쭉쭉 해보더니 결과물이 너무 괜찮더라. 그래서 그대로 마무리했다.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같은 경우에는 따로 녹음을 해서 보내줬다. 보통 나는 피처링 작업을 할 때 음원이 이상하거나 박자의 싱크가 맞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좋다고 하는 편이다. 언에듀에게 초안을 보내고 '저녁에 피드백을 드려도 될까요'라는 답장이 왔길래 바쁜가 싶었는데, 생각했던 그 친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긴 문장들의 피드백이 쌓여서 와있더라. 신경을 많이 써줘서 너무 고마웠다.

일각에서는 이런 음악을 소위 '멍청트랩'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내가 2014년도 데뷔하면서 기세로 막 덤벼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다. 그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랩을 구사하는 래퍼들이 많았고 내가 '강백호', '88' 같은 약간 무식하고 단순한 가사로 밀어붙이니 그런 반응이 나온 셈이다.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랩을 했기에 이런 '멍청트랩'이라는 말을 나쁘게 듣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류의 트랩 음악에 먼치맨이나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노스페이스갓 같은 친구들이 꼽히곤 하는데, 사실 이 친구들은 전혀 멍청하지 않다. 정말 철저하고 똑똑한 친구들이다.

던밀스라는 아티스트의 장점은 접근성 높은 훅 메이킹이나 특유의 감칠맛 나는 래핑 등이 있지만, 그 바탕에는 '기세'와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치지 않는 에너지의 비결이 있다면.

사실 나도 지친다. (웃음) 처음 랩을 시작할 때는 '내가 랩을 세상에서 제일 잘한다, 누구든지 데리고 와보라'는 과잉된 자신감이 있었기에 거기서 에너지가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을 깨닫게 되더라. 특출나게 가사를 잘 쓰는 편도 아니고, 나보다 잘하는 래퍼도 많고, 그렇다고 음악 스펙트럼이 넓은 것도 아니니까 내가 뽐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남들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육체적으로는 안 밀리지 않나. 이걸 음악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으로 뭐든 열심히 하고 있다. 운동이든 음악이든.

그러다 보니 캐릭터에 많이 집중하게 된다. 약간 덩치가 있고 터프한 음악을 하는 래퍼로 더 게임(The Game)이나 50센트, 그리고 지금은 안타깝게도 하늘의 별이 된 군대에 있을 때 좋아하던 팝 스모크(Pop Smoke)가 있지 않나. 나도 영상에 나올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생각한다.

그런 에너지가 잘 담긴 트랙이 'MVP'라 생각한다. 공연장에서 듣고 싶을 정도다.

아까 말한 대로 '대박인생'과 같이 나중에 추가된 곡 중 하나가 'MVP'다. 약간 조금 템포가 빠른 트랩을 하고 싶어서 버기(Buggy)에게 부탁했는데, 어느 날 버기가 쥬시 제이(Juicy J)의 앨범을 듣고 필이 꽂힌 거다. 신나고 빠른 느낌의 BPM의 초안이 만들어졌고 약간 구호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농구에는 경기 때 제일 잘한 선수가 공을 잡으면 관중들이 'MVP'라 외쳐주는 찬트 문화가 있다. 내가 어릴 때 농구를 좋아하기도 했고, 'MVP'라는 훅을 만드니 버스(Verse)도 금방 나오더라. 그렇게 완성된 곡이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공연장에서 화끈하게 했을 거다.

아이디어가 결과물로 바로 나오는 스타일 같다.

합이 맞으면 바로바로 되는 편이다. 나 혼자는 한계가 또 있으니까. 근데 요즘은 비트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번 '망나니 Freestyle'이라는 트랙은 직접 초안을 만들고 랩까지 전부 한 다음에 편곡 단계에서 홀리데이(Holyday)의 도움을 받은 곡이다. 이제 싱글을 낼 때 웬만하면 내 비트를 많이 써볼 예정이다.



이번 작품에서 넉살과 함께한 '다이나믹 듀오'를 짚지 않고 넘어갈 수 없겠다. 오랜 기간 다져온 둘의 케미스트리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나.

지금까지 넉살과 둘이서만 한 곡이 없더라. 'Ye I need'는 오디가 참여했고, '얼굴 붉히지 말자구요'는 뱃사공이, 그리고 '브라더'는 로스가 참여했다. 요즘 <궁금한 나라의 넉밀스>도 같이 진행하면서 둘이 힙합 노부부로 불리기도 하고, 단지 보여주기식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넉살과는 오랜 역사도 있고 곡으로 풀어내면 재밌을 얘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만나게 된 일화를 다뤘다. 후에 개코와 최자에게 다이나믹 듀오 이름을 빌려도 되는지 물어봤고 감사하게도 허락해 주셨다. 샤라웃 투 개코 최자.

만남이라면 '영 노래방'에서의 디보를 빼놓을 수 없다.

내 기억에 그때 디보가 열아홉 살이었고 내가 스물세 살이었을 거다. 처음에 어떤 학교에서 선생님께 랩 하는 친구라고 소개를 받아 만나게 되었고, 서로 얘기를 나누다가 가사 쓴 적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하길래 알려주면서 친해지게 됐다. 마음도 잘 맞아서 사람을 모아 '크라운 타운'이라는 크루를 결성했다. 당시 토론토에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영 노래방이 있었는데, 노래방 뒤에 매주 모여서 프리스타일 랩과 사이퍼를 즐겨 했다. 그때 디보의 랩은 정말 독특했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같이 녹음도 하고, 거기서 이 곡의 프로듀서인 DZ도 만났다. '붕어빵 팔던 소년 이제 beat 팔아'라는 라인이 그의 이야기다. 그때 아르바이트로 붕어빵을 팔던 DZ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번 <F.O.B.>는 많은 프로듀서가 참여했는데도 유기성이 굉장히 좋다. 사람이 많으면 조율 과정이 어려울 텐데.

조율 과정에서 한 명씩 만났다. <미래> 앨범부터 같이 작업을 해온 라우디(Raudi)와 군대에서 알게 된 아민서울(Imeanseoul)과는 군 복무 중에도 연락을 정말 많이 주고받았다. 둠스데이(Doomsday)에게는 웨스트 코스트 풍의 비트를 직접 요청했고, 홀리데이는 내가 옆에서 많이 괴롭혔다. TK는 '88'부터 함께 해왔으니 말할 것도 없다. 아마 사전에 다져 놓은 팀워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전부 기존에 다 알던 친구들이니까. 나 혼자는 이렇게 못했을 거다. 다들 너무 고맙다.

웹 예능과 미디어에 많이 출연하다 보니 캐릭터가 확실하지만, 오히려 그만큼 기믹이나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맞다. <F.O.B.>를 내고 나서는 좀 덜한데, 예를 들어 옛날에는 던밀스가 피처링에서 기가 막히게 했다는 글이 올라오면 '던밀스 노래 왜 듣냐, 딱딱해말고 뭐 있냐'는 반응이 있었다. 처음에는 열 받았다. 'Tough cookie' 같은 싱글을 냈을 때 실력도 없는데 인맥 힙합이냐는 말이 많았다. 가끔은 억울하고 자신감도 떨어지곤 했는데, 결국 더 보여줘야 싶더라. 내가 또 그런 나쁜 글 쓰는 사람들의 생각을 돌려놓기 위해 음악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좋아서 시작한 거고, 어차피 날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가 뭘 하던 싫어할 테니 그냥 신경 끄고 날 좋아해 주는 분들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신경 쓰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건가.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귀여운 걸 자주 본다. 집에 강아지를 기르는데, 이름이 붓따다. 몸무게가 30kg인데도 너무 귀엽다. 붓따를 보면서 마음을 정화한다.



<F.O.B.>를 준비하면서 가장 공들여 만든 트랙이 있을까.

'망나니 Freestyle'. 내가 만든 비트로는 세상에 처음 공개가 되는 곡이다. 그리고 내가 래퍼다 보니 믹스할 때는 항상 목소리 위주로만 신경을 썼는데, 이 곡은 비트도 목소리도 전부 내 거니까 전반적인 부분에서 내가 의도한 사운드가 잘 들리는지가 중요했다.

만들면서 영향을 받은 게 있다면.

일단 와이프가 영감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곳인 토론토도. 앨범에 과거 모습과 학교 다닐 때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농구 인생을 살았는데 또 앨범에 'MVP'라는 곡이 있고, 아마 현재까지의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앨범일 거다. 사실 내가 태어난 시절부터는 없지만, 한 고등학교 3학년부터의 랩 라이프가 담겨있는 셈이다. 차후작은 아직 계획이 없다. 프로젝트 성으로 앨범이 나올 수도 있고, 아마 몇 년 후 아기가 생긴다면 또 재밌는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인사 부탁한다.

사실 <F.O.B.>를 다섯 번 이상 쭉쭉 듣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항상 좋은 앨범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메시지 보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매일 고민한다. 공연을 하면서 재밌게 공유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까. 어쨌든 건강하게 이 시기를 잘 버티고 이겨내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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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이브 펑크 “고군분투한 시절, 로맨스로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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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앨범 한 장을 뽑으라면, 단연 그 주인공은 <Di-Ana>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상 악기와 샘플링을 배제하고 모든 소스를 직접 연주'했다는 공격적인 문구 아래, 편리함에 마비되어가는 음악계를 향해 반발감을 당당히 내비친 이 문제적인 작품은 아날로그의 비연속성 색채와 순수한 창작력이라는 통속적인 무기만으로 현존하는 음악 시장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다. 예술가의 뚜렷한 목표 의식이 반영된 <Di-Ana>의 극단적 태도 속에서 우리는 순도 높은 숭고함을, 그리고 본인이 설계한 과업을 멋지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기 드문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 프로듀서가 갖춰야 할 '멋'을 진정 추구할 줄 아는 낭만주의자, 얼라이브 펑크(Alive Funk)를 만나 그의 방대한 음악 세계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IZM을 보는 독자분들에게 간략한 소개 부탁한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얼라이브 펑크(Alive Funk)입니다. 블랙 뮤직의 코어가 되는 알앤비와 디스코, 그리고 힙합 외에도 UK 신스팝 같은 다양한 장르를 계속 연구하고 실험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한 건 중학교 때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면서부터다. 우선 밴드는 약속이 정말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합주를 해도 시간이나 인원 같은 조건이 맞아야 하고 이에 따른 변수가 많다. 그러던 도중, 문득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작곡에 도전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더 잘해지고 싶어 연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굉장히 수동적인 내가 딱 하나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능동적으로 하는 게 바로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라이브 펑크의 음악을 논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게 멀티 인스트루멘탈에서 비롯된 넓은 스펙트럼이다. 이 다양한 악기들은 어떻게 익히게 되었나.

물론 베이스 기타를 치긴 했지만, 그 외에도 다른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드럼이나 일렉 기타, 혹은 키보드라던가. 일단 기본적으로 밴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또래 남학생들은 게임을 하거나 노래방을 많이 가지 않나. 나는 그것보다 악기를 만지고 좋아하는 곡을 카피해 연습하는 게 더 재미있었고, 그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 같다.

그 당시 주로 듣던 음악이 뭐가 있을지.

내 세대라면 많이 공감할 텐데 밴드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엑스 재팬(X-Japan)이다. 최초로 산 앨범이 그들의 베스트 CD다. 이후 멜로디 메탈에서 스트라토베리우스(Stratovarius) 같은 강력한 스피드 메탈로 넘어가다가, 나중에는 영국 쪽의 라디오헤드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음악을 따라 하면서 기본적인 믹스나 사운드 구조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힙합 음악은 언제부터 접하게 되었나.

우선 나는 딱히 장르를 정해 놓고 하나만 듣는 편은 아니다. 그 당시 처음으로 접한 가장 흑인 음악에 가까운 음악이 한국에 나온 아소토 유니온의 1집 <Sound Renovates A Structure>다. 처음에는 강력한 헤비메탈이나 일명 멜스메(멜로딕 스피드 메탈)에 비하면 사운드가 다소 심심하기도 하고, 흔히 쓰는 표현인 '그루브'가 잘 느껴지지 않더라. 근데 점점 듣다 보니 눈을 뜨게 되고, 아소토 유니온과 함께 작업한 다이나믹 듀오를 거쳐 에픽하이를 듣게 되고, 조금 더 파고들어 소울 컴퍼니와 빅딜 레코즈의 음악을 접하면서 블랙 뮤직에 완전히 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메이카 리듬이나 NY 브루클린에서 비롯된 붐뱁 리듬같이 다양한 뿌리가 뻗어 나가면서 서로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 여러 장르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고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정규 1집 <DI-ANA>에 실린 도발적인 앨범 소개가 화제를 끌었다.

예전에 쓴 문구가 비난의 어조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원했던 것은 '그 방법을 쓰지 마라'가 아닌 프로듀서의 양심에 대한 토론이었다. 확실히 스플라이스나 프라임 룹스, 룹질라 같은 좋은 사이트가 많이 생겨났고, 그만큼 음악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이트를 이용하다 보면 나조차도 이 곡이 정녕 내가 만든 게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데, 이는 그 시점에서 이미 양심의 가책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만약 방금 언급한 그런 것만을 가지고 음악을 생산하는 사람이 이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고 창작이라 말한다면, 물론 거기에 대해서는 존중을 표할 것이다. 그저 이 주제에 대해 꼭 한번 토론을 해보고 싶었다.

작품의 제목을 'Di-ana'로 택한 것이 'Di'와 'Ana'에 각각 다이(Die)와 아날로그(Analogue)라는 의미를 가져와, 아날로그를 배척하는 현 음악 신의 흐름을 고발하려는 의도로 알고 있다. 심지어 작업 과정에서 전부 직접 연주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특수한 제작 방식이 힘들지는 않았나.

기본적으로 가상 악기나 루프를 쓰지 않으려면 구축된 하드웨어 장비로만 작업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제한적인 방법이다. 한 마디로 지금 가진 신시사이저와 기타 이펙터만 가지고 곡을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런 방식을 택한 것은 작품을 만들 때 극한에 한번 놓이고 싶었고, 그런 환경에 닥쳤을 때 어떤 음악이 나올지에 대해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장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작업하다 보면 래퍼마다 요구하는 사운드 어프로치(Approach)가 각각 다를 때가 있다. 트랩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UK 드릴과 미국 드릴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가 무엇이 되고 어떻게 접근하든 간에 언젠가 작품을 꺼냈을 때 분명 아쉬움이 남을 거라 생각했고, 그럼에도 첫 커리어를 장식하는 앨범인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상징성을 남기고 싶었다. 예전 유튜브에서 루드윅(Ludwig Göransson)이라는 프로듀서가 차일디쉬 감비노의 'Redbone'을 실시간으로 메이킹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기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았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섞인 앨범 같다. 오히려 확장성보다 제한된 상황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로 보면 맞다. 제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니 하드웨어 하나를 가지고도 면밀히 연구하게 되더라. 그리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경우에는 증명하는 과정이 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내가 그런 능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가치 있는 뮤지션임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과거에 사용하던 작법과도 많이 달랐을 텐데.

일단 가상 악기는 편의성이 좋다. 작업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데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피아니스트처럼 보이게 해주는 게 미디(MIDI) 시스템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번 작업을 통해 가상 악기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날로그 소스는 한번 녹음해서 기록해도, 다음 날 일어나서 프로그램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요즘 다시 바이닐 붐이 일어나는 걸 보면 아날로그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Di-Ana>를 들을 때는 여타 앨범과는 달리, 건조한 기타 리프와 베이스가 가진 잔향, 혹은 신시사이저 루프 하나하나에도 집중하게 된다. 무엇보다 많은 아티스트가 참여했음에도 통일감이 우수하다. 전반적으로 그루비하고 늘어지는 로파이 톤의 사운드가 주축이 된다.

앨범을 구상하는 프로듀서라면 모두 직면하게 될 문제인데, 여러 플레이어와 작업을 하게 되면 사람마다 가진 이미지가 다른 만큼 그들이 쓰는 미장센이나 장치가 다른 경우가 많다. 어쨌든 나는 앨범에 열다섯 곡이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앨범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아무래도 그걸 조금 상쇄할 수 있던 건 모든 곡의 주제와 테마를 내가 직접 정해서 요청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평소 산문집을 좋아하기도 하고, 피처링 의뢰를 하기 전에 에세이를 써서 먼저 드리는 습관이 있다. 이 곡의 내가 생각한 오브제는 이렇고, 이걸 읽고 작업에 임해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이게 완전히 맞을 때고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전혀 맞지 않더라도 이의는 제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기본적인 오브제를 상대에게 제시했을 때, 단어나 내용 같은 부분까지 검열하게 되면 표현의 자유를 막는 거고, 단순 '내가 보컬이 아니기 때문에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라는 의미밖에 더 되나.

로파이 질감과 그루브한 면은 평소 듣는 음악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예상한다. 스톤 스로우 레코드(Stones Throw Record) 소속의 댐 펑크(Dam-Funk)나 제이 딜라(J Dilla), MF 둠(MF DOOM), 매드립(Madlib) 같은 뮤지션의 음악을 자주 들은 게 믹스 과정에서 작용하지 않았을까. 평소 이런 오버 프레싱 기법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마인드 컴바인드가 있겠다.

사실 <DI-ANA>가 취한 접근법에 비해 앨범 자체의 이슈가 덜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앨범을 만들 때 신경 쓴 부분이 있나.

앨범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떤 앨범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였고, 그런 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 앨범에는 흑인 음악의 코어가 되는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 그의 이전 행보만 보고 당연히 다음 작품도 엄청난 랩으로 가져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와장창 무너진 앨범이다. 나 역시 <DI-ANA>를 만들 때 집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여러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다양한 사운드의 재미를 주고자 했다. 사실 가벼운 앨범은 아니다. 조금 염세적이기도 하고, 신인 아티스트의 에고(Ego)가 나조차도 느껴지니까. 통일성을 주면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셈이다.

혹시 앨범이 그런 비타협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 경위가 있을까.

음악뿐만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이든 간에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나. 앨범을 한창 준비할 당시 점점 그 성취감이라는 원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타인에게서 그 이유를 찾았다. 왜 내 음악에 관심이 없을까, 생각해보면 리스너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권리가 있는 건데 당시에는 신인이나 뉴 제너레이션의 음악에 평가가 박하다고 생각한 거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드러난 앨범이라 조금은 일기 같은 앨범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밝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 작업을 하고 있지만 외로운 에너지를 갖고 있었고, 혼자 작업하는 과정에서 느낀 고립감이 점점 표출되었다.

독특하게도 피처링 진을 구할 때 인맥을 활용하지 않고, 일일이 메일이나 DM을 이용해 직접 연락했다.

보통 젊은 감각을 지닌 분들은 파티나 클럽 같은 사교의 장에서 삶을 즐기고 사람을 사귀는데, 일단 나는 성격 자체가 그렇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앨범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정작 아는 분이 하나도 없더라. 참여진 중에 이미 알던 사람은 내가 속한 'KeepNews' 크루 친구들과 부현석, 그리고 오도마 뿐이었다. 그래서 아티스트 섭외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래퍼의 이메일이나 DM으로 연락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종의 정공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음악 신에서 누구를 통해 연락하는 행위가 비겁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낭만적인 방법을 시도하고 싶었다. 만약 음악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면 수락해 주리라는 믿음이었다.

딥플로우의 경우에는 DM으로 연락을 보냈더니, 바로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는 답장과 함께 핸드폰 번호가 왔다. 성사되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테이크원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흔적을 찾아봐도 도저히 메일 주소를 알아낼 수가 없어서 하프타임 레코즈에 직접 문의를 넣었는데, 그 글을 보고 매니저를 통해 연락이 와서 참여하게 되었다. 나머지 분도 거의 유사하게 곡이 마음에 든다고 흔쾌히 참여해 줬다. 열린 마음으로 들어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이 방법을 택한 건 어떻게 보면 성취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원한 아티스트에게 닿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지 않나. 물론 방식 자체가 필연적으로 피드백이 늦기 때문에 힘들게 기다린 기억이 난다. (웃음)



아날로그 작법을 필두로 한 고전적 접근이나 신인 아티스트의 고집 등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앨범이지만, 모두 돌고 돌아 결국 낭만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나한테는 그게 굉장히 중요했다. 아까도 말했듯 앨범에 상징성을 담고 싶었고, 적어도 그 과정에서 고군분투했던 모습을 멋지게 기억하고 싶었다. 나중에 돌아보면 분명 미숙한 부분이 보이거나 불안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시절의 나는 노력했다는 징표니까. 일종의 로맨스인 셈이다. 내가 생각한 고유의 멋을 지키는 게 중요한 축으로 작용했다.

단연 두드러지는 트랙은 '신도시'로, 인스트루멘탈 트랙 'Tesla'와 같이 게스트 없이 혼자 주조한 트랙이다. 앨범을 한 편의 영화라고 본다면 직접 캐스팅을 한 뒤 중간에 잠깐 참조 출연한 셈인데, 직접 노래를 쓰고 부른 이유가 있을까.

'신도시'라는 곡은 이번 앨범에서 가장 밝은 곡 중 하나임에도, 어느 것보다도 컨셔스한 주제를 다루고 역설적인 면을 지닌 트랙이다. 무엇보다 내가 처한 상황에 관해 얘기하고 동시에 가장 솔직해야 하는 곡이었기 때문에 다른 아티스트의 에너지를 끌어오기보다 내가 직접 주는 편이 더 크게 감동이 작용할 거라 생각했다. 곡이 앨범 내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순환을 이루는지 집중하며 작업을 했고, '신도시'가 그런 곡이었다.

전반적으로 얼라이브 펑크라는 틀 아래 잘 응집된 것 같다. 그럼에도 참여진 가운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아티스트나 기억에 남는 곡을 꼽는다면.

우선 참여진으로는 'DNCE'의 자메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랩을 잘한다는 의미를 넘어 일단 내가 의도한 오브제를 잘 이해한 아티스트였다. <DI-ANA>는 발매 2주 전까지도 타이틀을 못 정한 상황이었는데, 자메즈의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이 곡이 타이틀이 되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여러 악기를 태깅하듯 펼쳐 놓은 후반 구간에서는 누가 와도 온전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는데, 그걸 가뿐히 뛰어넘더라.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피드백이 많이 오고 호불호가 갈린 트랙은 네버언더스투드(neverunderstood)가 참여한 '아류'다. 마지막 트랙인 만큼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데다 무엇보다 사운드 어프로치가 말이 안 되는 곡이다. 여러 FX 소스는 물론 모듈러 신스를 이용해 회로도 직접 만들면서 만든 곡이다. 진짜 힘들었다.

네버언더스투드의 이름이 언급된 김에 본인이 속한 'KeepNews' 크루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부탁한다.

우선 프로듀서는 얼라이브 펑크가 있고, 플레이어로는 보나조이(Bona Zoe)와 네버언더스투드, 쿠엔틴 파이브(Quentin 5ive), 코지마이(Kojimai), 칼리 킴(Kali Qim), 그리고 오엘프라이스(OL'Price)로 구성된 크루다. 혼자 음악 하는 친구들을 내버려 두기 싫어 결성된 크루다. 그렇다고 해서 모였으니 막연하게 노는 것 역시 불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하기에 몇 년 전 1집 컴필레이션 앨범 <Radio>를 제작했다. 같이 작업하면서 시너지가 많이 나오고 있고, 최근에도 2집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 상황인데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일단 내가 엄두가 안 나서. (웃음)

최근 'POP-UP STORE'의 슬로건을 내건 싱글이 두 개 나왔다. 하나는 서사무엘과 함께한 'To-kyo', 또 하나는 던말릭과 수비(Soovi)가 참여한 '없어도 돼'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프로젝트인가.

예전에는 프로듀서가 싱글 앨범을 릴리즈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싱글은 포맷 상 기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요소가 적은 데 정녕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느냐는 입장이었던 거다. 근데 <DI-ANA>를 만들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하기도 했고 조금은 가벼운 기분으로 창작을 해보고 싶었다. 시리즈별로 기획을 짜고 'POP-UP STORE'라는 슬로건을 짜면서 본격적으로 곡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중적으로 가고 싶었고, 내가 생각하는 기준의 커머셜한 사운드를 많이 차용했다. 기존의 공격적인 신시사이저보다는 듣기 편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DI-ANA> 때와는 달리 지치지 않고 즐기면서 하게 되더라.

뭔가 기존 스타일에서 공간감이 확장된 것 같다.

내가 원한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To-Kyo'는 일종의 워드 플레이인데, 찾아보니 'Kyo'가 공허라는 뜻이 있더라. 그 앞에 'Too'가 붙은 셈이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섞이면서 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고, 가끔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청각으로 표현한 곡이다. 그렇기에 듣기 부담스럽지 않은 앰비언트하고 칠 아웃한 사운드가 나오게 되었다.

서사무엘과의 작업은 어땠나.

우선 'To-Kyo' 곡 자체로 가지고자 한 목적은 '편안함'이었는데, 서사무엘은 직접적인 요청 없이도 알아서 듣기 편한 최적의 루트로 채워냈다. 그리고 이제껏 같이 작업한 이들 가운데 베이스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다. 두 번째 버스의 도입부에서 베이스 프레이즈를 긁으며 들어가는 구간에 소리를 비워 놓은 걸 보고 굉장히 놀랐다. 본인의 앨범 <Frameworks>를 인용한 듯한 가사도 무척 마음에 들고.

'없어도 돼'에서 던말릭이 펼친 퍼포먼스도 인상적이다. 특히 메시지가 얼라이브 펑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준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은 질문이다. 사실 던말릭은 저번 앨범에서 같이 하기로 한 곡이 있었고, 완성까지 했는데 그 결과물이 둘 다 만족스럽지가 않아 미처 발매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작업이 재밌었고 평소 너무 좋아하는 래퍼라 다시 한번 만나 작업을 도모했다. 하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준 느낌이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실수로 작업 전에 수비에게만 에세이를 주고 실수로 던말릭에게는 안 보냈더라. 결국 던말릭은 '없어도 돼'라는 제목 하나만 듣고 참여한 거다. 근데도 멋지게 가사를 써줬고, 심지어 발매 기간이 촉박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작업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서로 장난도 치고.

어떻게 보면 또 에세이를 보내지 않은 게 새로운 시너지를 만든 게 아닐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볼까 생각 중이다. (웃음)

다양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만큼, 향후 발매될 팝업스토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가 크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으로 구성될 예정인지.

사실 그 점에 관해서는 내 작업 스타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고 싶다. 나는 앨범을 제작할 때 앨범을 위한 곡을 만드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곡을 만들어 놓고 언젠가 아카이빙된 그 수많은 곡을 나중에 펼쳐 보았을 때 느낌이 오면 수록을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이불 위 DI-ANA' 같은 곡은 앨범 발매 4년 전에 쓴 곡이고, <DI-ANA>를 만들면서 버린 곡만 해도 63개에 달한다. 심지어 전부 아날로그로 작업했다.

물론 곡이 별로라서 뺀 건 아니다. 그저 넣으면 안 되는, 이 <DI-ANA>라는 앨범 안에서는 생명력을 지니지 못하는 트랙이었던 거다. 지금도 팝업스토어 프로젝트를 겨냥하고 쓴 곡이 벌써 열다섯 곡 정도 되지만, 그 곡이 수록될 가능성은 미지수다. 처음 목표로는 볼륨 1부터 3까지 발매한 뒤 후에 새로운 곡을 추가한 디럭스 버전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부터는 또 하나의 앨범이 되는 거니까 또 통일성을 생각해야 할 테고. 그래도 차근차근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



아날로그 세션을 자주 사용하는 만큼 밴드 라이브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큰 욕심은 없다. 아직 드러나는 것보다는, 대중에게 먼저 작품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만약 하게 되더라도 다른 세션을 쓰기보다는 혼자 원맨밴드 식의 작업 방식을 고수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멀티 트랙을 깔아놓고 공연을 한다거나. 정직한 앨범을 냈기 때문에 라이브 현장에서도 정직해야 하지 않을까.

코로나 시기에 대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데.

이건 참여한 래퍼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앨범을 내고 파티 같은 것도 기획하고 있었는데 전부 무산되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보여줄 것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조금 더 열심히 해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아티스트와 협업을 하고 있지만, 꼭 한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한국에서 모두가 원할 테지만, 빈지노와 작업을 해보고 싶다. 어떤 음악의 기준이나 특수한 사운드 접근법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각종 리듬과 장르를 전부 소화할 수 있는 뮤지션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빈지노는 정규 1집의 수록곡 'Break'에서는 로큰롤 리듬을 선보이지만 'Dali, van, picasso'로는 재즈틱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 발매된 'Blurry'는 또 트랜스 음악과 많이 닮았다. 그런 면에서 이해도가 높고 스펙트럼도 넓은 아티스트라 꼭 한 번 원 엠시 원 피디로 작업을 해보는 게 꿈이다. 멋진 작업을 할 자신도 있고.

다양한 음악을 듣는 만큼 추천하고 싶은 음악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얼라이브 펑크가 좋아하는 여러 장르에서 대표로 한두 장씩 소개 부탁한다.

일단 힙합 앨범에서는 DJ Shadow의 <Endtroducing……>을 꼭 들어봤으면 좋겠다. 최초의 샘플러와 턴테이블로만 만든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데다, 브레이크 비트 같은 개념이나 트립 합 등에 영향을 끼친 앨범이다. 턴테이블리즘이 일어났을 때 그 중심에 있던 음악가기도 하다. 만약 샘플링을 공부하는 분이라면 DJ Shadow의 음악이 좋은 소재가 되리라 생각한다.

디스코에서는 스타일리스틱스(The Stylistics), 코모도스나 팔리아먼트 등 괴물 같은 그룹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이에 필적할 만한 그루브를 가진 팀이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순수 재즈는 아니지만 재즈틱한 앨범 중에서는 아이작 헤이즈(Isaac Haves)의 <Chocolate Chip>을 뽑고 싶다. 어쿠스틱하고 애시드한 사운드를 많이 썼기에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유행에 구애받지 않을 앨범이다. 소울 음악이라 하면 소울 폴 리얼(Soul for Real)의 앨범을 추천한다. 뉴 잭 스윙이나 슬로우 잼 같은 다양한 소울 펑크 리듬이 있고, 나 역시도 거기서 악기의 어레인지 같은 것을 많이 참고한 것 같다.

일렉트로니카에서는 Teebs의 <Anicca>. 앰비언트한 요소도 있지만 강력한 드럼도 있고, 이 앨범에서 사운드 접근법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공부가 많이 된 뮤지션이라 추천을 하고 싶다. 록은 다들 많이 알 테지만,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를 권한다. 내 기준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앨범이고, 아직까지 이걸 뛰어넘은 앨범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 더 있다면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꼽고 싶다.

최근 재밌게 들은 앨범이 있을까.

일단 한국에서는 마인드 컴바인드가 있고, 그리고 외국에서는 조금 아쉽지만 키드 커디(Kid Cudi)의 <Man On The Moon III : The Chosen>을 뽑고 싶다. 물론 첫 등장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Man on the moon'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작년 발매된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와 알케미스트(The Alchemist)가 같이 작업한 <Alfredo>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음악 팬들이 얼라이브 펑크의 음악을 들을 때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지.

아까도 말했듯,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작품의 하자나 허점은 분명 내 눈에도 보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영원히 미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음악을 완성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청자다. 최고의 칭찬이던, 혹은 정말 별로라는 말을 남기든 간에, 어쨌든 평이 나온 것 자체가 음악을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청자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앞으로 얼라이브 펑크로 활동하면서 솔직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나의 일기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그 당시의 얼라이브 펑크가 이걸 좋아했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유추해도 좋다. 어쨌든 솔직함은 소중한 가치고, 그걸 고수하는 게 멋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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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무더위, 케이팝 10곡으로 여름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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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에도 여행은 힘들 것 같다. 학생이건 회사원이건 꿀 같은 여름방학과 휴가를 이용해 잠시나마 무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여행을 빼앗아갔고 이번 여름도 어김없이 방구석 에어컨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래도 여름이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해줄 가장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매년 여름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시원하게 녹여주었던 아이돌의 신나는 여름 노래에 그대로 몸을 맡기는 것. 이들의 청량한 사운드로 우리들의 마음만큼은 시원한 해변으로, 휴양지 야자수 밑으로 단번에 보내줄 수 있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꿈같은 여름날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이번 여름, 우리들의 심적 휴양을 책임져 줄 아이돌 가수들의 대표 여름 노래 10곡을 선정했다.



에프엑스 ‘Hot summer’ (2011)

에프엑스의 여름은 뻔하게 한가로운 휴양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교실, 사무실, 방구석에서 갇혀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며 뜨거운 여름 그 자체를 노래한다. 수십 번 반복되는 가사 ‘Hot summer’는 듣는 이에게 시원함을 선사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이열치열의 에너지로 무더위에 정면으로 맞선다. 보통의 여름 노래는 청량한 사운드의 시원함을 느끼기 위해 듣는다면 ‘Hot summer’는 견디기 힘든 폭염 탓에 정신이 살짝 혼미한 상태에서 듣기 제격이다.

‘Hot summer’의 매력 포인트는 10년이 지나도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가사에 있다. 특히 ‘땀 흘리는 외국인은 길을 알려주자/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라는 구절은 당시 가사의 논란이 발생했을 정도로 큰 혼란을 야기했다. 결과적으로는 알쏭달쏭한 가사가 귓가에 자꾸만 맴도는 중독성을 만들며 유일무이한 시즌송을 만드는데 한몫 했다. 십 년이 지났음에도 무더위에 미쳐버린 여름의 순간들을 이보다 화끈하게 표현한 아이돌 여름 노래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씨스타 ‘Loving u’ (2012)

쿨 이후로 등장한 2010년대 여름의 절대강자. 수년에 걸쳐 한 계절을 점령해 버린 아이돌은 씨스타가 최초였다. 다른 걸그룹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강미와 섹시함, 그리고 메인보컬 효린의 시원한 가창력으로 탄생한 이들의 여름 노래는 계절을 청각화 하는데 탁월했다. ‘Loving u’로 시작된 씨스타의 썸머송 연대기는 ‘Touch my body’, ‘Shake it’로 정점의 궤도에 올라서며 해체하는 순간까지 여름의 왕좌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다.

씨스타와 여름의 상성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Loving u’는 사랑에 빠진 풋풋한 감정을 짧지만 낭만적인 여름의 순간으로 표현한다. 직접적으로 여름을 연상시키는 단어 없이 소유의 살랑거리는 목소리와 탄산 음료 같은 효린의 고음, 도입부부터 바다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브라스 사운드의 설렘만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썸머송! 해체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여름만 되면 여전히 씨스타의 노래를 찾게 될 정도로 이들의 존재감은 강력했다.




샤이니 ‘View’ (2015)

샤이니의 상징색 펄 아쿠아 그린으로 수놓은 여름의 뷰. 뜨겁게 정열적이지도, 특별하게 시원하지도 않은 이들의 여름 노래에는 은은한 청량감이 감돈다. 당시로서는 케이팝에서 생소했던 딥 하우스 장르로 간결함을 추구하며 신나고 경쾌해야 한다는 여름 노래만의 고정관념을 깨부순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곡의 구성은 자칫 심심함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공감각의 축제를 그린 종현의 언어유희, 감각적인 선율과 공간감을 채우는 멤버들의 보컬로 샤이니만의 개성이 담긴 여름 노래를 완성했다.

‘View’의 뮤직비디오에는 청춘들이 생각하는 낭만적인 여름 향기가 모조리 담겨 있다. 칠(Chill)한 여름의 푸른빛 색감,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스트리트 올드스쿨 패션, 휴양지에서 친구들과 만끽하는 풀 파티까지. 이들의 청춘 로드 무비는 사운드에 몽환적으로 스며들어 물속에서 숨 쉬며 헤엄치듯 환상 속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수많은 여름 노래들이 있지만 ‘View’가 가장 세련된 아이돌 여름 노래이자 샤이니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이유.




태연 ‘Why’ (2016)

태연에게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곡이 하나씩 있다. 봄의 ‘사계’, 가을의 ’11:11’, 겨울의 ‘This Christmas’, 그리고 여름의 ‘Why’. 통쾌함이 감도는 시원시원한 가창력과 청량한 트로피컬 리듬으로 표현한 ‘Why’의 여름은 불쾌지수 높은 계절의 스트레스를 단숨에 날려준다. 국내에서 트로피컬 장르가 유행하기 이전에 발매된 탓에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후발주자들이 등장함에 따라 완성도 높은 여름 노래로서 평가 측면의 역주행이 예상된다.

‘Why’는 서사를 투영한 여름 노래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단순히 상쾌한 여름날의 휴가를 노래한 곡이 아니다. 도입부의 차분한 어쿠스틱 선율에서 후렴의 청량한 비트로 전환하는 구성은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그린다. 이때 ‘Why’라고 끝없이 반문하는 태연의 목소리는 일상 탈출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지금 당장 떠나도 좋다는 용기를 심어준다. 올여름도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을 부풀게 하는 노래.




여자친구 ‘너 그리고 나’ (2016)

학교를 졸업한 소녀들이 처음으로 맞은 자유분방한 여름. ‘유리구슬’, ‘오늘부터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로 이어져 온 ‘파워 청순’ 콘셉트의 연장선에 있는 곡이지만 강렬한 록 사운드와 박력 있는 기타 연주로 도로 위를 질주하는 듯한 시원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멤버들의 티 없이 맑고 담백한 음색은 순수한 사랑을 표현한 가사에 청량한 여름의 향기를 한 스푼 더해준다.

뮤직비디오 속 멤버들은 학교를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풀 빌라로 여행을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 장면들과 서정성을 갖춘 여름 노래의 만남은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여름 방학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약간의 긴장 그리고 나비처럼 날아오르고 싶은 설렘이 함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계절. ‘너 그리고 나’에 깃든 시원한 에너지는 수줍은 소년소녀가 이번 여름에 앞을 향해 힘껏 내달릴 수 있는 동력을 실어준다.




레드벨벳 ‘빨간 맛’ (2017)

2017년 이후 여름 노래의 ‘국룰’은 ‘빨간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름만 되면 TV 프로그램에서는 ‘빨간 맛’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1020 세대에게는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여름 노래일 정도로 상징성이 짙다. 레드벨벳은 씨스타 이후 계보가 끊겼던 썸머퀸의 바통을 이어받으며 ‘빨간 맛’을 시작으로 ‘Power up’, ‘음파음파’까지 여름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룹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빨간 맛’이 그린 여름의 기승전결은 완벽하다. 야자수 아래 달콤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뛰어노는 한낮부터 금세 노을이 진 해변의 저녁까지. 빠른 후렴구부터 느린 템포로 여운을 주는 엔딩의 구성은 어느 여름날의 하루를 다채로운 맛으로 담는다. 여름의 질감을 가진 통통 튀는 가사로 표현한 시원하고 짜릿한 음악은 그 해 여름을 상큼하게 보내기 위해 꼭 들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누군가 여름이 어떤 맛이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빨간 맛’이라고 답할 것이다. 제목과 함께 흘러나오는 멜로디만으로 여름이라는 계절을 설명하기 충분한 강력한 썸머송!




위너 ‘Island’ (2017)

여름 노래의 진가는 당장의 뙤약볕 밑에서 들어도 눈앞에 하와이 해변에서 휴양을 만끽하는 장면을 그려줄 때 나타난다. 위너의 청량함을 대표하는 ‘Island’는 시원한 트로피컬 하우스 리듬으로 듣는 이들의 방구석 휴양지 여행을 가능케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지금, 이보다 여행을 꿈꾸는 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곡이 또 있을까.

‘Really really’부터 위너와 떼어놓을 수 없는 조합이 된 트로피컬 장르는 ‘비행기 모드’, ‘무인도’, ‘보물섬’과 같은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와 함께 여름 휴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 쉴 새 없이 부딪히는 플럭 사운드는 내적 댄스와 함께 흥을 유도하며 강승윤의 여유로운 보컬과 이승훈의 자유로운 래핑은 트로피컬 분위기에 한껏 취하게 한다. ‘Island’와 함께 도로 위를 드라이브하는 것만으로 휴양지에서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만끽할 수 있다.




트와이스 ‘Dance the night away’ (2018)

트와이스의 상큼함과 청량한 썸머송의 멜로디는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다. 한 여름밤 해변가에서 신나게 댄스 축제를 벌이는 모습으로 담은 트와이스의 여름은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휴양지의 에스닉한 의상, 맨발로 모래사장을 자유롭게 뛰어노는 듯한 역동적인 안무, 멤버들의 맑고 시원한 보컬로 초대하는 여름 파티의 현장!

흥겨운 브라스 사운드가 이끄는 후렴구의 단순한 반복은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여름 노래의 공식을 따르며 강한 중독성을 유발한다. ‘바다야 우리와 같이 놀아/바람아 너도 이쪽으로 와’처럼 자연의 요소를 품은 휘성의 독특한 노랫말도 곡의 흥행 요인으로 작용했다. 2018년 여름을 접수했던 ‘Dance the night away’는 여름마다 차트 역주행으로 소환되며 매년 어김없이 더위가 찾아왔음을 알린다.




세븐틴 ‘어쩌나’ (2018)

2세대 보이그룹을 대표하는 ‘청량돌’이 샤이니라면 3세대에는 세븐틴이 있다. 시원한 여름 분위기의 노래를 소화할 때 가장 자연스러운 이들은 여름에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다. ‘어쩌나’는 데뷔 초 ‘아낀다’, ‘만세’, ‘예쁘다’로 이어져 온 세븐틴의 청량 콘셉트를 이어가며 무더위를 산뜻하게 녹여주었던 썸머송이다. 이전의 곡들은 소년미를 부각하는 데 집중했지만 ‘어쩌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좀 더 초점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스윙 리듬과 신시사이저로 차분하게 여름의 분위기를 담았음에도 세븐틴의 유쾌한 에너지는 그대로 다. 13명이라는 다인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현란한 안무, 뮤지컬 같은 다채로운 구성의 음악,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풋풋한 감성에는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가사 속 ‘찌더움이 없는 Summer’를 맞이하게 해 줄, 선선한 공기를 품은 파스텔 톤의 노래.




오마이걸 ‘Dolphin’ (2020)

발매 시기는 봄이지만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켠 것은 여름이었다. 앨범 수록곡에 불과했던 ‘Dolphin’은 은은하게 스며드는 가사 ‘da da da da da’의 나른한 음성으로 여름 바다의 물보라와 같은 파동을 일으켰다. 직접적으로 계절을 겨냥한 노래는 아니다. 사계절을 지나 일 년이 넘도록 사랑받고 있는 곡이지만 돌고래가 헤엄치는 모습이 연상되는 시원한 멜로디와 멤버들의 청아한 음색은 무더운 여름에 듣기 최적화된 세트다.

빠른 템포, 꽉 찬 사운드, 시원시원한 가창력으로 대표되는 썸머송의 흥행 공식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하지만 강력한 중독성 한 방으로 여름 노래들의 모든 인기 요인을 압도한다.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안무 또한 너도 나도 ‘Dolphin’의 리듬에 몸을 맡기도록 만든다.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에서 빠지지 않을 마성의 여름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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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코드, 청춘가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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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청춘가가 존재한다. 힘이 담긴 응원 문구로 삶의 원동력을 부여하고, 낙관주의를 권하며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거나, 혹은 고된 순간에 절절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주는 음악들이다. 저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공통된 주제는 젊음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이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권 아래, 오랜 시간 인류가 청춘이라는 가치를 예찬해온 방식이자 청년의 가치가 어떤 존재로 인식되어 왔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긍정이 늘 해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끝나고 이어폰이 고요해지면, 우리는 형체 없는 희망만을 간직한 채 비참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집값 폭등과 청년 실업, 세대 및 성별 갈등까지 최근 급격히 부상한 사회 문제는 MZ세대에 드리운 무기력의 원천으로 이미 단단히 자리 잡은 상태다. 'N포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는 상황 속 우리네 삶은 극복은커녕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다.

어쩌면 지금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힐링 테라피보다 걱정과 근심에 대한 본질적인 공감이 아닐까 싶다. 때론 같이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기 마련이기에. 여기 비록 '아름답지'만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먹먹하고 솔직하게 담아낸 한 편의 수필이자 동료가 되어줄 청춘가를 선정했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젊은이'(2015)

예나 지금이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는 건 두 가지를 의미한다. 어른이 됐다는 것과 인생이 잘 안 풀린다는 것.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의 몸집이 커지는데 왜 젊은이들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가? 누구의 잘못이고 무엇이 잘못된 걸까?

'술 취한 밤 사는 게 무거워 마신 술이 더 무거워

피우지 말라는 담배도 한 가치 물고 하늘 보고 누웠다

내 맘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깨져버린 잔

여기에 나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별'

“상쾌할 수 없는 현대의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곡”이라고 밝힌 보컬리스트 조웅의 말과 달리 노래는 흥겹고 유쾌하다. 1960년대 미국의 개러지 록 사운드에 조웅의 장난 끼 넘치는 보컬과 김나언의 앙증맞은 건반은 낯설 수 있는 개러지 인디 록 넘버 '젊은이'를 친근하게 만든다. 그렇게 친해진 다음에 들리는 허무하고 구슬픈 가사는 희망을 잃어가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다이나믹 듀오 '고백(Feat. 정인)'(2005)

이 시대의 젊은이에게 '진심 어린 조언'이란 때때로 우스운 '구별짓기'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 상처가 나만 겪는 상처처럼 느껴지는 오늘 그리고 어제, 아니 어쩌면 내일이 반복되는 지금 절실히 필요한 노래는 그냥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힘내'가 아닌 그러니까 '이제는 다 커버린 철없는 나의 고백'처럼 말이다.

'이건 슬픈 자기소개서. 친구들아 sing it together'

2005년 발매 이후 십여 년간 청춘의 곁을 감싼 노래. 강산이 변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노래가 묘사하는 쓴 내 나는 청춘의 나날은 여전히 지속되는 것만 같다. 이제는 그럼에도 '젊으니까'를 외칠 여력도 남아있지 않는 처절한 20대의 끝에서 다시 '고백'을 떠올려 본다. 젊지만 언제나 이제는 다 컸다며 조급함에 시달리는, 앞을 보기 두려워 뒤와 옆을 보며 내달리는 청춘. 이 곡에는 그런 우리의 자화상이 담겨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절룩거리네'(2003)

예고 없이 찾아온 국가 부도의 날은 당시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패배자로 내몰았다.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었던 청년 이진원도 안정적인 직장은커녕 계약직으로 여기저기를 떠돌았고 주변 환경으로 인한 좌절과 사회를 향한 불만은 날로 커져갔다. 하지만 신세 한탄만 하며 허송세월 하기 싫었던 그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란 이름을 달고 기타를 집어 들었다.

호기롭게 음악계에 발을 들였으나 별다른 연줄이 없었던 그곳 역시 '구역질 나는 세상'과 다를 게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래들이 가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도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가 현실을 거스를 수 없는 팔자라는 걸 깨닫고 '무능하고 비열한 놈'임을 인정했다. 또한 '하나도 안 힘들어/그저 가슴 아플 뿐인걸'이란 역설과 육신을 내던지는 자학은 무기력에 잠식당한 이들을 대변하는 비관적 서사였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9회 말. 마지막을 각오하고 타석에 올랐던 달빛요정은 역전을 바라면서도 대중에게 닿아보지 못하고 아웃 당하는 상황을 걱정했다. 허나 시대적 비극을 같이 견뎌낸 이들의 마음에 만루홈런을 꽂았고 경기를 끝내기 위해 절룩거릴지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홈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절룩거리네'는 지금까지도 청춘들의 밤하늘을 밝히는 애달픈 공감으로 남아있다. 




방탄소년단(BTS) '낙원'(2018)

더하기보다 빼는 것이 익숙한 요즘 시대의 자기 위로 공식은 '포기'다. 삶에서 연애와 결혼, 아이를 덜어낸 삼포란 단어가 등장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단념의 가짓수를 특정할 수 없기에 N을 붙여 그 범위를 확장한다. 중심엔 MZ 세대가 있다. 가족 혹은 사회 등 타의에 의해 날마다 목적 없이 경쟁했던 그들은 이제 지쳤고, 마음에 쌓인 짐을 버리듯 토해내는 한숨이 내려앉은 땅엔 꿈의 잔재가 무수하다.

'Now 어리석은 경주를 끝내 Stop runnin' for nothin' my friend

네가 내뱉는 모든 호흡은 이미 낙원에

Stop runnin' for nothin' my friend 다 꾸는 꿈 따윈 없어도 돼'

'낙원'은 담담하다. 영국의 프로듀서 엠넥(MNEK)의 잔잔한 비트 위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방탄소년단의 목소리가 특별히 따뜻하지 않은 이유는 무기력증에 빠진 채 코스에 쓰러진 이를 일으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마주 바라보는 진심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확실하다. 자포자기의 도달점은 절망이 아닌 새로운 기회이기에 억지로 쥐어진 목표를 벗어나 멈출 수 있는 용기를 전달하는 것. 방탄소년단이 내미는 손끝이 올곧다. 




송민호 '겁 (Feat. 태양)'(2015)

사실 곡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Eh / Ayo'로 들어가는 태양의 피처링 파트와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라며 절규하는 송민호의 랩이 과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대중적이고 귀에 꽂히는 곡인 건 분명하나 강한 비트를 선호하는 개인적 취향에 '겁'은 말랑말랑하고 기성 가요의 문법이 진했다.

허나 곡의 선호도를 둘째 치고 가사에 집중하면 송민호의 이야기를 충실히 담았음을 알 수 있다. '겁'이란 제목부터 그렇다.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마련. 대신 송민호는 겁에 질린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공감과 동정을 끌어낸다.

'내가 나를 죽였어, 엄마도 내 눈치를 봐'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CCTV 속에 사는 게 무서웠어'라고 고백하는 송민호. 아문 상처를 쑤시며 과거를 대면하는 건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자의식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경하는 뮤지션의 과거사를 마주한 청소년들은 시련의 평등성을 느끼며 위로받는다. 위너(Winner)에서의 화려함과 < 신서유기 >의 유쾌함 등 그 어떠한 이미지보다 송민호의 본질에 가까웠던 건 '겁' 속 연약한 청춘일지도 모른다. 




자우림 '스물다섯, 스물하나'(2013)

참으로 모순적인 시기. 마음껏 부딪혀 보면서 경험하는, 시행착오가 청춘의 특권이라지만 바늘구멍만 한 기회의 문은 그러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아등바등 살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더라?' 인생의 봄이라는 푸르른 계절의 실상은 찰나의 시간이며 우리는 꽃을 피운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쓰디쓴 한탄을 마시며 살아간다.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때는 몰랐던 애틋한 시기를 회고한다. '아직도 손에 잡힐 듯'한 청춘의 추억은 향기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 아릿한 내음만 남기고 흩어져 버린다. 내레이션 같은 김윤아의 보컬과 잔잔하게 깔린 스트링 사운드를 타고 사람들은 잠시 잊고 있던 각자의 사연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뚜렷하게 이뤄낸 것 없고 나만 뒤처진 줄 알았던 아쉬움의 순간을 '그래도 아름다웠다'라고 정의 내리는 곡.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2008)

일말의 꾸밈도 없다. 마치 경험을 고스란히 옮긴 듯한 일련의 문장들이 묵묵히 나열될 뿐이다. 권태에 찌든 기타의 음율과 한숨 섞인 도입부를 지나, 독백을 넘어 거의 타령에 가까운 장기하의 덤덤한 보컬은 지극히 현실적인 가사와 맞물리며 듣는 이조차 '적잖이 속이 쓰릴' 만큼의 무기력함을 빚어낸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충격적인 데뷔 싱글 '싸구려 커피'의 등장이었다. 적나라한 표현과 독특한 퍼포먼스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곡은 누구나 따라부르기 쉬운 간단한 곡 구성을 토대로 남녀노소를 막론한 선풍적인 유행을 이끌며 제2의 인디 부흥기를 이끌었다.

인스턴트 커피, 눅눅한 비닐장판, 그리고 담배꽁초가 든 미지근한 콜라까지.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 화자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콩트를 보는 듯하다. 허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당시 청년층이 이 곡이 보낸 관심에는 단순한 재미보다도, 해학과 자조에서 은은히 우러나온 지지의 심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포크 록의 진정성에 2000년대 홍대 인디 씬 특유의 한국적인 키치함을 교묘히 배합한 '싸구려 커피'는 그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 부문에서 당당히 수상을 거머쥐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초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낸 김홍도 화백이 그랬듯, 오늘날까지도 세대를 관통하는 노랫말일 테니. 




장미여관 '청춘가'(2013)

청춘은 어디에 있을까. 사랑과 우정, 그리고 꿈이라는 가치도 사라진 지 오래다, 도전보다 포기를 부르는 지금의 세대에게 우선순위는 안정적인 삶뿐. 술 한잔 기울일 친구를 찾으며 지나버린 젊음을 위로하는 장미여관의 '청춘가'조차도 사치로 들린다. 과거는 가진 자들에게나 추억이지 없는 자들에게는 트라우마다. 그런데도 이번 리스트에 이 노래를 넣은 이유는 마지막 남은 낭만을 찾기 위해서다.

한국의 청춘처럼 계절도 겨울 다음 여름이 온다. 봄이 사라지고 있다. 새순이 돋아날 틈도 없이 찬바람과 더위만 기세등등하다. 날씨부터가 이러니 힘이 날 턱이 있나. 이럴 때 우릴 달래주는 건 뜨끈한 국물에 소주와 바삭한 치킨에 맥주다. '혼술'이 유행이니 따라가야겠지. 오늘도 술기운을 빌려 '버린 나의 꿈아/나의 사랑아/돌아오질 않을 젊음아'를 외치며 자책 중이다. 그렇게 나의 '청춘가'를 찾아 헤맨다. (임동엽)




재지팩트 'Always awake'(2011)

야박한 세상 속 '밤샘'은 청춘에게 익숙하다. 몸 건강한 젊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지만, 그만큼 힘들고 고단한 일이기도 하다. 불투명한 미래에 신음하면서도 그렇기에 이들은 밤에도 한 발을 더 내디뎌야 한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밀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업에 승리하기 위해, 혹은 그저 한 번뿐인 한창때의 찬란함을 만끽하기 위해 말이다.

'모두가 등한시하는 밤하늘에 뜬 달 / 곁에 있는 별처럼 깨어 있는 나'

빈지노와 시미 트와이스가 뭉쳐 결성한 힙합 듀오 재지팩트의 'Always awake'는 그러한 젊음의 패기를 압축한 아우성이다. 고독한 달빛 아래 '눈이 푹 패이고 몰골은 초췌'하지만, 'Say young!'을 부르짖는 외침만큼은 호기로워서 어딘가 자유로워 보인다. 심장에 요동치는 드럼과 멀게 들리는 관악기가 펼쳐놓은 달밤의 몽환, 그 위 영 제너레이션 랩 스타의 열정이 강렬한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전등을 끄지 않는 청춘을 응원하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철야(徹夜) 예찬가. 




화나 'Prologue'(2017)

'나를 대표하는 말은 대충 한국의 청년, 젊은이, 학생, 취준생, 공시고시생, 말단 노동자나 알바..'

이름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MZ는 지금 자존, 실재, 미래정신을 다 잃었다. 2017년 12월의 스토리가 2021년 6월에도 고스란히 오버랩 된다. 청춘의 공허는 세대공통이라지만 싸구려 휴지 같은 지금 청춘의 백지는 1986년 유미리 '젊음의 노트'에 표현된 '뭔가를 써야만 하는 빈 노트'와는 종이 다르다. 한동안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청년창업이란 말도 폐어가 돼가고 있다. 586들의 성장시대엔 그나마 기회, 기대라도 있었지...

예의 그 라임폭격보다는 조곤조곤 권총의 연발사격에 가깝지만 하드코어 메시지의 토로라 청년들은 더 공감한다. 방송 다큐 제목처럼 이거야말로 '청년 진짜 이야기'요, 청년현실 리얼 브금이다. 반국가 반정부 시야가 스멀거리는 가운데 MZ의 파괴욕망 헌장으로, 현실 선전포고로 손색이 없다.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가진 놈들 차지'라는 게 넋두리를 넘어 불공정 불공평 불평등의 '변함없는 세상'에 균열을 초래하는 그루핑의 시작이기를.. 화나는 이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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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의 가치를 되돌아보다, ‘라이브러리 Magazine Collection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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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장은 디지털화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았다.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 시대 종이 매체의 쇠퇴는 당연한 절차였고 전통을 자랑하던 유명 매거진들의 폐간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반면 요즘은 얘기가 다르다. 무분별한 정보들을 쏟아내는 온라인 미디어에 피로를 느낀 나머지 독자들은 매거진과 같은 에디터의 전문성이 담겨있는 콘텐츠를 원한다. 게다가 최근 트렌드와 맞닿은 종이 매체라는 아날로그 감성과 직접 수집하는 재미까지, 매거진 시장에 다시 한번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대카드는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만반의 준비를 기울여 왔다. 201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를 돌며 비용과 노력을 집중한 결과 9,000권에 달하는 11종 매거진의 발행본 전체를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이태원에 위치한 현대카드 스토리지(Storage)에서는 매거진 전권 콜렉션을 주제로 한 전시가 진행 중이다. 'the Issue: 시대를 관통하는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Magazine Collection 展'은 <라이프>, <플레이보이>, <내셔널 지오그래픽>, <롤링스톤>, <도무스>를 소재로 대중성과 역사적 가치를 지닌 각 영역 최고 권위의 5개 매거진을 전시에 담았다.

전시장 입구에 자리한 대형 연표에는 5개 매거진 콜렉션의 연대기와 1930년대를 시작점으로 세계사에 기록된 주요 사건들이 펼쳐져 있다. 각 사건과 해당 매거진의 연관 관계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포토 저널리즘 시대를 이끌었던 <라이프> 섹션은 반가움이 앞섰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해 리더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과거 모습과 제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상징하는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 사진 같은 익숙한 장면들도 마주했다. 보도사진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흑인 인권, 우주개발, 그리고 '이 시국'에 어울리는 바이러스 분야까지 다뤘던 <라이프>의 기록들은 붉은 로고의 상징성이 여전히 숨 쉬고 있는 듯했다.



<플레이보이>는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비판과 가족주의에 저항한 성 해방을 이끌었다는 대립한 의견들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플레이보이>는 단순한 성인 잡지와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시대상과 엔터테인먼트, 디자인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선사했던 사실은 상대적으로 간과됐다. 'Playboy Club'은 매거진으로부터 투사된 판타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1960년대 유흥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 외에도 '일러스트레이션 해방 운동'을 주도했던 도전적인 태도와 데이비드 보위,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예술계 저명인사들을 다룬 인터뷰는 격조 높은 매거진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지점이다.

지금은 어패럴과 다큐멘터리 채널로 더 친숙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노란 테두리는 변화를 거듭했다. 본래 학술지의 성격으로 시작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교양지 이상의 것으로 성장하게 된 흔적은 커버의 변천사를 통해 전시되었다.



입장 전부터 제일 관심을 끈 건 단연 <롤링 스톤>이다. <롤링 스톤>은 대중음악 매거진으로는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으며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매체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반문화를 표명한 음악적 현상을 생생히 기록했던 콜렉션과 빈번히 커버 샷을 장식했던 존 레논의 추억을 되짚어 본 후 전시장 가운데 마련된 청음 존에서 그 유명한 <롤링 스톤> 선정 명반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바이닐 앤 플라스틱처럼 레코드판의 가치와 음악 큐레이션 작업을 끊임없이 시행해온 현대카드의 특색이 드러난 구성이었다.



건축과 디자인 산업에서 국제적 트렌드를 주도하는 월간지 <도무스>는 마지막 매거진이다. 창간 100주년을 앞두고 도입한 편집 전략 '10x10x10'을 통해 매년 세계적인 건축가를 편집장으로 선임하는 등 신선한 도약을 앞두고 있었다.



전시장 계단을 내려가다 보이는 2층 높이의 대형 서가 존에는 매거진들이 빼곡히 진열되어있다. 실로 압도되는 광경이다. 가볍게 한두 개 정도를 소장하는 것과 완전한 수집을 이뤄낸 것은 단순한 개수 차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특히나 희소성과 오랜 역사를 지닌 5개 매거진 전권 콜렉션이라면 더욱 가치는 특별해진다. 낱권이라는 단편의 조각을 차곡히 쌓은 결과 마침내 역사의 흐름은 연결 지어졌다. 문화에 진심이었던 현대카드가 방대한 아카이브와 함께 또 한번 진심이라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1. 라이프 (Life)
보도사진의 선구자 <라이프> 지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로 대중에게 친숙하다. 1936년 헨리 루스가 이 잡지를 창간하며 “삶을 그리고 세상을 보자. 엄청난 일들의 증인이 되자”라고 선언했던 것에 따라 비틀즈, 아인슈타인, 루즈벨트 대통령, 흑인 인권 운동, 제2차 세계대전 등 인류의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기록했다. 1940~1960년 전성기를 누리던 잡지는 2007년에 완전히 폐간되었지만 이들이 남긴 사진은 여전히 그 순간들을 생생히 증언하고 반추한다.

2. 플레이보이(Playboy)
<플레이보이> 지라고 하면 바니걸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1953년 휴 헤프너의 창간 이래 양질의 콘텐츠를 선보여온 댄디한 남성을 위한 종합매거진이다. 1975년에는 560만 부를 기록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나 플랫폼의 확대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누드 사진을 게재하지 않는 등 다양한 타개책을 모색했다. 하지만 여전히 저조한 판매량으로 인해 2017년에는 계간지로 전환했으며 2018년에는 인쇄판 폐지까지 검토했다. 2020년까지 명맥을 이어온 잡지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콘텐츠 생산과 공급체계가 무너지면서 다시 한번 위기를 맞고 휴식에 들어갔다.

3. 롤링스톤(Rolling Stone)
1967년 창간한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정치, 사회 등 시대상을 함께 담으며 세계적인 잡지로 발돋움했다. 1980년대 들어서 연예 쪽으로 완전히 노선을 틀기도 했으나 1990년대 말 정치 콘텐츠를 되살리면서 독자들의 호응과 판매부수 증가로 다시 호황을 맞았다. 또한 젊은 저널리스트 마이클 해스팅스와 맷 타이비 등의 활동으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종이 잡지가 사라져가는 2000년대에도 그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최근에는 방탄소년단이 전원 아시아인 그룹 최초로 미국판 커버를 장식했고 한국판 창간으로 우리나라가 <롤링스톤>의 12번째 국가가 되었다.

4. 내셔널 지오그래픽(The Nation Geographic)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는 1888년 전미 지리 협회에 의해 지리학 학술지로서 창간되었다. 2대 협회장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부터 대중적인 과학 교양 잡지로 방향을 전환했고 단순 텍스트 출판물이 아닌 방대한 그림까지 담기 시작했다. 특히 1985년 아프가니스탄 소녀 샤 바트 굴라의 사진은 잡지에서 가장 유명한 표지다. 지금까지 1,536호를 발행한 잡지는 생생한 사진과 기록을 전할 뿐만 아니라 환경 보전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하며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5. 도무스 (Domus)
1928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지오 폰티가 창간한 <도무스> 지는 이탈리아어로 집이라는 뜻을가지고 있다. 이탈리아 예술을 중심으로 시작한 잡지는 일상의 소소한 것부터 문화 전반의 질적 향상까지 주도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지만 1979년 사망까지 편집장 자리를 지킨 지오 폰티 이후에는 저명한 디자이너들이 이끌며 포스트 모더니즘, 네오 아방가르드 등의 담론을 펼쳤다. 현재 '10x10x10' 프로젝트로 2028년 다가올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며 매년 세계적인 건축가 1명을 편집장으로 선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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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를 위한 록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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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록 음악은 저항 정신을 표현하는 매개체이자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수십 년 전 통용되던 이 젊음의 코드가 낯설기만 한 MZ세대는 무엇이 당대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했는지, 기성세대에게서 간간이 들었던 그 '영광의 시절'의 주역에는 누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귀가 가는 밴드가 있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힙합과 아이돌 음악에 익숙한 이들에게 록과의 접점을 마련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랩 스타들인 포스트 말론(Post Malone)과 다베이비(DaBaby)가 공히 노래한 곡이 '록 스타'다.

이 리스트는 1950년대 태동한 이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록 음악에 주목한다. 달라진 환경과 흘러간 시간만큼 록과 멀어진 현세대에게도 시대를 막론하고 통하는 록 밴드에는 누가 있는지, 지금 젊음의 시선에서 '그래도 이 밴드만은 챙겨야 한다'고 공감할 수 있는 레전드 10팀을 선정했다.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

핑크 플로이드가 1973년 발표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위대한 앨범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변에 록 음악을 좀 듣는다고 하는 광(狂)들의 추천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 찬사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이 거룩한 밴드는 실험적 요소들을 음악에 대거 투입해 곡의 구성과 연주 방식의 범위를 넓혔다.

실제로 이들 음악은 기존의 일반적인 록과 달리 웅장한 사운드를 제공한다. 장엄한 아방가르드 록 사운드가 주는 장대한 분위기의 핑크 플로이드 음악은 청취를 거듭할수록 다채로운 감상이 가능하다. 유행하는 대중음악보다 진중하고 진취적인 체험을 원한다면 핑크 플로이드가 그 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해줄 것이다. 특히 대표곡 'Comfortably numb' 속 심금을 울리는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 솔로는 록연주가 선사할 수 있는 감동의 극치다.

추천곡:'Us and them', 'Wish you were here', 'Another brick in the wall, pt.2', 'Comfortably numb'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레드 제플린은 MZ세대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록 밴드의 형상을 지녔다. 긴 머리카락과 타이트한 바지, 그리고 단추를 풀어 헤친 화려한 셔츠를 입은 패션은 젊은 세대가 가장 먼저 형상화하는 록 밴드 이미지의 전형이다. 높은 음역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로버트 플랜트의 록 보컬 스타일, 기타리스트들의 영원한 로망인 지미 페이지의 연주도 역시 마찬가지다.

레드 제플린은 밴드 구성원 모두가 해당 포지션에서 전설적인 위치를 점하며 8개의 앨범을 발매했다. 헤비메탈, 블루스, 사이키델릭, 레게 그리고 월드뮤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한 그들의 유산은 록 음악의 교본으로서 회자된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록 밴드의 최고 명곡에 대한 의견은 저마다 분분하지만 밀도 높은 커리어 속 굳이 하나를 택한다면 'Rock and roll'에 표를 던지고 싶다. 대단한 연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목이 나타내듯 레드 제플린이 로큰롤 그 자체이기 때문.

추천곡:'Heartbreaker', 'Rock and roll', 'D'yer mak'er', 'Fool in the rain'




벨벳 언더그라운드 (The Velvet Underground)

현대 미술의 거장이자 숱한 명작들을 남긴 팝 아티스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은 현재까지도 위용을 떨치고 있다. 당대 뉴욕 문화의 상징이었던 그는 비단 시각주의 예술뿐만 아니라 음악 분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흰 배경에 덩그러니 놓인 큰 바나나 하나와 'Sunday morning', 'Femme fatale' 등으로 잘 알려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1집 커버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외부의 입김과는 별개로 이 앨범에 담아낸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천재성은 새바람을 몰고 왔다. 전위적 성격의 사운드를 강조하며 당시 만연하던 히피즘에 대적하는 도발적인 주제를 다뤘던 이들의 음악은 가까운 미래 펑크(Punk) 록과 뉴 웨이브 음악에 막대한 영향력을 선사했고 나아가 얼터너티브 록의 기원으로도 여겨진다. 활동 당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실현한 단순하고 아름다운 록은 뉴욕 언더그라운드 신의 활로를 개척했다. 따라 하기 쉽고 매력적이다. 출시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 음악이 유독 세련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천곡:'I'm waiting for the man', 'Ride into the sun', 'Sweet Jane', 'Who loves the sun'




에이씨디씨 (AC/DC)

일관적으로 추구한 8비트 로큰롤에 타협이란 없었다. 한결같이 직진한 쓰리 코드의 포효는 전 세계 록 시장을 강타하며 약 5,000만 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하드 록 최고의 걸작 <Back In Black>을 배출해낸다. 최근엔 마블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와의 인연으로 더 친숙하다. 극 중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화려한 등장 신에 어김없이 이들의 음악이 흐르는데 스크린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맹렬한 에너지까지도 모두 8비트 로큰롤이다.

때로는 단순한 게 귀에 맴돈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8비트 드럼 위 얹어지는 강렬한 리프, 그리고 폭발하는 고속 질주까지, 스트레스를 날리기엔 이만 한 게 없다. 복잡한 머릿속을 말끔히 정리해주는 에이씨디씨의 음악은 아마 지금을 살아가는 MZ세대들에게 일종의 진통제가 될 것이다.

추천곡:'T.N.T', 'Whole lotta Rosie', 'Highway to hell', 'You shook me all night long'




레너드 스키너드 (Lynyrd Skynyrd)

발음하기 어려운 밴드다. 레너드 스키너드는 멤버들의 학창 시절 고등학교 교사 이름을 익살스럽게 변형해 그룹명으로 삼았다. 올맨 브라더스와 미국 남부 블루스, 컨트리의 융합인 서던 록(Southern rock) 시장을 양분하다시피 해온 그들은 1970년대 3대 록 클래식으로 꼽히는 'Free bird'를 비롯해 'Tuesday's gone', 'Simple man' 등을 수록한 1집 외에도 수많은 록 고전들을 쏟아냈다.

리드 기타리스트가 셋이나 되는 레너드 스키너드의 풍성한 사운드는 미국 남부를 떠올리게 한다. 개러지와 블루스, 그리고 하드 록을 결합한 토속적인 질감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앨라배마를 달콤한 내음이 가득한 고향으로 둔갑시킨다. 1977년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3명의 멤버를 잃기 전까지 그들은 서던 록의 대표 주자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광대한 하모니를 그려냈던 대가들의 애달픈 결말은 먹먹한 그리움을 남긴다.

추천곡:'Free bird', 'Tuesday's gone', 'Give me three steps', 'Sweet home Alabama'




클래시 (The Clash)

얼마 전 개봉한 디즈니 영화 <크루엘라> 사운드트랙에 클래시의 대표곡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포함되었다. 펑크(Punk) 록의 원조 격인 그들은 작품 속 배경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런던 젊은이들을 대변했다. 당시 갖은 사회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형국에 직면한 영국의 심장부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불꽃을 이어받은 이 4인조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응축된 분노를 눌러 담은 노랫말이 곧 시위 문구가 되어 거리에 울려 퍼졌고, 그들이 고취시킨 저항 정신은 후배 펑크 뮤지션들의 귀감이 되었다.

메시지 측면에서 혁명과 노동 계급에 집중한 동시에 음악적, 장르적 모험도 서슴지 않았다. 스카, 레게의 요소를 접목한 곡들은 클래시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하면서 쓰리 코드의 단순함 아니면 소음으로 치부된 펑크 록에 고(高) 퀄리티를 부여했다. 기억해야 할 클래시의 본질은 <London Calling> 앨범 표지 속 베이시스트 폴 사이모넌이 기타를 내리꽂는 모습으로 단번에 압축된다.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투쟁 정신은 모든 게 위축된 MZ세대에게 진정 록 스피릿이 무엇인지 일깨워줄 것이다.

추천곡:'White riot', 'I'm so bored with the U.S.A', 'London calling', 'Rock the casbah'




토킹 헤즈 (Talking Heads)

'혁신'이라는 키워드는 현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토킹 헤즈가 구축한 혁신적인 음악 세계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갈망하는 MZ세대의 니즈와 맞닿아 있다. 뉴욕의 CBGB 클럽에서 라몬즈(Ramones)의 오프닝 공연을 맡으며 커리어를 시작한 그들은 1977년 데뷔작 <Talking Heads'77>로 지적 매력을 한껏 드러내며 단숨에 참신한 그룹으로 발돋움한다. 이후 브라이언 이노가 프로듀서로 가세하면서 최상의 시너지를 발휘해 미국 뉴 웨이브 신의 수작을 연이어 발표하며 주가를 올렸다.

독특한 음악관과 더불어 토킹 헤즈가 대중의 뇌리에 깊게 각인된 까닭은 프론트 맨 제임스 번의 지분이 압도적이다. 훤칠한 키와 번듯한 외모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펼치는 기행에 가까운 라이브 퍼포먼스가 주된 요인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격렬한 춤사위는 그들 음악의 일부이자 상징이 된 지 오래. 그가 보여준 쇼맨십도, 딴 프론트맨에 비해 다소 엉성한 가창법을 구사하는 것도 다 신선하다. 매직 밴드!

추천곡:'Psycho killer', 'Life during wartime', 'Once in a lifetime', 'Road to nowhere'




폴리스(The Police)

표준화된 록의 시대에 폴리스는 영국 뉴 웨이브 신과 함께 화려하게 등장했다. 펑크 록에서 곧장 장르를 확대하여 레게, 재즈 등을 뒤섞은 사운드를 건설했고 매 앨범 선보인 변신술은 정체된 시장에 반향을 일으키며 미 대륙까지 뻗어갔다. 이러한 '뉴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에는 이미 우리에게 관능적인 영국식 발음과 함께 대표곡 'Englishman in New York', 'Shape of my heart' 하면 바로 떠오르는 가수 스팅(Sting)이 있다.

밴드 시절 스팅의 모습은 솔로 시절과는 상반된 반전 매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기타리스트 앤디 서머스, 드러머 스튜어트 코플랜드와 완벽한 합을 이루며 짧은 활동 기간 발매한 5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선구적인 프로젝트로 만들어냈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득한 주요인은 삼각 편대의 팽팽한 균형이다. 감미로운 보컬, 파워풀한 드럼과 어우러지는 앤디 서머스 특유의 '쫀득한' 기타 리프는 매번 놀라움을 안겨준다.

추천곡:'Can't stand losing you', 'Message in a bottle', '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 'Every breath you take'




뉴 오더 (New Order)

클럽 음악의 형태는 현재 힙합과 EDM으로 정형화되었지만 1980년대 영국 클럽 신에 울려 퍼진 음악은 지금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렉트로닉 록 요소와 신스팝을 가미한 뉴 웨이브 음악들이 맨체스터를 기반으로 흘러나왔고 그 중심에는 비극을 정면으로 돌파한 뉴 오더의 신화가 있었다.

조이 디비전의 그늘에서 출발한 뉴 오더는 전신 멤버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슨을 주축으로 재결성했다. 댄서블한 록 사운드를 정직한 배열 아래 흡인력 있는 멜로디로 구사한 감각적인 문법으로 그들은 서서히 조이 디비전의 잔향을 지워갔고 훗날 '록 댄스'의 미친 맨체스터, 이른바 매드체스터라는 새로운 음악 형태의 근원이 된다. 물론 이 드라마틱한 서사는 멤버들의 역량이 탁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 단연 최고는 '인간 메트로놈' 드러머 스티븐 모리슨. 자유자재로 리듬을 잘게 쪼개고 붙이는 그의 시그니처 연주는 언제 들어도 일품이다.

추천곡:'Age of consent', 'Love vigilantes', 'Bizarre love triangle', 'Round & round'




큐어 (The Cure)

큐어는 1970년대 말 태동한 고딕 록이라는 하위문화를 대표했다. 고스 족의 특징인 창백한 피부, 두꺼운 아이라인, 그리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기괴한 화장법을 선보인 채 내면의 분노를 음울한 감성으로 담아 표출한 로버트 스미스는 고딕 록의 효시가 된 조이 디비전의 뒤를 이었다. 결성 초기 발매한 고딕 3부작을 대표적으로 작품들 속엔 사회의 어두운 측면과 허무주의가 만연하게 드러난다. 현재까지도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고딕 문화에 입문하기에 제격이다.

큐어는 꾸준함과 장수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데뷔 이래 다양한 장르에 일가견을 보이며 고딕 록, 얼터너티브 록 이외에 주류 팝 분야까지도 좋은 성적표를 거두었다. 로버트 스미스의 음산한 무드와 전형적인 기타 팝 감각이 의외의 시너지를 발휘한 것. 지금까지 대중에게 유명세를 치른 곡들도 이와 결을 같이 한다. 울분을 토하는 보컬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교차하는 아이러니의 매력, 이게 큐어다.

추천곡:'Cold', 'Just like heaven', 'In between days','Friday I'm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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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 흐름을 잇는 다섯 편의 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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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의 호쾌한 역습이었다. 듀오 실크 소닉(Silk Sonic)의 'Leave the door open'은 현재 R&B 트렌드와는 다른 외형이었음에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다. 물론 히트의 동력으로 멤버들의 높은 인지도도 한몫했을 테다. 앤더슨 팩(Anderson .Paak)은 흑인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하며, 브루노 마스(Bruno Mars)는 세계적인 스타라서 인기를 얻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1970년대 솔뮤직을 근사하게 복원했기에 음악 팬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실크 소닉만 예스러운 스타일을 소화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화되는 경우가 적으며, 상업적인 성공을 맛보는 이가 얼마 안 될 뿐이다. 복고는 한철 반짝하지 않고 음악계 곳곳에 자리해 있다. 어떤 뮤지션은 출범부터 복고를 아예 자신의 지향으로 삼기도 한다. 젊은 세대는 이런 음악이 익숙하지 않기에 신선하게 여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음악 팬들은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새로운 것, 즉 '뉴스탤지어'(new-stalgia)라서 반갑게 받아들인다. 레트로 흐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앤 마리(Anne-Marie) 'Friends'

국지성 복고다. 영국 가수 앤마리의 2018년 싱글 'Friends'는 특정 부분에서만 타임머신을 가동한다. 노래를 프로듀스한 미국 디제이 마시멜로(Marshmello)는 팝의 자재를 쌓아 올리다가 2분 31초부터 2분 49초까지 19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마감재를 붙인다. 얇게 고음을 내는 신시사이저 연주. 미국 서부 힙합의 특산물인 지펑크(G-funk)가 나타낸 특징적 사운드다. 미국 펑크 밴드 오하이오 플레이어스(Ohio Players)가 1972년에 발표한 'Funky worm'의 신시사이저 연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프로듀서 겸 래퍼 닥터 드레(Dr. Dre)는 이를 샘플로 활용하면서 지펑크의 주요 틀 하나를 완성했다.

마시멜로는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을 하지만 파 이스트 무브먼트(Far East Movement), 릴 핍(Lil Peep), 주시 제이(Juicy J), 미고스(Migos), 로디 리치(Roddy Ricch) 등 여러 래퍼와 활발하게 협업해 오고 있다. 이제는 그가 힙합 비트를 만드는 게 어색하지 않다. 'Friends'에 지펑크 요소를 넣은 것으로도 힙합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그도 90년대 힙합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데스티니 로저스(Destiny Rogers) 'West like'

미국 가수 데스티니 로저스가 5월에 발표한 'West like'도 청취자들을 90년대로 안내한다. 이 시기 미국 서부에서는 지펑크와 함께 치카노 랩(Chicano rap)이 성행했다. 멕시코계 미국인을 칭하는 스페인어 '치카노'가 이 음악을 하는 집단을 직접적으로 알려 준다. 이와 함께 치카노 랩은 펑크에서 추출한 묵직하면서도 느긋하게 연출한 드럼 비트, 연하게 들어간 신시사이저, 토크박스 보컬을 음악적 특징으로 둔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를 찬양하는 'West like'는 랩은 하지 않지만 치카노 랩의 전형을 전시한다. 사실 치카노 랩의 음악적 속성은 지금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치카노 랩의 영토가 현저히 좁아져서 'West like'가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추억의 부피가 곱절이 된다. 서부에서 유행한 로우라이더 자동차와 로우라이더 자전거, 멕시코계 사람들이 즐겨 입는 디키즈 면바지, 컨버스 운동화, 체크무늬 셔츠 등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차량과 출연자들의 복장이 또 한 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데스티니 로저스가 캘리포니아주 태생인 데에다가 어머니가 멕시코 혈통이라서 음악뿐만 아니라 영상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2019년 데뷔 싱글 'Tomboy'에서 자신은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라고 천명한 데스티니 로저스는 'West like' 뮤직비디오에서도 활달한 면모를 보여 준다.




듀랜드 존스 앤드 디 인디케이션스(Durand Jones & The Indications) 'Love will work it out'

미국 인디애나주 출신의 듀랜드 존스 앤드 디 인디케이션스는 솔뮤직 리바이벌을 기치로 내걸고 결성됐다.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재키 윌슨(Jackie Wilson), 샘 쿡(Sam Cooke),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 같은 가수들이 떠오른다. 그만큼 옛날 솔뮤직의 질감을 잘 구현한다. 하지만 거칠고 투박했던 2016년의 첫 앨범과 달리 2019년에 낸 2집에서는 훨씬 부드러운 사운드를 들려줬다.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이나 필라델피아 솔 그룹들이 연상되는 음악이었다. 그래도 두 음반 다 멋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듀랜드 존스 앤드 디 인티케이션스는 7월 말 세 번째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정식 출시 전에 싱글 세 편을 공개한 상태. 'Love will work it out'은 R&B의 인자를 주입한 80년대 소프트 록에 보비 콜드웰(Bobby Caldwell)의 1978년 싱글 'What you won't do for love'를 섞은 느낌이다. 'Witchoo'는 가벼운 펑크이며, 'The way that I do'는 디스코다. 이번에도 그룹의 음악적 방향은 과거에 닻을 내리고 있지만 곡은 점점 매끈해지는 중이다.

밴드의 드러머이자 세컨드 보컬리스트인 에런 프레이저(Aaron Frazer)도 올해 첫 솔로 앨범 <Introducig...>을 발표했다. 애초에 그룹을 만들기 전부터 에런 역시 옛날 솔뮤직에 강한 애정을 갖고 던 터라 솔로 앨범도 당연히 과거의 정서를 복원한 노래들로 꾸렸다. 가성을 활용해 곡들은 무척 부드럽게 느껴진다. 6, 70년대 솔뮤직을 좋아하는 이라면 웬만해서는 반한다.




덤프스타펑크(Dumpstaphunk) <Where Do We Go From Here>

펑크가 흔하지 않은 시대다. 아주 가끔 마크 론슨(Mark Ronson)의 'Uptown funk' 같은 히트곡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브루노 마스의 인지도 덕에 가능한 성공이었다. 게다가 미끈하고 댄서블한 맛이 있어야 뜰 수 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괄괄하고 진한 음악을 들려주는 미국 밴드 덤프스타펑크는 단비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올해 발표한 세 번째 정규 앨범 <Where Do We Go From Here>도 매우 억세다. 그러면서도 매력적이다. 관악기로 경쾌함과 풍성함을 발산하는 가운데 힘찬 보컬이 노래들의 열기를 높인다. 때로는 하드록을 접목해 펑크 록을 들려주기도 하며, 어떤 곡에서는 가스펠 형태를 내보이기도 한다. 앨범 사이사이 위치한 연주곡들은 현장감 넘치는 공연처럼 느껴질 듯하다. 펑크가 고사해 버린 지 오래됐지만 덤프스타펑크의 음악으로 70년대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로라 음불라(Laura Mvula) <Pink Noise>

이렇다 할 히트곡은 없지만 영국 가수 로라 음불라(Laura Mvula)는 오묘하면서도 단단한 음악으로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3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ing To The Moon>은 체임버 팝, 오케스트럴 팝에 근간을 둔 네오 솔 스타일로 독자성을 뽐냈고, 2016년에 낸 2집 <The Dreaming Room>은 넘실거리는 리듬을 추가한 얼터너티브 R&B로 또 다른 특색을 내보였다. 또한 R&B의 유연한 창법을 사용하는 대신 보컬을 여러 겹 포개는 연출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R&B를 주메뉴로 삼던 로라 음불라는 이달 출시한 3집 <Pink Noise>에서 팝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가 하는 팝은 밋밋한 팝이 아니다. 80년대의 사운드를 재현한 음악이라서 흥미롭다. 그 시절의 신시사이저, 드럼 톤을 흡족스럽게 흉내 냈으며, 여백이 있는 믹싱까지 완수해 과거를 되살린다. 팝을 하든 신스팝을 하든, 그때의 분위기가 진하게 묻어난다.

영국 록 밴드 비피 클라이로(Biffy Clyro)의 프런트맨 사이먼 닐(Simon Neil)과 함께 부른 어덜트 컨템퍼러리 'What matters'의 뮤직비디오도 재미있다. 의상, 소품, 마이크 모두 80년대에 익히 보던 것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얼핏 보면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와 마이클 맥도널드(Michael McDonald)가 듀엣을 하는 그림이다. 복고로 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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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한국 R&B/Soul 명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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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도출한 한국어 랩의 가능성과 이태원 클럽 문나이트를 일대로 벌인 춤꾼들의 춤사위. 이는 나아갈 새천년의 국내 대중음악계 주류를 흑인 음악으로 맞바꾸어 놓은 초석과도 같았다. 그 후 21세기를 맞은 2000년대는 말하자면 한국이 흑인 음악에 열광, 열중하던 시기였다. 바다 건너 흑인들의 것인 줄만 알았던 '소울'을 한국화한 혼혈, 재미 교포 출신 가수들의 선구적인 활약과 그를 우리 정서에 맞게 녹여낸 '소몰이 창법'의 물결까지. 다양한 형태의 히트곡들이 줄을 이었다. 가창력의 척도가 스크리밍(Screaming) 등 록 기반의 고음에서 알앤비 특유의 정교한 기교, 꺾기로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알앤비/소울은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익숙하다. 빌보드 차트에서 목도하듯 세계 음악 시장을 주름잡는 블랙 뮤직은 그 위세를 그칠 줄 모른다. 비대해진 힙합의 지분으로 이제는 랩과 노래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싱잉 랩이 새 시대의 창법으로 성행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지났지만, 200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를 빛낸 알앤비/소울 명곡들의 보다 날 것의 감성을 들어보자. 지금의 국내 흑인 음악 트렌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추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 - 어제처럼 (2000)

재미교포 가수 제이의 시작이 댄스였다는 사실은 지금 와서는 새삼 믿기 어렵다. 그를 기억하면 언제나 '어제처럼~'이 귓가에 맴돌기 때문이다. 1집의 존재감은 그만큼 미미했지만 소울로의 안정적인 노선 변경에 성공한 차기작은 그의 진가를 발휘한 튼실한 앨범이었다. '어제처럼'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감성을 제공한다. 알앤비하면 흔히 기교 섞인 목소리나 짙은 감정선을 연상하곤 하지만 '어제처럼'은 그와 사뭇 다른 부드럽고 담백한 멜로디와 여린 목소리로 유통기한이 긴 제이만의 소울을 잉태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은 노래는 2000년도 SBS 가요대상 신인가수상 등을 석권하며 그에게 꿈같은 한 해를 선물했다.




박화요비 - 그런 일은 (2000)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재능 있는 아티스트는 때로 놀라울 정도로 이른 때에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등장부터 숙성된 가창력을 자랑하며 박정현과 국내 알앤비 신을 양분한 화요비이지만 이 노래를 부를 당시 그의 나이 고작 19세. 머라이어 캐리의 발라드 'My all'에서 따온 앨범 제목이 만용으로 보이지 않는 진짜 '노래 잘하는 신인'의 출현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명하게 들리는 숨소리의 호소력과 천부적인 완급 조절이 캐리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과의 유사성을 차치하고 그가 내뿜는 소리 자체에 귀 기울여 보자. 말할 때 육성에서 알 수 있는 낮은 톤, 여기에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허스키한 보이스가 실로 매력적이다. 성숙한 음성과 대비되는 여린 이별 가사가 더해져 더욱 가슴 아린 화요비표 알앤비 발라드.




박정현 - 꿈에 (2002)

솔리드의 김조한과 함께 국내 알앤비 보컬의 선두주자로 통하는 박정현이다. 여러 장르를 좋아하는 그는 자신을 알앤비 가수로 결정지어 결부하기를 거부하지만, 누가 뭐래도 당대 우리나라 알앤비 돌풍의 주역은 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데뷔 이래 'P.S. I love you',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멋진 곡을 많이 들려줬다. 하지만 '꿈에'만큼 강렬한 곡은 그에게도, 다른 가수에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안긴 극적인 구성의 놀라움이 지금도 유효하다. 공일오비 정석원이 편곡한 몽롱한 국악기 소금 반주를 시작으로 '꿈에서 만난 옛 연인'이라는 주제 아래 기쁨과 절망, 잠에서 깬 후의 아련한 감정을 차례대로 연결 짓는 노래는 '스토리텔링'의 정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박정현은 이 대담한 서사에 더욱 높은 수준의 입체감을 조각한다. '보컬 올림픽'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 약간은 부정확한 발음에서 오는 특유의 느낌과 절마다 창법을 변조해나가는 완급 조절, 막힘 따위 모르는 막강 성량이 결합하여 폭발한다. 작곡가의 상상 그 이상을 실현하는 가수의 놀라운 역량이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Missing you (2003)

대중에게 익숙한 국내 알앤비 명곡을 살펴보면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사실상의 알앤비 '발라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림과 애절함에 흔들리는 이 우리 정서는 이별 등 연모의 감정에 유독 취약하다. 'Missing you'는 그 한국적 감수성의 표본이다. 대중의 보편적 가녀림을 파고드는 섬세하고 애절한 노랫말의 주제는 이별을 넘어 '사별(死別)'이다.

다양성과 장수의 목적 아래 SM이 내놓은 이들의 시작은 비주얼부터 화려한 아이돌이었지만 성숙한 느낌의 곡만큼은 어른 취향 가까워 심심할지라도 긴 수명을 보냈다. 만화 속 소울메이트처럼 외형적으로도 잘 어울리는 환희와 브라이언은 이 노래에서 각각 터프한 흉성과 맑은 미성의 매끈한 조화로 모범적인 듀오의 콤비 플레이를 전시했다.




휘성 - With me (2003)

휘성은 풋내가 없는 신인이었다. 서태지, 신승훈의 상찬을 등에 업고 등장한 괴물 신예에게 1집 발라드 '...안 되나요...'는 공전의 히트를 안겼지만 가수는 그 이상을 넘봤다. 차기작 <It's Real>에서 마음껏 발산한 원숙미야말로 '진짜 자신'을 선언한 예술가적 발로였다. 이 중심에는 지금의 휘성을 있게 한 'With me'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미디엄 템포 장르를 멋들어지게 구현했다. 전작에 비해 강해진 장르적 색채에도 리드미컬한 드럼 타격이 주도하는 어반한 분위기는 대중에 가닿기에 충분했다. 신선함을 익숙함으로 맞바꾸는 작곡가 김도훈의 완연한 멜로디 라인에 묵직한 톤으로 능란하게 박자를 타는 휘성의 자신감 넘치는 활약은 거부할 수 없는 성공 공식이었다. 음반 판매량 40만 장을 넘기는 가공할 만한 위세를 누렸다.




빅마마 - 체념 (2003)

여타 멤버의 가창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더라도 노래 잘하는 가수 한두 명만 중심을 잡아줘도 그 팀은 실력파 그룹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네 명이라면? 요즘 시쳇말로 '사기캐'다. YG 엔터테인먼트와 알앤비 전문 레이블 엠보트(M-Boat)의 의기투합이 발굴한 빅마마가 그렇다. 당시 가요계 립싱크 행태를 꼬집은 'Break away'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등장은 비주얼 가수에게 응수하는 '가창력 그룹'의 도발적인 한 방이었다.

이영현이 홀로 작사, 작곡, 노래한 솔로곡 '체념'이 팀의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 이별 경험을 토대로 작사한 노랫말과 선 굵은 선율이 이영현 특유의 카랑한 고음을 타고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다. 양현석과 엠보트 대표 박경진은 '10년이 지나도 듣기 좋을 곡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팀을 꾸렸다던데, 이들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했다. 벌써 18년째 애청, 애창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소토 유니온 - Think about' chu (2003)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소중한 활약이었다. 국내 흑인 음악 신의 선구자이자 보석과도 같던 팀 아소토 유니온의 빛나는 합동은 아프리카 부족 제사 의식용 북 '아소토'를 발췌한 그룹명처럼 원시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연주를 들려줬다. 드렁큰 타이거가 주도하던 크루 무브먼트의 밴드로서 이들이 보여준 것은 흑인 음악 원류에 관한 치밀한 탐구. 포화 상태에 있던 유사 블랙 뮤직들 사이에서 진정한 '검은 맛'이 무엇인지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연주곡과 영어 곡의 큰 비중 속 'Think about' chu'의 우리말 가사가 빛난다. 짙은 호흡을 섞어 허스키한 톤을 구사하는 김반장의 보컬이 소울 본연의 필(Feel)을 적극 구현하면서도 그 중심에 또렷이 생동하는 노랫말은 소울과 한국어의 반가운 악수를 보는 듯하다. 귀에 착 감기는 베이스 그루브와 서정성을 가미한 전자피아노의 끈적거림을 매끈하게 마감질한 사운드는 리마스터의 필요성에 반기를 든다. 2003년도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가 나왔다.




나얼 - 귀로 (2005)

브라운 아이즈로 점화한 미디엄 템포 붐과 브라운 아이드 소울로 완성한 갈색 하모니의 정수. 결과물로 보여준 영향력도 지대하지만 이렇게 한 장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준 아티스트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같은 우물을 파는 뚝심이야말로 나얼이 국내 알앤비/소울의 대명사가 된 원동력이다. 2005년 발매한 <Back To The Soul Flight>는 옛 명곡을 소울로 재해석한 소울에 바치는 그의 러브레터였다.

중독적이다 못해 최면적인 도입부 피아노 반주에 기절하고 나면 소울 도인(道人)의 경지를 탐하는 나얼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물을 머금은 듯 애잔하고, 탁월한 공명감의 두성이 아름답다. 흉내 의지를 꺾는 화려한 애드리브를 정밀하게 스케치해낼 때면 이게 우리나라 가수가 맞나 싶다. 심지어 이는 1989년 박선주의 원곡을 여자 키 그대로 부른 것이다. 나얼은 독보적인 노래꾼이다.




BMK - 꽃피는 봄이 오면 (2005)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등 1960년대 소울 거장들의 육성을 들어보자. 원시의 소울은 흑인의 민권 회복과 자긍심 표출을 위한 분출구와 같았으며 이들의 보컬은 필히 웅변적인 힘, 우렁찬 스태미너를 특징으로 한다. BMK의 스피커가 터질 듯 묵직하고 강력한 목소리와 비교해보자. 그들처럼 차별에 대한 격노나 한을 노래하지는 않아도, 무자비한 성량만큼은 그것의 전형과 쏙 빼닮았다. 과연 '소울 국모'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절절함도 여기서 온다. 산뜻한 봄날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버린 감정의 파고를 노래하는 이 곡은 간주도 없이 빽빽하게 채운 보컬이 굵직한 멜로디를 뽑아내고 이내 극단의 감정을 토해내는 후렴부로 치닫는다. '찰나 같아 찬란했던 그 봄날'처럼 이별의 심정을 지독하리만치 아름답게 대변하는 노랫말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알고 있던 봄의 계절감을 잊게 할 만큼 애틋하다. 소개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히트곡이 많지 않은 그이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 하나만으로 계절만 되면 소환되는 스테디셀러의 주인공이 됐다.




윤미래 - What's up! Mr. good stuff (2007)

전략은 중도, 무기는 실력. 윤미래는 날고 기는 신의 강자들 사이에서 잔학한 쌍칼 검법의 가능성을 창출한 독보적인 멀티 플레이어다. 대중과 장르 애호가를 모두 사로잡기 위한 랩, 노래의 현란한 휘날림과 속속 발매한 발라드 히트 넘버들로 양 분야 모두의 정상급 인정을 확보한 그였다. 그러한 완벽에 가까운 이도류의 특성을 압축하고 블랙 뮤직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위상을 철저하게 굳힌 작품이 <t 3 Yoonmirae>다.

수록곡 'What's up! Mr. good stuff'는 리얼하다. 인트로의 거친 드럼에서 예고하듯 호쾌한 펑크(Funk) 그 팔딱거리는 참맛을 별다른 효과 없이 기타, 브라스 등 화끈한 세션의 합연만으로 전달한다. 역동적인 박수 소리와 브릿지 내레이션은 입체감 이상의 현장감을 부른다. 자유롭게 그루브를 타고 흐르는 윤미래의 보컬을 따라 춤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 노래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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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로 쏘아 올린 연대의 외침,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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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명진(드럼,보컬), 한정훈(기타,보컬), 배미나(베이스,보컬)

지난 7월 21일 <Marriage License> 즉, '결혼 허가증'이란 다소 독특한 이름의 신보가 발매됐다. 국내보다 해외 음악 시장에서 먼저 반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나름 굵은 역사를 가진 미국의 KEXP, 페이스트 매거진(pastemegazine), 밴드캠프(Bandcamp daily) 그리고 스핀(Spin)지가 이 앨범을 주목한다. 심지어 외국의 한 평론가는 작품을 “이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올해의 음반”이라 평했다. 도대체 이 앨범이 뭐길래.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작품은 대구 기반의 펑크(Punk) 밴드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의 두 번째 정규음반이다. 2013년 드럼과 보컬의 김명진, 베이스와 보컬을 맡은 배미나를 주축으로 결성됐다. 기타를 치는 멤버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2021년 유일한 남성, 한정훈과 만나 현재의 구성원을 갖췄다.

소포모어가 해외 평단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앨범 커버에 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약속'을 하듯 새끼손가락을 걸고 보란 듯이 치켜세운 가운뎃손가락. 끝으로 여느 살색과는 다르게 핑크색으로 덧칠해진 피부색까지. 이 거대한 은유와 비유는 선명한 메시지를 지닌 수록곡을 통해 풀어진다. 해석은 쉽다. 그룹은 '핑크'로 표상되는 '여성'의 편에서 서서 세상에 거대한 '퍽유(fuxx you)'를 날린다.


정규 2집 <Marriage License>의 음반 커버

한 가지 힌트를 더 활용하자면 그건 음반의 제목이다. 이들이 작품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결혼'이란 제도가 양분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이며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자들을 향한 연대다. 작년 여성 인디 뮤지션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We, Do It Together>에 수록되기도 한 '사적인 복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 / 내 세상이 그렇게 편해 보여” 날카롭게 쏘아 묻는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강렬한 기타 리프로 섬뜩하고도 간결한 이야기를 전하는 '차렷', “소리 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외치는 'Hit the corner' 역시 시선은 사회를 향한다. 예술계 블랙리스트와 지금도 계속해서 피해사례가 이어지는 N번방 사건이 바로 그것. 이렇듯 이들의 노래는 대표하고 대변하며 힘을 모아 저격한다.

눈여겨볼 것은 그 질료가 다름 아닌 '펑크(punk)'라는 점이다. 1980년대의 영국 밴드 섹스 피스톨즈를 중심으로 저항과 반항을 표출하기 위해 자주 소환된 펑크가 여기 지금 한국의 여성 중심 그룹의 자양분이 됐다. 특히 여성과 펑크의 만남은 비키니 킬(Bikini Kill), 홀(Hole) 등이 활약했던 1990년대 라이엇 걸(Riot grrrl) 운동에 뿌리를 두며 한층 진한 의미를 생성한다. 그러니까 유서 깊고 강한 여성들의 목소리 내기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국내보다 해외에서 이들의 펑크가 더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은 국외에 선행한 이러한 여성 록의 역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부장적인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적 분위기와 펑크 장르의 현재 인기 및 유행 정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말이다.


11개의 수록곡에 23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이 가하는 일격은 세다. 잦은 경우로 영어 가사가 등장하나 그 핵심은 같고 풀이 또한 어렵지 않다. '우리는 계속해서 오도바이를 탈 거야 / 우리는 살아 있거든' 노래하는 'Odoby', 봄은 시련 뒤에 오기에 오늘을 살고 오늘을 달린다고 말하는 'There is no spring', 늘 함께 있겠다고 손을 잡아주는 끝 곡 'Wish'. 음반에는 확실한 비판과 명징한 연대가 공존한다. 그러나 쉽고 직선적인 선율로 결국의, 최종적인 희망을 외치는 것이야말로 밴드의 특강, 특장점이다.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의 에너지가 더욱 큰 울림의 파고를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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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영화 , 대중의 유행 코드를 다시금 작동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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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22만 관객이 극장을 다녀간 <과속 스캔들>로 대중성을 확보한 감독 강형철의 두 번째 작품. 이 영화 <써니>(2011)로 그는 다시 한번 흥행감독의 면모를 발휘했다. 그야말로 연타석 홈런인 셈. 745만여 명 관객동원이라는 흥행기록이 말해주듯 영화는 대중 친화적인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오래전 학창 시절, 지난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고, 영화 속 내용에 푹 빠지게 하면서 '7080'세대들의 마음을 훔친다. 강형철 감독은 극 중 인물과 설정, 대사 등 여러모로 이전 명화들에서 익숙한 면들을 인용하고, 때론 경의를 표하면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된 기억들에 접속한다. 영화의 두 중심인물의 이름을 아예 '(임)나미'와 '하춘화'로 설정한 것부터 그러하다.

한국 가요계의 대모 격인 가수들의 이름을 영화의 인물에 접목해냄으로써 영화가 복고적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복고풍을 최대한 활용한 이 영화는 이야기의 구성이 최대강점, 그 흐름이 가히 압권이다. 이름만 대면 바로 떠오르는 스타 배우는 없지만, 출연진들의 실감 나는 연기가 매우 구성지다.



'나미' 역의 성인과 어린 시절을 연기한 유호정과 심은경, 춘화 역의 성인 버전과 소녀 버전을 보여준 진희경과 강소라, 이 두 핵심인물을 비롯해 주연과 조연 따질 것 없이 이야기 속 인물과의 매칭이 기막히다. 심은경과 강소라의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TV 드라마를 통해 친숙한 유호정과 7공주 '써니'의 영원한 '짱'으로서 오랜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진희경의 호흡은 그 중력을 더한다. 그 외에도 여고 시절과 성인 역을 제각기 소화한 다른 배우들도 예사롭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하긴 마찬가지. 본드 걸 상미 역의 천우희마저 소위 미친 연기로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추억 돋는 재미를 선사하는 “걸 파워”에 덧붙여 영화의 시대적 감성을 관통하는 음악은 영화의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7공주 멤버들의 주제가처럼 영화의 엔딩에 사용된 보니 엠(Boney M.)의 'Sunny'는 단연 최상의 선택. 신나는 디스코 송이지만, 졸업 후 흩어졌던 멤버들이 춘화의 장례식장에 모여, 물심양면으로 서로를 챙기며 정감을 나누는 장면에 이어지는 노래는 극적 감동의 절정을 선사한다. 데모 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된 극장 앞 쌈박질 장면에 사용된 그룹 조이(Joy)의 'Touch by touch'와 함께 1980년대 유로 디스코(Euro Disco)의 향수를 불러내는 선곡, 당시 롤러스케이트장 최고 인기곡의 감흥이 여전하다.


춘화의 유언으로 보니 엠(Boney M.)의 'Sunny'에 맞춰 다함께 춤을 추는 장면


데모 진압 장면

신나는 유로 디스코 송의 여세를 몰아 나미의 로맨스를 대변하는 1980년 <라붐>(La Boum)의 주제가 'Reality'(현실), 마돈나(Madonna)와 함께 1980년대 여성 팝의 경쟁 구도를 형성한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Time after time'(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과 'Girls just want to have fun'(여자애들은 그냥 재밌게 놀고 싶어요) 등, 친 라디오 성향의 올드 팝송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돼 그때 그 시절로의 회춘을 거든다. 참고로 신디 로퍼의 '타임 애프터 타임'은 턱 앤 패티(Tuck & Patti)의 가창과 반주로 영화의 도입부에 사용되었고, 종영인물자막(End Credits)과 더불어 나오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나미의 '빙글빙글'과 '보이네', 조덕배의 '꿈에', 마그마의 '알 수 없어',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과 같이 1980년대를 수놓은 우리 가요들의 등장도 여고시절의 향수를 불러내는 선곡, 팝송 팬과 가요 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특히 '나가수'나 '불후의 명곡' 등 세대를 아우르는 TV 예능프로그램들에 익숙한 대중들의 감성을 파고들기에 충분한 포석이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 <클래식>(2003)과 같은 전례에 비춰, <써니> 성공의 1등 공신이 탁월한 음악 선곡에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과속스캔들>에 이어 음악을 연출한 김준석 음악감독의 공이 크지만, 그 공력을 자신의 시각적 연출 안에서 발휘할 수 있게 한 강형철 영화감독의 극적 통찰력에 더 무게가 실린다.



지난 시대를 관통한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와 대중의 유행 코드를 대중의 기억 속에 다시금 작동하게 한 영화 그리고 음악, 둘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긴밀하냐에 따라 흥행력 폭발과 복고 열풍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영화 <써니>는 음악으로 입증했다. 그리고 이후 <응답하라> 시리즈와 2010년대 후반부터 뉴트로(Newtro=New Retro) 또는 신복고 유행 현상을 배태하기까지, 그 중심에 <써니>의 여파가 공존하고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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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현철 “원래 내 감성은 시티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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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이라는 음악 활동 공백기를 깨고 2019년 정규 10집 <돛>으로 돌아왔을 때 김현철을 소환한 건 시티팝 붐이었다. 갑자기 시티팝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젊은 세대는 퓨전 재즈를 기반으로 도시의 감성이 부르는 1980년대 김현철의 고감도 음악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한국의 시티팝 대부'라는 거창한 수식을 떠안으면서 뉴트로를 넘어 '오래된 미래'임을 증명했다.

세련된 편곡과 부드러운 음색으로 본인만의 색깔을 확립해 온 그는 막 내놓은 신보 <City Breeze & Love Song>에서도 도시, 바람, 햇살을 포함한 긍정적인 가사로 도시 속 바쁜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활력을 선사한다. 이즘은 2015년 진행했던 인터뷰 이후 6년 만에 김현철을 다시 만났다. 그는 무엇보다 이번 앨범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주기를 주문했다.



2017년 시티팝 붐이 일면서 13년 만에 정규 10집 <돛>을 발매했는데, 이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팬들은 빠른 복귀를 기다렸을 텐데 왜 이리 신보가 오래 걸린 건가? 코로나의 영향도 있었나?

우리 나이대의 가수들은 앨범이 올해 나왔으면 몇 년 후 꼭 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 않아서 13년간 작업을 쉬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든다. 코로나의 영향은 없었다. 정규 음반은 2년이 걸린 게 맞지만 그동안에 폴킴과 작업을 했고 <Brush>라는 EP를 발매했었다.

폴킴, 쏠, 죠지 등 젊은 인디 뮤지션과 협업했는데 이유가 궁금하다.

그들과는 모두 내 음악을 함께 작업했었다. 선배님들과 <Brush>앨범을 함께 하면서 느꼈는데 만약 후배들이 본인의 앨범을 작업하자고 요청한다면 나는 흔쾌히 참여할 것이다. 내가 선배님들께 받은 것들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걸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중간에 진행했던 <Brush> EP나, 폴킴과 함께 한 '선' 등의 작업은 어땠나?

재밌게 작업을 했다. 폴킴과의 작업뿐만 아니라 '오랜만에'라는 노래가 맥심커피 광고 음악에 깔리게 돼서 광고 버전의 음악을 따로 녹음하기도 했다. 특히 선배님들을 모시고 <Brush>음반을 재작할 때 매우 재밌었다. 주현미, 최백호, 정미조 선생님 나름대로 다들 너무 잘해 주셨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후배가 나에게 함께 작업하자고 한다면 언제든 같이할 의향이 있다.

과거 2015년 이즘과의 인터뷰에서 “정규 1집부터 10집까지 한 각론으로 묶어서 빨리 보관해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사실 곡은 이미 넘치고, 콘셉트 걱정도 제가 해왔던 대로 하면 되니 큰 고민은 없어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쌓아둔 곡을 원하는 콘셉트로 해서 <돛>을 낸 것인지?

두 장짜리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하다 보니까 22곡이 되었다. 그래서 이걸 나눠서 낼까 하다가 '내가 적극적으로 음악 할 시기가 기껏해야 20년인데 많이 소구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오늘 생각나는 노래를 내일 풀지 않으면 죽을 때 아깝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LP를 생각하고 제작했다. 제일 음질이 높기로는 20분에서 22분인데 LP는 한정돼 있어서 2장으로 냈다. 요즘 앨범을 내 인생에 있어 기록 점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음악을 아끼지 않고 앨범으로 인생의 기록점을 찍어 가고 있다.



이유 없이 음악이 싫어져서 음악을 쉬었다고 들었는데 다시 음악을 시작하겠다는 계기가 궁금했다.

쉬는 동안에도 방송하고 디제이, 교수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죠지라는 가수가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허가서를 요청했고 당연히 허락을 해줬다. 리메이크한 노래를 받아 들었는데 좋았고 발매 후 인기도 있었다. 그 후 죠지가 나에게 무대 게스트를 부탁했고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공연당일 타이거 디스코라는 디제이가 디제잉을 하러 왔는데 그날을 계기로 친해져 본인이 일하는 1969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함께하자고 요청했다. 클럽에 갔는데 100명이 넘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어서 신기했다. 요즘 미디움 템포의 음악이 뜬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이 붙었고 '음악을 다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악기도 사고 음악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앨범 제목 중 City Breeze는 시티팝을 전제하고 붙인 것 같은데 제목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이 그 감성이다. '오랜만에'라는 곡도 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3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는 도시와 바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수록곡 전곡을 시티팝으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 질문을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웃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요즘 리스너들이 즐겨 듣는 시티팝과 딱 맞아떨어졌다. 이번 앨범 제목이 <City Breeze & Love Song>이라서 사람들이 시티팝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아티스트는 내고 싶은 음악을 내는 거지 이 음악을 냈을 때 어떤 반응일지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이번 음반을 듣고 어떤 기자분이 “김현철씨 1집의 첫 번째 노래인 '오랜만에'가 이런 기분을 담고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오랜만에'의 가사 중 '나의 머리결을 스쳐 가는 바람이 좋은걸', '밤은 벌써 이 도시에'처럼 도시와 바람이 가사에 있다. 30년 전 처음 낸 앨범에 있는 그 감성이 자연스럽게 올 뿐, 요즘 시티팝이 인기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란 곡이 영어로 이야기하면 'City breeze & love song'인 격. 그 안에 사랑 이야기, 바람, 도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앨범의 현실적 가치가 떨어진 시점에서 앨범을 낸다는 게 조금 맥빠지지 않았나?

안타깝긴 하지만 세상이 달라지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LP로 내는 것보다 싱글로 내면 훨씬 음질이 좋다. 왜냐하면 적은 양의 정보를 빠르게 내니까 음질이 좋아진다. 그래서 싱글을 낸다.

앨범의 어떤 것에 역점을 두었나?

그냥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 내가 써 둔 곡이 발라드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로 선택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라는 가사 대신 '맘에 든다', '좋아한다'는 가사를 썼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심각하지 않게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음악을 하는 기분이 난다. 이번 앨범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으면 좋겠다. 음악이 가볍다는 게 아니라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음악.

'So nice!!'는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나?

뭐가 제일 So nice 한지 생각해 보다가 남녀가 만나는 첫 단계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세상이 So nice 하게 보인다는 게 떠올랐다. '요즘 어때 괜찮아?',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등의 전반적으로 연애 장려 가사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면서 16비트를 들으면 버겁기 때문에 아침에 대한 내용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8비트로 만들었다.

수록곡 '평범함의 위대함'의 가사는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이 튀고 싶어 하고 튀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오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평범한 게 제일 어렵고 제일 좋다고 느꼈다. 평범하다는 것은 사람이 동글동글하다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튄다는 것은 잘하는 부분이 올라오는 것. 하지만 사람은 모두 같은 함량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따라서 여기가 튀는 면이면 다른 반대편은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평범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앨범 제작 중 어려웠던 부분을 들려준다면?

앨범 제작을 순조롭게 진행하긴 했지만 쉬워 보이는 마지막 곡 '동창'이 가장 어려웠다. 마지막 부분에서 코러스를 넣어야 했는데 전문 코러스를 써서 낼 것인가 동창들을 불러서 할까 고민했는데 후자는 10집에서 해봤으니까 의미가 없을 듯해서 이번에는 상민이, 태윤이형 등 밴드 멤버분들과 함께 했다. 다들 노래를 잘했다. 그때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나머지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현보를 작사 파트너로 한 이유가 있었나?

제목은 내가 정했고 가사는 현보와 같이 썼다. 현보가 워낙 가사를 잘 쓰니까 내가 빈칸을 제시하면 그 안을 현보가 채워주었다. 내가 쓸 수 있는 가사를 나열해 두면 가사에 대한 데이터가 많은 현보가 낱말 빈칸을 채우듯이 가사 작업을 진행했다.

세션 분들만 봐도 대단함이 느껴진다. 녹음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혹은 특별한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녹음은 저번 10집 앨범과 비슷하게 진행했다. 옛날에는 녹음실에서 녹음하고 그 내용에 대해 믹싱을 하고 논의했는데 10집부터는 내가 집에서 다 만들어서 그 데모를 밴드 세션에 보내주면 그들은 똑같이 따온다. 데모를 들어보면 얼마나 똑같이 연주해오는지 알 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연주한다. 그렇다면 연주자들이 해야 할 게 뭐냐면 손맛이 확실히 달라서 베이스, 기타, 드럼 자체의 질감을 살려낸다.

11집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AOR 노래가 있었나?

AOR은 옛날부터 꾸준히 좋아해 왔다. 크레이그 런키(Craig Ruhnke), 짐 슈미트(Jim Schmidt), 브루스 히바드(Bruce Hibbard) 등의 노래를 들었다.

향후 공연 계획이 궁금하다.

공연이 쉽지는 않다. 내년쯤 되면 공연장이 풀리지 않을까. 공연 관련 얘기는 계속하는 중이다. 그리고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시티팝 페스티벌을 기획해 보고 싶다.

빌보드와 BTS 현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우리 세대 때만 해도 외국 뮤지션을 동경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가수가 전 세계적으로 추앙을 받고 영화 부문에서는 아카데미상을 받는 것들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절대 꿀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우리가 외국의 음악 요소를 따라 했었다면 이제는 외국인들이 거꾸로 우리나라 소리를 따라 한다. 즉, 우리나라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게 되었다. 옛날에는 외국 가수들 데리고 작업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도 된다. 우리나라 얘들이 더 잘 치고 더 잘한다.



신보에 담은 작가의 의도를 말해준다면?

노래는 발표하기 전까지는 내 것이지만 발표한 후는 듣는 사람의 것이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던 그건 본인의 마음이다. 작가의 의도야 있기는 하지만 그 곡을 잡고 있을 때까지인 거고 물 위에 띄워 놓고 나서는 물이 가는 데로 따른다.

어떤 아티스트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그건 여러분이 정하는 거다. 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혼자 생각하는 나에 대한 정의는 필요하지 않다. 나의 모든 행동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행동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내가 베스트드라이브가 되고 싶은 건 둘째 문제고 남이 인정을 해 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아티스트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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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로 하나된 온택트 축제, 제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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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한국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들의 연주 축제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이 어느덧 4회째를 맞았다. 작년부터 계속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올해도 그들의 기타 사운드는 현장이 아닌 라이브 송출 플랫폼 '줌(Zoom)'을 타고 비대면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공연의 규모는 2배로 커졌다. 전년도에 참여했던 6명의 기타 연주자는 물론이고 떠오르는 신진 기타리스트 6명까지 가세하며 8월 11일과 12일 양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1일차 공연에선 황린(ABTB), 천상혁, 임정현(FunTwo), 박창곤(이승철과 황제), 신윤철(서울 일렉트릭 밴드), 장호일(015B)이 무대에 나섰다.


 

임진모 음악 평론가의 소개와 함께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기타리스트는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 2>에서 활약 중인 황린이다. 방송에서도 선보였던 자작곡 'Keep your head low'는 거친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Fallacy'와 '±0'의 멋들어진 손가락 움직임은 화면 너머 관중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음악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능력이 뛰어난 그의 무대는 앞으로 써 내려갈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충분했다.

전자 기타의 강렬한 오프닝 이후 등장한 것은 천상혁의 어쿠스틱 기타였다. 의자에 앉아 손가락만 바삐 움직이며 강아지가 뛰어노는 모습을 그린 자작곡 'Before'로 몰입감 있는 연주를 선보였다. 평소 회초리 같은 날렵함을 가지고 있지만 이번 무대에선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를 편곡하여 은은함을 더했다. 하나의 작은 밴드 같은 핑거 스타일의 천상혁은 기타 한 대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2005년 '캐논 변주곡' 커버로 하루아침에 유튜브 스타로 거듭난 임정현은 3곡 모두 자작곡을 선보였다. 첫 곡 'All for one, one for all'을 마치고 영어로 자기소개를 한 그의 기타엔 착한 멜로디와 청량한 사운드가 묻어났다. 섬세하면서도 힘을 잃지 않는 연주는 'It's OK'와 'Story'에 담긴 희망찬 메시지를 전하며 격리에 지친 관중을 위로했다.

이승철과 황제의 박창곤은 귀에 익숙한 멜로디로 무대를 시작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희망의 찬가'를 곁들인 'Fresh drink'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힘내자는 의미를 내비쳤다. 터널 건너편의 희미한 불빛을 향해 나아가는 'The winter' 역시 힘든 시기를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는 따뜻함이 올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애잔한 희망을 전했다.


 

뒤이어 등장한 연주자는 스투지스 앨범 사진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신윤철. 수줍은 얼굴의 그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기타를 붙잡는 순간 숱한 기타 레전드들이 스쳐갔다. 'Voodoo chile(Slight return)'에서는 지미 헨드릭스와 스티비 레이 본, 'Cause we've ended as lovers'에서는 제프 벡과 로이 부캐넌, 'Purple rain'에서는 프린스와 신윤철 본인을 소환하며 축제의 의의와 가슴 속의 기타 영웅들을 되새겼다.

첫날의 마지막 무대는 기타페스티벌의 터줏대감인 015B 장호일이 장식했다. 산타나의 'I love you much too much'와 솔로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Aneka'는 정적인 연주로도 모던 록의 지존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축제는 015B의 신나는 노래 '아주 오래된 연인들'로 마무리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명곡은 강렬하면서도 직관적인 기타 사운드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해줬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서로가 직접 숨결을 섞을 순 없었지만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서로의 연주를 보며 응원과 감탄을 쏟아내는 기타리스트는 물론 40만원 상당의 기타에 당첨되어 내년에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는 관객까지 이날 참석한 모두는 기타로 이어져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장르가 되어 만들어낸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은 비대면 공연 문화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더 많은 기타인을 조명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2일차

대중음악의 역사는 밴드와 함께했다. 기타로 코드를 잡아 곡을 스케치하고 키보드와 베이스, 드럼과 합을 맞춰 완성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정통적인 문법이 되었다. 하지만 가상 악기를 활용한 미디 음악이 곡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고 생악기의 매력을 오롯이 드러내는 음악이 감소해 연주자가 설 자리도 제한되었다. 변화의 흐름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대중음악의 존속은 대중의 관심에 달려있기에 다양성 문제를 재고해 보자는 것. 최근 국내에선 <슈퍼밴드 2>라는 밴드 결성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며 팝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백예린이 이끄는 더 발룬티어스가 록 음악을 꺼내 들어 화제를 모았다.

한국 밴드 음악의 명맥을 이어가는 기타리스트들이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이란 공연으로 플랫폼창동61에 모였다. 각양각색 12인의 연주자들이 8월 11일, 12일에 걸쳐 멋진 연주를 들려준 이번 공연은 팬데믹 상황을 고려해 언택트와 온라인을 결합한 온택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비대면 공연이다 보니 현장에 별도로 좌석이 마련되지 않았으나 게스트 신분으로 오프라인 공연을 즐길 수 있었고 오랜만에 기타 본연의 음색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공연을 관람한 12일에는 양태환, 하세빈, 김진산, 박영수, 조필성, 유병열 총 6인의 기타리스트가 무대를 펼쳤다.


 

공연의 시작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 공연으로 화제를 모은 2005년생 '기타 신동' 양태환. 조금 긴장한듯한 십 대 소년은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몸을 흔들며 연주에 흠뻑 빠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스피드 메탈로 편곡한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엔 장엄과 폭발력이 공존했고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는 펑키(Funky)한 기타 인스트루멘탈로 재탄생했다. 연주 도중 장윤정의 '어머나!'를 매시업 하는 재치는 덤.



무대의 열기를 이어받은 기타리스트 하세빈은 비장한 표정으로 공연에 임했고 몸짓 하나하나가 연극 혹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했다. 서정적인 록 음악으로 두터운 팬 층을 보유한 밴드 네미시스의 주요 곡을 도맡아 만든 그는 선율을 표현하는데 특화된 기타 플레이를 선보였다. 옥타브를 넘나드는 현란한 건반 연주로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역량까지 드러냈다.


 

어쿠스틱 기타로 일렉트릭 기타의 굉음 사이를 완급 조절한 김진산은 <슈퍼밴드2>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인 또 한 명의 2005년생 천재 기타리스트다. 그는 기타의 몸통을 두드려 퍼커션의 효과를 주는 '타악기 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풍성한 리듬감으로 캐나다의 핑거스타일 기타 연주자 칼럼 그레이엄의 'Phoneix rising'을 커버했다. 하우스 밴드의 도움 없이 펼쳐진 유일한 공연이었지만 기타 한 대만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섬세한 연주가 돋보였다.


 

바로크 메탈 그룹 지하드의 기타리스트 박영수는 장발에 딱 달라붙는 블랙 진과 부츠로 과거의 향수를 자아냈고 잉베이 맘스틴의 'Far beyond the sun'을 연상케 하는 클래시컬한 속주는 화끈한 무대 매너와 맞물려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영화 <디 워>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지하드의 'Dragon of dreams'에서는 신시사이저 솔로잉과 투 베이스 드러밍으로 하우스 밴드의 연주력을 극대화하며 합주의 미학을 드러냈다.


 

곧이어 박영수와 대비되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기타리스트 조필성이 등장했다. 전인권의 '돌고 돌고 돌고'와 한영애 '누구 없소'를 펑키(Funky)한 스타일로 편곡한 그는 자신이 속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그룹 예레미의 복잡다단한 음악과 대비되는 편안한 연주로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인터뷰에서 밝힌 “이제는 기타를 테크니컬하게 잘 치려고 하기 보다는 기타 연주의 즐거움을 대중과 공유하고 싶다.”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조필성의 바통을 넘겨받아 피날레를 장식한 유병열은 윤도현 밴드의 초기 리더이자 비갠후의 리드 기타로 오랜 경력을 가진 베테랑 연주자다. 하드 록의 정통성에 펑크(Funk)를 버무린 연주는 와미 바와 볼륨 페달로 소리의 맛을 한껏 살린 자작곡 'Guitar guitar'에서 극에 달했다. 이번 공연의 기획에도 참여한 그는 “음악 선진국 중에 기타 연주 음악이 발달하지 않은 국가는 없다.”“대중들이 더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공연에 출연한 후배들을 대표해서 한 말일 것이다.


 

올해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은 팬데믹의 여파에서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현장에 투입된 많은 인원이 풍성한 사운드를 구현했으며 기타 연주자들을 뒷받침하는 하우스 밴드의 노련한 연주도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미팅 플랫폼 Zoom을 도입,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호흡했고 후드티 선물과 경품 추첨으로 흥미도 제공했지만 역설적으로 뮤지션과 관객의 직접 소통이 공연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임을 재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진행자의 말처럼 '열린 것 자체가 기적'인 이번 공연은 관객과 뮤지션이 시공간과 땀방울을 공유할 다음 기적의 도약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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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세 편의 음악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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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지난 8월 17일 막을 내렸다. 음악 콘서트를 비롯한 다양한 오프라인 콘텐츠를 자랑하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팬데믹이 야속했고 조성우 집행위원장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대폭 축소된 오프라인 행사의 빈자리를 양질의 선정작으로 메웠다.'고 표현할 만큼 이번 제천영화제의 선정 작품은 탄탄했으며 한국 독립영화부터 해외 거장의 최신작까지 폭넓은 음악 영화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직접 감상한 <티나>, <데이비드 번의 아메리카 유토피아>, <더 스파크스 브라더스> 세 편의 음악 다큐멘터리는 아티스트에 대한 피상적 정보를 넘어서 그들 경력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게 해준다는 지점에서 명확한 의의를 드러냈다. 



"내 인생은 실패작이에요" 1980년대 팝스타 티나 터너를 담은 <티나>의 도입부에서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부모와 전남편이자 음악 파트너였던 아이크 터너의 가정 폭력으로 사랑이 결여된 삶을 살았고 대중에 각인된 카리스마 이미지와 스타 이전의 한 인간으로서 갖는 처절한 외로움이 그의 삶에 공존했다. 전남편의 학대에 참다못한 티나는 완전무결한 독립을 결심하고 그 위대한 결정을 인지한 영화는 아이크가 잠든 사이 호텔 방을 탈출하는 티나를 극적인 촬영과 몽환적 화면으로 표현한다.



아이크 앤 티나 터너는 씨씨알의 원곡에 소울 뮤직을 채색한 'Proud mary' 같은 히트곡들로 1960년대 대표적인 혼성 듀오로 떠올랐지만 아이크를 떠난 그의 1970년대는 뚜렷한 상업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 암흑기였다. 그러나 프로듀서 테리 브리튼의 팝적 감각이 빛을 발한 1984년 곡 'What's love got to do with it'과 전 세계적으로 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Private Dancer> 앨범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이후에도 본인이 직접 출연한 영화 <매드 맥스 3>의 사운드트랙 'We don't need another hero' 같은 여러 히트곡을 배출하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데이비드 번의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뉴욕 출신 포스트 펑크 밴드 토킹 헤즈의 리더 데이비드 번과 2년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에게 감독상을 호명한 뉴욕 출신 감독 스파이크 리가 의기투합한 공연 실황 다큐멘터리다. 장기하가 영향을 언급하고 라디오헤드가 이들의 노래 'Radio head'에서 밴드 이름을 착안했을 정도로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준 토킹 헤즈는 아프로비트로 건설한 폴리리듬 사운드와 풍자성 짙은 가사를 결합해 당대의 지적인 밴드로 인정받았다. 월드비트의 진수를 보여준 1980년도 앨범 <Remain In Light>가 이들의 대표작. 연극과 현대 무용, 음악을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버무린 이 공연에서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토킹 헤즈 시절의 춤은 저명한 안무가 애니 비 파슨의 조력으로 더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안무로 진화했고 아프리카, 유럽 각지에서 모인 밴드 멤버의 군무도 훌륭하다.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번 자신이 직접 밝혔듯이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결코 반어법이 아니며 그가 꿈꾸는 미국의 모습이다. 인종 차별을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가 미국을 디스토피아로 몰아가고 있지만 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Do The Right Thing>과 <말콤 X> 등 흑인 인권신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스파이크 리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희생된 이들의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 데이비드 번과 밴드 멤버들은 희생자의 이름을 한 사람씩 호명하며 변화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넬 모네의 저항곡 'Hell you talmbout'을 연주한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가장 격정적인 순간으로 남았다.



<베이비 드라이버> 로 마니아를 거느린 에드가 라이트가 연출한 <더 스파크스 브라더스>는 독보적 개성의 밴드 스파크스를 파헤쳤다. 이들은 형 론 마엘과 동생 러셀 마엘의 독특한 캐릭터와 아트 팝과 글램 록을 경유해 신스 팝에 발을 딛는 음악적 스펙트럼으로 대중음악계에 발자국을 남겼다. 상업적 실패를 반복했던 이 괴짜 밴드는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 결국 후자에 무게를 싣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뉴 오더와 듀란 듀란이 일제히 찬미를 표하는 대목에서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감지한다. 영국 록밴드 프란츠 퍼디난드와 합작한 2015년 작 <FFS>와 올해 칸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아네트>에서 사운드트랙을 담당하는 등 정력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고 영화는 거죽을 벗겨내자 형제의 얼굴이 바뀌어 있는 엔딩 크레디트의 특수효과 장면까지 시종일관 비범하다.



제1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다양한 장치로 불가피한 결핍을 보완했다. 감독과 프로듀서가 직접 참여한 '관객과의 대화'로 프로그램의 품격을 높였고 가수와 배우의 경력이 탄탄한 엄정화를 영화제 '올해의 인물'로 내세워 관객을 매혹했다. 한국영화사를 음악영화의 관점에서 다시 기술하는 '한국영화사는 음악영화사다'라는 이름의 장기 프로젝트 시작과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모녀기타>(강찬우, 1964) 같은 한국의 고전 음악영화들 소개로 이번 영화제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난관을 딛고 매력 발산에 성공한 제천영화제는 올해도 그 역사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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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보컬리스트 아레사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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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나 지금이나 아레사 프랭클린을 수식하는 단어는 경이로움이다. 동시대를 빛낸 수많은 디바 가운데서 여왕의 칭호를 누린 것은 물론, 오늘날까지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꾸준히 호명되는 것은 그의 존재가 어느덧 시대의 '가치'를 초월한 불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독보적인 성량과 음역으로 장르의 부흥기를 견인하고 흑인과 여성의 존중을 주장하는 등 인권 운동의 선봉장으로도 활약한 그의 행보는 음악사를 통틀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9월 8일, 개봉을 앞둔 아레사 프랭클린의 전기 영화 <리스펙트>는 아레사 프랭클린이 반세기를 뛰어넘어 후세에 끼친, 그리고 앞으로 먼 미래까지도 끼칠 영향력에 대한 증거다. 스크린으로 접하기에 앞서 16곡으로 그의 거대한 역사를 되돌아보자. 1960년대 후반 가스펠과 소울에서 두각을 보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아틀란틱(Atalntic) 레코드를 기점으로, 디스코나 뉴웨이브와 같은 주류와의 융합을 도모하여 젊음과 호흡했던 1980년대 아리스타(Arista) 소속 시절까지. 그 부드럽고도 장대한 융단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Respect (1967)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터지기 일보 직전. 그간 흑인 여성으로서 받은 온갖 부조리한 대우로 분노 게이지는 임계점을 가리켰고 <Respect>는 모든 억눌린 감정을 분출한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담았으니 어찌 속 시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존경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당신과 똑같은 인격체로 나를 존중해 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순서는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를 부른 천재적 소울 뮤지션 오티스 레딩이 1965년에 발표한 원곡이 먼저다. 허나 곡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레딩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프랭클린의 음성을 통해 곡의 진폭은 백배 천배 더욱 커졌다. 흑과 백에 남과 여의 이야기를 더해 주제를 확장했다.

흑인 여성이 부통령에 당선되고 흑인 스포츠 스타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시대지만 이면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희생자가 있다.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고 <Respect>는 여전히 시대와 공명한다. 



Satisfaction (1967)

롤링 스톤스가 1965년 발표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은 그들을 커버 밴드에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으로 인양한 역작이다. 밴드에게 처음으로 빌보드 차트 1위라는 성과를 안겨준 이 곡이 현재까지도 록 음악 계보에서 최고 반열에 위치한 까닭은 명확하다. 로큰롤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기타 리프를 지녔기 때문.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 콤비의 강렬한 잔상에도 아레사 프랭클린의 목소리가 입혀진 'Satisfaction'은 전혀 다른 감상을 남긴다.

<Aretha Arrives>에 수록된 소울 레이디의 'Satisfaction'은 스윙으로 가득 채워졌다. 자유롭게 활보하는 피아노 선율이 곡을 주도하고 브라스, 퍼커션 사운드가 그 중심을 지탱한다. 그루브를 타기 위한 뼈대 작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아레사 프랭클린의 보컬이 곡을 휘젓고 다니는데 절정에 오른 강약 조절이 단연 압권이다. 소울의 귀재가 제시한 재해석 본은 블루스, 하드 록의 색채가 짙은 원곡에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1967)

이렇다 할 성적표를 안겨주지 못한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틀란틱 레코드사로 이적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새 레이블과 손을 잡은 후 발매한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에서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싱글 'Respect'가 등장하는데, 그 도화선이 바로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다. 선공개 트랙은 데뷔 이래로 처음 빌보드 싱글 차트 톱 10 안에 들었으며 레이디 소울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동아줄이다.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는 흑인의 임파워링과 당대 여성이 가져야 할 미덕이라는 양극단을 지녔고, 'Respect'와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가 각각을 대표한다. 거짓말쟁이에다 바람피우는 남자여도 사랑하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여인의 비애를 울부짖으나 마냥 슬프지 않다. 방아쇠와 같은 거대한 샤우팅으로 상대를 일갈하기도, 흐르는 물처럼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놀라운 점은 변검술 같은 보컬의 변화가 단 한 문장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1967)

아틀란틱 레코드로 이적한 후 아레사 프랭클린은 <Respect>를 발매하며 '소울의 여왕'에 등극했으나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히트곡을 만들기 위해 캐롤 킹과 제리 고핀에게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을 의뢰했다. 새로운 사랑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 살아갈 의지를 다지는 여성을 묘사한 곡은 빌보드 차트 8위에 오르며 아티스트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특히 아침의 피로를 표현하듯 나른한 도입부와 대비되는 폭발적인 에너지의 후렴구가 영적이고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내 사람들을 매료했다.

제리 고핀이 쓴 가사는 단순히 남자에게 인정받는 여성을 표현한 것이 아닌 여성성을 축하하는 찬가로서 '흑인 여성 지우기'가 만연했던 1960년대에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을 상기시켰다. 덕분에 대중문화에서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은 여성이 변모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1995년 미국의 헤어 제품 브랜드 클레롤의 염색약 광고가 대표적이며, 2014년 미국 하이틴 드라마 <글리>에서 메르세데스가 재회한 연인 샘과의 관계에 확신을 갖기 위해 부른 장면도 인기를 끌었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2015년 케네디 센터에서 캐롤 킹을 축하하기 위해 이 곡을 불러 큰 감동을 선사했다. 변치 않은 빛을 가진 자기 확신의 메시지는 발매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대중을 감화하고 있다.


 

Chain of fools (1967)

'바보들의 사슬'이란 담백한 제목의 노래는 이름만큼이나 간결한 구조를 지닌다. 'Chain'이 반복되는 오프닝을 지나 다층의 굵은 코러스가 쌓인 메인 멜로디에 안착한 뒤 다시 힘을 풀어 전자의 것으로 돌아간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곡. 그럼에도 2010년 영국의 <롤링스톤>지는 이 곡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 500중 252위(그의 노래 중 단 4개만이 차트에 올랐다)로 선정했다. 또한 곡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뺄 수 없는 대표곡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핵심은 단순함을 꽉 채운 아레사의 보컬 역량이다. 도입부, 곡의 트레이드 마크인 떨리는 기타 소리 이후 이렇다 할 사운드 소스가 없음에도 노래는 때론 강하고 때론 약하게 곡을 가지고 노는 그의 호흡과 만나 강렬한 에너지를 낸다. 이 완벽한 소화력은 어쩌면 사랑했던 사람의 변절을 담은 가사가 너무나도 그의 삶과 밀접히 닿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오르고 그에게 그래미 베스트 여성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수상의 영예를 안긴 곡. 지금도 국내외의 많은 뮤지션이 커버하며 무한히 생명력을 연장 중이다. 


 

Think (1968)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 때 시위대의 찬가 'Respect'가 미국 전역에 울려 퍼졌지만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1968년 4월 4일엔 민권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며 사태가 악화되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아레사 프랭클린은 장례식에 참석해 넋을 기리고 집으로 돌아와 곧장 피아노를 두들겼다. '마침내 자유로워졌다(Free at last)'라는 민족 영웅의 전언을 받들어 작곡한 'Think'는 자유를 향한 갈망을 담았다. 열성을 토하는 저항적인 가사는 유명 세션들의 연주와 어우러지며 소울 음악의 본질을 투영한다.

물론 시대적 상황과 별개로 본인의 경험이 녹아든 곡이기도 하다. 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맞이했던 첫 결혼 생활, 전 남편이었던 테드 화이트의 상습적인 가정 폭력은 또 다른 억압이었다. 이때 목사의 죽음이 도화선에 불을 댕겼고 피부색은 물론 성별에 의한 차별까지 겪고 있던 그는 흑인을 멸시하던 백인과 여성을 홀대하던 남성을 향해 날 선 비판을 던졌다. 강자에겐 죄책감을 부추기고 약자에겐 자긍심을 고취했던 'Think'는 지금까지도 'Respect'와 함께 '소울 여왕'의 업적을 아로새기는 인류애의 산물이다.



I say a little prayer (1968)

“이미 히트한 곡을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리메이크한다.”만약 당신이 제작자라면 원전의 존재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러한 모험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나라면 과감히 승부수를 띄워볼 만도 할 것 같다. 대신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야겠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내 레이블의 소속 가수라는 전제 말이다.

그는 디온 워윅이 1967년에 선보여 이미 빌보드 Hot 100 4위를 기록했던 노래를 불과 1년 만에 자신의 디스코그라피로 소환했다. 비록 앞선 업적을 넘어서지 못하고 10위에 머물렀지만, 신기하게도 지금에 와 이 싱글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아레사 프랭클린이다. 아무래도 보컬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강조했던 오리지널이 여유와 박력을 동시에 갖춘 그의 가창력에 두 손 두 발 들고 만 셈이다.

코러스를 전담해 가스펠의 기운을 불어넣은 스위트 인스피레이션(The Sweet Inspirations)의 전 멤버가 디온 워윅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더불어 작사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남자를 걱정하는 여자를 모티브로 해 써 내려간 노래로, 나름의 시대상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많은 이들에게는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조지가 줄리안에게 부르던 뮤지컬 같은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1967년과 1968년 사이 그가 거머쥔 9개의 Top 10 히트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트랙.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71)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1970년 발매한 사이먼 앤 가펑클의 곡으로 더 유명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포크 듀오의 원곡은 발매 1년 만에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로 재탄생했고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이끄는 찬송가 분위기에서 거센 물살처럼 용솟음치는 가창의 폭발력을 더한 소울 넘버로 변신했다. 원곡에서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보컬이 따뜻한 위로의 감성을 주었다면 희망찬 그루브가 이끄는 소울 여왕의 버전은 힘찬 에너지로 하여금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린다 클리포드, 메리 클레이턴 등 5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이 곡을 커버했지만 그 누구도 아레사만큼 영혼을 담아 재창조하지는 못했다. 가창자인 아트 가펑클은 아레사의 재해석을 원곡보다 높이 평가했으며 작곡자 폴 사이먼 또한 수십여 버전의 리메이크 중 제일로 꼽았다. 경건하게 울리는 피아노 연주의 간결함뿐이지만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파워풀한 성량과 광활한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보컬은 전율을 일으키기 충분했고 19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베스트 알앤비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Spanish harlem (1971)

대중에게 친숙한 곡을 커버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따르는 일이지만 미국 가장 위대한 보물 목소리에 그런 걱정은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히트곡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 아니 완벽히 갈취할 수 있음을 보여준 'Spanish harlem'은 기존 버전을 새까맣게 잊게 하는 철저한 자기화로 빌보드 소울 차트 정상과 싱글 차트 2위를 석권하며 원곡자 벤 이 킹의 기록을 앞질렀다.

벤 이 킹의 버전이 느긋한 룸바 리듬으로 서정적이었다면 무거운 베이스라인과 펑키한 기타, 닥터 존(Dr. John)의 피아노를 껴입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것은 거친 할렘 거리의 후끈한 열기에 가까웠다. 예쁜 가사 'There is a rose in spanish harlem'을 'There's a rose in black at spanish harlem'으로 각색한 노랫말은 흑인 공민권 시대 정서를 절묘하게 나타낸다. 20세기 소울 퀸은 리메이크에서도 이렇게나 치밀했다.



Rock steady (1971)

우리나라에서 지난 7월에 개봉한 레게 다큐멘터리영화 <자메이카의 소울: 이나 데 야드>에서 한 가수가 록스테디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스카는 연달아 춤추기 힘들었어요. 피곤하다고들 했죠. 그래서 더 느리게 춤추기 시작한 게 록스테디였어요." 스카의 후임이자 레게의 이전 모델인 록스테디는 느린 템포가 특징이다. 록스테디의 명칭을 취한 'Rock steady'도 템포가 그리 빠르지 않다. 록스테디의 평균 BPM이 80에서 100이고, 'Rock steady'의 BPM이 100을 조금 넘으니 록스테디의 속도까지 빌린 셈이다.

템포는 다소 느린 편이지만 분위기는 경쾌하다. 주제도 춤이다. 묵직한 베이스 연주와 가벼운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조화를 이루며 몸을 흔들기에 좋은 리듬감을 생성한다. 관악기 연주는 노래를 한층 밝게 꾸며 준다. 백업 싱어들과 말을 주고받는 방식의 보컬 또한 생동감을 생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코러스에서 외치는 "아~" 소리에는 약간의 울림 효과가 가해져서 노래가 신비로운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꾸준히 흔들어!"라는 문장은 파티나 춤을 즐기는 사람들의 잠언이 됐다.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록 스테디 크루라는 브레이크댄싱 팀이 생겼다. 지난달 29일 열린 브레이크댄싱 배틀 대회 <의정부 브레이킹 게임즈>에서는 음악을 담당한 브레이킹 심포닉이 오프닝 무대로 'Rock steady'를 연주하고 불렀다. 브레이킹 시합에서 'Rock steady'가 자주 흐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또한 수많은 힙합 노래에 차용되며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강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Jump to it (1982년)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펄펄 날던 '여왕'은 1974년부터 여러 문제에 휩쓸리면서 인기 전면에서 퇴각한다. 아레사란 이름은 오랫동안 차트와 매체에서 사라졌다. 1976년 'Jump'라는 곡을 발표해 간절히 '점프'를 원했지만 여의치 않았다(72위). 하지만 1982년 이 곡과 함께 제집처럼 드나들던 전미 차트 톱 40에 '6년 만에' 마침내 '점프'(24위), 리즈시절 재(再)도래에 희망을 갖게 된다. 1985년 'Freeway of love'로 시작된 2차 전성기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은 물론 구원을 도모했다고 할까.

아레사는 갈망하던 히트 산출을 위한 기법을 당시 막 프로듀서, 작곡자, 가수로 떠오르던 루더 밴드로스에게 맡겼다. 그는 마커스 밀러와 공동으로 이 곡을 써, 아레사만이 구사하는 필살기, 그 펑키(Funky) 비트 지배력에 모든 것을 맡겼다. 서로를 향한 상호의탁과 신뢰가 낳은 결실! 환상적인 밀러의 베이스 연주 위에, 정말이지 비트를 쪼개가며 '노는' 능란하고 찬란한 가창은 6년 뒤의 걸작 'Jimmy Lee'를 예약하고 있다. 대표곡 리스트에 오르진 않지만 예술성과 이력 모두에 중한 위치를 점하는 숨은 보석. 이 곡을 대야 아레사의 리얼 팬이다.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 (With George Michael) (1986)

곡의 의의는 왬!의 조지 마이클이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 음악 역량을 증명한 데 있지만, 그 성과만큼 아레사 프랭클린에게도 거대한 족적을 남긴다. 가장 큰 기록은 <Respect>에 이어 20년 만에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는 점이다. 덕분에 자서전 내용은 배로 늘었을 것이다. '너의 의미'로 아이유의 연락을 받은 김창완이 그러했을까, 신구 조합에도 눈이 간다. 장르 직속도 아닌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의 부탁에 흔쾌히 응한 그의 모습에서 멋진 선배의 미덕이 돋보인다. 올라간 조지 마이클의 위상만큼 아레사의 위용 또한 위대해진다.

소울의 여왕이란 왕좌는 넘버원을 달성하는 퀘스트를 깨면 받는 보상처럼 자동으로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대중의 음악, 말 그대로 그가 대중을 위한 음악을 불렀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당도한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노래나 부르면서 방구석 뮤지션으로 실력을 쌓아간들 그냥 노래 잘 부르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준 데에 대해 팬들이 선사한 영원한 선물이자 최고의 존중이다. 누가 뭐래도 소울의 대명사는 아레사 프랭클린이다. 



Who's zoomin' who (1985)

1983년에 발표한 앨범 <Get It Right>의 실패는 충격이었다. 절치부심한 아레사 프랭클린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프로듀서 겸 작곡가 나라다 마이클 월든의 조력을 받아 당시의 트렌드였던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대거 도입한 30번째 음반 <Who's Zoomin' Who>로 성공을 거뒀다. 기존의 '소울의 여왕'답지 않은 음반이지만 그해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 리스트에도 천거되며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오랜 침체기를 끝낸 효자 앨범이다.

'Freeway of love'에 이어 두 번째로 빌보드 싱글 차트 톱 텐에 오른 '신스팝 소울' 넘버 'Who's zoomin' who'는 808 드럼머신을 적극 활용해 투명하고 선명한 비트를 강조했다. 상승한 리듬감과 여유로운 그루브로 채워진 이 곡은 미국 대중의 선택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히 배척당했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볼륨감이 넘실거리는 명곡 'Who's zoomin' who'를 발표하고 2년 후에 조지 마이클과 함께 부른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로 국내에서 넓은 인지도를 쟁취했다.



Jumpin' jack flash (1986)

2차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Who's Zoomin' Who> 직후 일 년여만인 1986년 발매한 31번째 스튜디오 앨범 <Aretha>의 수록곡이다. 그의 이름 '아레사'를 내세운 작품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프로듀서 나라다 마이클 월든을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는 곧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인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를 비롯해 'Jimmy Lee', 'Rock-a-lott'을 배출하며 대중적인 성공으로 향했다.

그 행렬의 선두는 'Jumpin' jack flash'였다. 롤링 스톤스가 1968년 발표한 명곡은 밴드의 멤버 키스 리처드의 주도 아래 재해석되었고 우피 골드버그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Jumpin' Jack Flash (위기의 암호명)>의 타이틀로 사용됐다. 록의 근원인 블루스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탄생한 원곡의 뿌리는 간직한 채 코러스 세션, 기타 솔로와 어우러지는 피아노 연주 등이 더해져 경쾌해진 'Jumpin' jack flash'. 아레사 프랭클린의 짙은 목소리로 만개하며 빌보드 싱글차트 21위를 기록했다. 



Freeway of love (1985)

<Young, Gifted And Black> 이후 12년간의 부진을 끊어낸 것은 경쾌한 댄스 팝 'Freeway of love'였다. '사랑의 고속도로'라는 러브-코미디 드라마스러운 제목, 분홍 캐딜락의 들썩이는 승차감과 닮아 있는 퍼커션 리듬, 질주감을 자아내는 빠른 템포의 작풍. 곳곳에는 당시 유행하던 뉴웨이브나 댄스 팝의 시류를 감지한 흔적이 선명하다. 변화의 필요를 체감한 결과였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프로듀서 나라다 마이클 월든에게 운전대를 맡긴 채 신시사이저가 활개 치던 1980년대 시대상으로 직접 돌파한 것이다.

이러한 협업 가운데 탄생한 이 가벼운 드라이빙 송은 발매 2개월 만에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이후 그래미상 최우수 여성 R&B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서도 수상을 안겨주는 등 과거 못지않은 영예를 선사하기에 이른다. 디스코와의 합일로 도약을 시도한 <Jump to it>과 더불어 아리스타 레코드에서 펼친 변혁적 행보를 대표하는 곡이 된 셈. 결국 'Freeway of love'의 사례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를 가리킨다. 대중을 사로잡는 보컬리스트의 진정한 덕목은 모든 배경적 요소를 뛰어넘는 독보적인 유연함에 있음을. 


 

Until you come back to me (that's what I'm gonna do) (1973)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과 '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의 명성을 이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대표 발라드 넘버. 스티비 원더가 클라렌스 폴, 모리스 브로드낙스(Morris Broadnax)와 함께 쓰고 1967년 녹음까지 한 이 멋진 곡이 아레사를 통해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1973년 노래의 잠재력을 발견한 그는 자신의 버전으로 곡을 제작해 이듬해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안착시켰다. 스티비 원더의 잔반을 커리어 최고의 싱글 중 하나로 맞바꾼 셈이다.

직접 연주한 낭만적인 피아노 전주와 조 파렐의 플루트가 산뜻한 재즈 감성을 제공하지만 곡 내용은 다소 등골 오싹하다. 자신을 차버린 전 애인을 찾아가 그의 집 현관문과 창문을 두드리는 스토커의 '집착' 송! 굽이진 선율 곳곳을 매끄럽게 타고 흐르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황홀한 목소리는 스릴러 영화 같은 이런 으스스함마저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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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음악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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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코러스 라인>(A Chorus Line)의 노래 'Nothing'에 뉴욕 공연 예술고등학교(New York High School of Performing Arts)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제작자 데이비드 드 실바(David De Silva)는 앨런 마샬(Alan Marshall)과 함께 8백 5십만 달러라는 넉넉한 제작비로 영화화에 착수했으며, 앨런 파커(Alan Parker)를 감독으로 고용했다.

파커 감독은 학생들이 겪는 고통과 실망을 강조하는 것을 선호해 이야기를 상당히 어둡게 만드는 쪽으로 대본을 수정했다. 그리고 10대의 자살, 동성애와 낙태, 문맹, 미성년자 포르노와 같이 이전에는 금기시되었던 주제를 과감히 다뤘다. 파커는 또한 42번가에서 상영되는 포르노 영화의 제목이 "Hot Lunch"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제작 과정에서 영화 제목을 "Fame"(페임)으로 개명했다. 이야기에 주어진 설정에 따라 감독은 극의 등장인물 선발을 위해 젊은 배우를 찾았다. 아이린 카라(Irene Cara)가 주인공 코코 에르난데즈(Coco Hernandez) 역에 선정되었고, 신인 리 커렌(Lee Curren), 로라 딘(Laura Dean), 안토니아 프란세시(Antonia Franceschi), 폴 맥크레인(Paul McCrane), 배리 밀러(Barry Miller) 그리고 모린 티피(Maureen Teefy)가 합류했다.



영화는 1980년대 뉴욕시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명문인 뉴욕 공연예술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생들의 열망과 두려움을 탐구하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투영한다. 북미에서만 4천2백만 달러 이상의 티켓 판매수익을 올리며 상업적 성공을 거둔 흥행요인, 대중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한데는 궁극적으로 문화적 현상이 될 만큼 핵심이 된 영화의 구성요소가 크게 한몫했다. 공연예술학교에서의 학생들의 삶을 근본으로 하는 드라마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 한편, 비평가들의 찬사는 영화를 뮤지컬로 이끄는 영화음악에 쏟아졌다. 극명한 비평의 갈림에도 불구하고 <페임>은 4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고, 최우수 스코어(Best Original Score)와 최우수 노래(Best Original Song)를 모두 수상했다. 영화음악부문 트로피를 석권한 것이다.

앨런 감독은 애초 1978년 명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를 성공적으로 합작한 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에게 영화의 스코어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런 다음 밴드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ectric Light Orchestra)의 리더인 제프 린(Jeff Lynne)에게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박하는 심정으로 그는 신예 작곡가인 마이클 고어(Micheal Gore)에게 음악 지휘봉을 넘겼다. 마이클 고어는 유명한 여성 팝가수 레슬리 고어(Leslie Gore)의 남동생으로 누나와 함께 곡을 쓰기는 했으나, 영화음악은 <페임>이 입문작이었다. 파커 감독은 고어가 쓴 곡들을 재녹음(dubbing)하는 대신 동시녹음(Live)으로 촬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Out here on my own'과 'Hot lunch jam'을 누이 레슬리의 작사로 완성한 마이클은 주제가(Title song)에 맞는 가사를 찾기 위해 작사가 딘 피치포드(Dean Pitchford)와 함께 한 달 동안 고심했고, 결국 "I''m going to live forever(난 영원히 살 거야)"를 즉흥적으로 완성해냈다. "Remember! Remember! Remember!(기억해! 기억해! 기억해!)"를 반복해 노래하는 백업 보컬의 코러스 라인도 덧붙였다. 딘과 고어는 린다 클리포드(Linda Clifford)가 부른 'Red light'와 'I sing the body electric'(아이린 카라와 교우들 합창), 두 곡에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파커는 사운드트랙 넘버를 동시 녹음하는 한편, 영화가 가스펠(Gospel), 록(Rock), 클래식(Classic)의 세 가지 양식을 구성요소로 결합한 노래들로 채워져다 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주제를 가진 각각의 노래들을 연기자의 배역에 맞게 사용해 장면에 조응하게 했다. 파커 감독의 주문에 따라 곡을 쓴 고어의 노고는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처음으로 두 곡이 최우수 노래 부문 후보에 오르는 획기적 성과를 낳았다. 타이틀곡 'Fame'과 'Out here on my own'이 주제가상 후보에 지명된 것. 또한 디지털 오디오 사운드트랙을 사용한 최초의 영화 중 하나였다.

고어의 음악은 사실상 앨런 파커 감독이 연출가로서 이야기를 구성해냄에 있어서 드러낸 결점을 매끄럽게 이어줄 만큼 이야기의 맥락을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이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야기의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음악으로 보강하고, 분절된 내러티브의 맥을 음악으로 유지해줌으로써, 청중들의 동참을 유도하고, 극 중 아이들의 투쟁과 열망 그리고 승리라는 주제가 주는 생생한 쾌감에 관객들이 동화되게 했다. 영화적 감동의 8할은 마이클 고어의 음악이 빚어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고어가 피치포드와 공작한 주제가 <페임>은 대중들의 반향을 일으킴과 동시에 문화적 현상을 촉발하게 했다. 사랑과 평화의 세상, 그리고 자유와 반전을 노래한 저항 음악이 포크와 록을 통해 시대를 대변한 1970년대를 지나,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시대로 유명한 1980년부터 향후 10여 년간의 세대를 향한 일종의 신호탄과 같았다. 전자 키보드 신시사이저(전자 음향 합성기)의 등장과 춤추기 좋은 댄스뮤직(디스코, 신스팝)의 유행, 그리고 곧 1981년 "MTV"의 개국과 더불어 뮤직비디오 시대가 전개되기까지, 영화 <페임>의 사운드트랙으로 쓰인 음악은 그 전조에 다름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코어도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스타워즈 에피소드 Ⅴ-제국의 역습>(Empire Strikes)을 누르고 오스카상을 수상하는 놀라운 쾌거도 올렸다. 오늘날까지 영화의 타이틀곡인 노래 <Fame>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중 하나로 당당히 손꼽힌다. 클래식, 고전음악과 1980년대에 유행한 대중음악 양식을 뉴욕의 한 공연예술고등학교를 무대로 펼쳐지는 십대들의 이야기에 기막히게 엮어낸 음악가 고어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의 영속성은 담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주제가 <Fame>과 함께 'Out here on my own'을 열창해 오스카와 그래미를 모두 석권한 아이린 카라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가 지금의 명성을 획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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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양진석 “음악은 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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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MBC 예능 프로그램 <러브 하우스>에 출연했던 양진석은 건축가이기 전에 가수다. 1988년 '노래그림'이란 4인조 그룹으로 데뷔했던 그는 건축 유학을 위해 팀을 그만두게 됐지만 귀국 후 1995년부터 다시 개인 앨범을 발표하며 음악 생활을 이어갔다. 작품의 성패와 상관없이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던 그가 10년 만에 정규 앨범 <Barn Orchestra>로 돌아왔다.

양진석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낸 건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6집에선 그의 목소리가 빠져있다. 대중가요에서 가장 중요한 가창을 배제한 작품이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음에도 후배들의 목소리로 채워 넣은 것이다. '건축을 음악 하는' 사람답게 회사 건물 지하에 마련된 작은 공연 공간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다양성 주의자 양진석을 만나 신보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송라이터 보다 싱어의 이미지가 강한 분인데 본인의 목소리를 완전히 없애는 파격적인 결정을 어떻게 내리게 되었나요?

몇 년 전부터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음악과 원래 좋았던 음악에 대해 심사위원의 마음으로 나름 정의를 내렸어요. 그 기준을 두고 저를 돌아보는데 제가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해버리면 정말 트렌드에서 빗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하루는 <7080콘서트>를 보는데 당장 저부터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저에겐 여전히 스타이신 분들이지만 창법이나 연주, 편곡에서 이미 기성들 외에는 좋아할 수가 없는 구성이었어요. 근데 음악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혁신적이고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자칫 나도 이 함정에 빠질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 '컨템포러리'라는 말이 바로 떠올랐거든요. 시대의 호흡, 숨결, 그리고 문법에 맞춰서 이 앨범이 더욱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음악만 했다면 이런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을 텐데 건축을 같이 하다 보니까 놓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내가 혹시 올드하지 않나? 시대의 소리를 못 담고 있지 않나? 크리에이터로서 이런 부분에 대한 강박이 좀 있어요. 최근에 리조트 설계를 맡았는데 리조트는 분양이 안 되면 정말 끝이에요. 소비자는 20대부터 60·7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부모 세대들이 회원권을 사도 아들, 딸들이 안 써주면 리조트는 유지가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걸 만족시키기 위해서 컨템포러리하게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자연스레 음악도 비슷한 관점으로 보게 된 거죠.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해도 어린 친구들의 음악을 맞춰 간다는 게 쉽진 않은데 그런 점에서 이번 앨범이 컨템포러리한 감성을 갖게 되는 데 도움을 준 분이 있을까요?

프로듀싱에 함께 참여한 이주원의 힘이 컸죠. 91년생 친구인데 저랑 형 동생 하면서 요즘 음악에 대해 서슴없이 얘기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다시 그 생각들을 바탕으로 같이 작업도 많이 했어요. 제가 멜로디를 만들고 포리듬 편곡 틀을 짜서 지정을 해주면 주원이가 그걸 듣고 요즘 음악으로 해석하는 시스템이죠. 근데 주원이가 이렇게 조미료를 쳐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정말 예술이에요. 어쨌든 저에게 상대적으로 부족한 그들만의 감성을 주원이가 충분히 채워준 거죠.

이번 앨범은 전체적으로 어떤 스타일을 구현하고 싶었나요?

특별한 스타일을 두기보다는 각자에게 맞는 옷을 입혀주고 싶었어요. 그동안 댄스나 발라드를 비롯해서 어린 뮤지션들이 선호하는 곡들을 많이 써줬는데 그때마다 그 친구들의 목소리에 맞게끔 작업을 했어요. 사실 6집에 실린'Late love'는 이미 10년 전에 만들었던 노래입니다. 그때 가이드 녹음을 했던 가수가 토미어인데 이 노래는 아무리 다른 친구들한테 줘도 토미어 외에는 소화를 못 하더라고요.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작업하면서 가장 잘 풀렸던 곡과 어려웠던 곡은?

별일 없이 진행됐던 건 타이틀곡 '고로(孤路)'에요. 80년대 신스팝의 정서를 요즘 사운드로 구현하는 잔나비나 혁오의 음악을 좋게 듣고 있는데 이런 음악을 내가 부르면 너무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어린 친구들을 찾게 됐죠. 사실 탐내는 사람 중에 유명한 분들도 계셨는데 김웅 대표가 기성 가수는 절대 안 된다고, 무조건 새로운 목소리로 해야 한다고 극구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가이드 보컬로 참여한 강효준(샴)이 부른 걸 들었는데 딱 이 친구 음악 같은 거예요. 물론 그때는 가이드다 보니까 바로 도장은 안 찍었는데 다른 기성 가수들의 목소리로는 요즘 아이들의 느낌이 안 나와서 결국 효준이가 부르게 됐죠.

반면에 'Run run run'은 좀 까다로웠어요. 원래는 제목도 다르고 저를 포함해서 6명 정도가 같이 가창을 한 곡이었는데 하루는 강제규 영화감독님이 오셔서 들어 보시더니 부담스럽다고 하시면서 노래는 아닌 것 같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보컬은 빼고 색소폰을 넣어서 녹음을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감독님도 다시 듣고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주제로 한 차기작에 어울리는 노래라고 하시면서 상의해보고 이 곡을 꼭 쓰고 싶다고 하셨어요.

다른 곡들의 작업기도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 가장 와닿는 곡이기도 한 'All of us love'는 제가 아내한테 써줬다가 까인 곡이에요. 대중음악을 안 하는 클래식 아티스트이기도 하고 지금은 딸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남편은 밖에서 한가롭게 곡을 만들어 와서 대뜸 연주를 해달라고 하니 기가 차지 않겠어요. 사실 아내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엔니오 모르꼬네의 '넬라 판타지아' 바이올린 연주를 허락받은 연주자예요. 근데 제가 밥 먹으면서 이 얘기를 꺼냈거든요. 아무리 남편이었어도 제가 정중하게 부탁을 했어야 했는데 아내도 슬쩍 한 번 보고는 답을 안 하길래 까였구나 싶었죠. 근데 또 섭외하다 보니까 첼리스트 임은진 씨가 와이프 고등학교 동기였어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따로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크리스 보티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할 수 있는 나팔을 찾다 보니까 유나팔을 섭외하게 되었어요.

'Second choice'는 사랑과 평화의 '장미'를 오마주한 곡인데 제가 펑키(Funky)한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라서 제 음악에도 이런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곡에 참여한 커먼그라운드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룹이에요. 연락은 퍼커션을 맡고 있는 조재범 군을 통해서 했지만 주원이가 키보드를 맡고 있기도 해서 섭외가 더 쉬웠죠.

'잠이 오질 않아'는 처음에 결혼 축가 곡으로 만들었던 노래인데 만들고 나니까 정작 헤어지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웃음) 서울예대에서 제2의 임재범으로 불리던 동하가 이 곡을 불러서 그런지 애절한 감정이 더 깊어진 느낌도 들고요.



음악과 건축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50세 전에는 거의 이론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은데 최근 들어서 절실히 느낀 건 건축과 음악 모두 철저하게 외로운 작업이라는 거예요. 물론 중간이나 마지막엔 팀워크에 의해서 완성이 되지만 둘 다 스타트를 끊는 건 무조건 혼자 해야 하는 일이죠. 그래서 제가 한 달에 20일 정도는 팀 단위로 움직이고 나머지 열흘은 혼자 있어요. 일주일에 48시간은 가족과도 떨어져서 연락이 안 되는데 이때 책을 보거나 스케치, 음악 작업을 하는 편이죠. 감성과 이성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게 쉽진 않아요. 그야말로 외로운 투쟁이죠.

얘기를 들어보니까 외로움이 덕지덕지 붙은 앨범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고로'도 외로운 길이란 뜻이고 '토요일 오후'엔 혼자, 혼술 같은 단어도 나오잖아요.

말씀해 주시기 전엔 잘 몰랐는데 듣고 보니까 진짜 그러네요. (웃음)

이 음반을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줬으면 하나요?

가장 욕심을 냈던 부분은 가사예요. 개인적으로 요즘 노랫말이 시적인 표현이나 인문학적인 표현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번 작품에선 되씹을 만한 가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멜로디나 편곡 구성이 현대적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긴 힘들겠지만 팝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올드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진석의 이름과 나이를 모르고 들어도 케이팝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정도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막상 결과물을 본 이후에 본인의 판단이 괜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100% 만족은 있을 수 없죠. 대중적으로나 평단에서 인정받는 문제와는 별개로 어느 정도 제 음악 인생에 있어서 의미 있는 시도는 한 것 같아요. '양진석이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자체적으로 의의를 두고 있어요.

현대적인 작업을 시도한 만큼 현시대 음악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네요.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BTS만 하더라도 이제는 외국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또 협업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악뮤, 아이유, 잔나비, 혁오 같은 팀들은 굉장히 관심 있게 보고 한편으론 존경하기도 해요. 특히 아이유는 더 기억에 남는 게 제가 2010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게스트로 왔었거든요. '좋은 날' 3단 고음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공연 전에 와서 '저희 엄마가 양진석 씨 팬이에요'라면서 수줍게 인사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멋진 아티스트로 성장했죠.

이번 앨범 이후에 계획 중인 곡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7집에 들어갈 노래를 벌써 8곡 정도 작업해 놨어요. 아마 DJ 리믹스 앨범으로 선보이게 될 것 같은데 2집 <Summer Dream> 때부터 이런 음악을 선호했던 사람이라 어떻게 보면 자아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죠. 코로나가 종식되면 록 페스티벌이 열릴 텐데 그때 꼭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서고 싶어요. 무대에 오르는 것을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울렁증이 있는 건 아니에요. 가면은 그냥 제가 올드 하단 소리를 들을까 봐 단지 외적인 부분을 가리고 싶어서 쓰려는 겁니다.



과거 활동했던 밴드 '노래그림'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요?

여전히 너무 좋죠. 얼마 전에도 (한)동준이가 와서 같이 술 한잔했죠. 옛날에도 둘이 술 많이 먹고 그러면 제가 등에 업고 가다가 잔디밭에 쓰러져서 누워 자고 그러기도 했었죠.

1988년 5월에 저희 첫 앨범이 나왔을 때 (이)수만이 형이 MBC 라디오 DJ를 하셨는데 저희 노래가 맘에 드셨는지 수소문을 해서 자리를 마련하셨어요. 모아놓고 찬찬히 보시더니 수만이 형이 저희 제작을 맡겠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싫어요!” (웃음) 수만이 형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런 거죠. 저는 유학 중이라 어려웠고 나머지 멤버들도 애매했어요. 그런데 동준이는 울림통이 좋기도 하고 군 제대를 앞두고 있어서 유일하게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죠.

그러고 나서 곡을 모으는데 그때 김광진이 나타났죠. 당시에 투자 자문 회사를 다니다가 저희랑 연락이 닿았는데 자기가 이대 가요제 나가서 받은 대상 곡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를 들려주는데 곡이 죽이더라고요. 그렇게 광진이도 작업에 참여해서 한동준 1집을 발표했는데 반응은 거의 없었죠. 사실상 한동준과 김광진이 SM 1호, 2호 가수였어요.

변진섭 씨의 '새들처럼'을 작곡한 지근식 씨도 빼놓을 수 없죠.

이것도 비하인드스토리가 있어요. 어느 날 제가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근식이가 옆에 와서 무슨 코드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듣고는 다음날 갑자기 '새들처럼'을 만들어 온 거예요. 처음에는 너무 동요스럽지 않냐면서 살짝 무시를 했는데 화성을 쌓아서 불러보니까 이글스 같은 분위기가 나면서 제법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신촌 크리스탈 무대에서 이 곡을 동준이랑 듀엣으로 불렀는데 그날 진섭이가 온 거죠.

진섭이는 87년에 가요제에서 상을 받고 앨범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들은 저희 노래가 맘에 들었는지 술 마시다가 너네는 판 낼 계획이 없으니까 자기한테 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그냥 알았다고 하면서 가져가라고 했죠. (웃음) 그 당시엔 뭐 저작권 이런 거 잘 신경 안 썼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근식이가 작곡한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같은 곡들을 가져갔었죠.

더 웃긴 건 그 이후에 엄용섭 사장님이 스튜디오로 놀러 오라고 하셔서 갔는데 갑자기 저희 보고 녹음실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야, 너희 코러스 해.” (웃음) '새들처럼' 뒤에 깔리는 코러스가 저랑 동준이 목소리에요. 3도 올려서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했는데 정작 세션비로 순댓국 한 그릇 먹었어요. (웃음)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그게 100만 장이 팔리면서 근식이는 대박이 났죠. 그래서 지금도 '새들처럼' 들을 때마다 '어, 저거 내 목소린데.' 하면서 듣고 그래요.



오늘날의 양진석을 만든 음악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 들었던 스틸리 댄의 음악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특히 미디엄 템포에 베이스를 둔 록을 좋아하는데 이번 앨범에 수록된 '토요일 오후' 같은 경우도 스틸리 댄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아서 만든 곡입니다. 그리고 비틀스의 퍼포먼스도 크게 와닿았어요. '록을 거칠게 하면서 음악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 위대한 밴드였죠. 조금 더 커서는 퀸의 음악을 많이 접했죠. 특유의 동양적인 멜로디는 물론이고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죠.

앞서 이글스도 얘기하셨는데요.

이글스도 맞죠. 세션맨 계보에선 정말 리스펙트 하는 팀이 이글스랑 ELO, 토토 정도가 있습니다. 이 세 팀한테 세션에 의한 록 사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양진석의 음악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나요?

제 일기라고 생각해요.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면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고 저승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요. 제가 굳이 이 영화를 언급을 하는 이유는 현시대에 발표한 내 작품이 인기를 얻고 말고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의 노래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메시지가 되고, 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미디어에 남는다는 얘기는 거의 평생 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양진석이란 이름으로 어떤 앨범을 냈는데 언제 들어도 '그 당시에 이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구나'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은 거죠. 건축이 보통 100년, 200년 안에 무너지는 데 비하면 음악은 훨씬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절대 질 낮은 타협을 하면 안 되겠다고 항상 다짐하죠.



양진석 6집 - BARN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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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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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시스 하세빈 "꾸준히 내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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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00년대 초반, 노래방을 휩쓸었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솜사탕'을 기억한다. 두 대표곡이 대변하듯 클래시컬 록이라는 독자적인 깃발을 흔들면서도 대중성을 놓지 않은 밴드 네미시스가 있고 그 중심에는 기타리스트 하세빈이 서 있다. 네미시스의 대다수 수록곡이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면 특정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이러한 열정이 지금까지도 계속되었기에 그를 종횡을 아우르는 스펙트럼의 소유자라 할 수 있겠다.

지난 8월 31일, 골든 핑거 페스티벌에서 출연자로 연이 닿아 그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록의 호흡이 약해진 음악 시장에 대해 하세빈은 '흐름을 바꾸기보다 내가 지금 있는 자리를 지키고 내 음악을 할 것'이라며 단단한 생각을 전했다. 피아노를 두드리듯 부드러운 기타 연주를 닮아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다가도 '초심을 늘 생각한다는' 음악 삶의 신념을 논할 때의 묵직함은 록 그 자체였다.


네미시스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고 유튜브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다수의 뮤지션이 그렇겠지만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무언가를 준비하면 상황이 안 좋아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원래는 올 하반기에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잘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일정이 미뤄지기도 하고 간간이 온라인 공연을 참여하고 있는 정도다.

네미시스 공연을 준비했다는 뜻인지.

그렇다. 네미시스 공연도 있고 다른 것도 준비하고 있다.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골든 핑거 페스티벌 말고는 오프라인 공연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든다. 차라리 곡을 쓰는 것에 집중하고 만약 공연을 한다면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해야겠다고 시작한 시기는 고등학교 때다. 그전에는 생각만 좀 하고 음악 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학원이 있네, 가봐야지' 해서 친구들과 함께 다녔고 '밴드부도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마침 학교에 없어서 동창끼리 하나둘씩 모여서 시작하게 되었다.

악기 중에선 왜 기타를 잡게 된 건가.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와서 기억나는 게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생 즈음 엠넷에서 해외 뮤지션의 영상을 자주 방영했는데, 그중 스티브 바이(Steve Vai)가 인상 깊었다. 스티브 바이의 'Bad horsie'와 같은 곡을 들으면서 기타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좀 트리키하고 현란하면서 우아한 연주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거 같다. 피아노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이런저런 학원 다니라고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오래 하니 너무 지겨웠다. 자아 없이 기계적으로 하느라 지겨워하면서 손 놓고 있다가 기타를 배우면서 피아노에도 또 관심이 생기더라.

스티브 바이로 기타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따로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없는가?

아무래도 처음을 스티브 바이로 시작했던 것이 임팩트가 컸다. 지금 꾸준히 영상을 보는 건 아니지만 항상 처음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려고 하는 편이다. 사실 여러 유명한 기타 뮤지션들이 계시지만 나에게 있어 초반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를 제일 존경한다.

2005년 1집을 시작으로 지금 16년 차인데 인디 뮤지션으로 오래 활동하게 된 비결이 궁금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쉽지 않다는 게 금전적인 문제, 불화, 혹은 음악적 견해를 말하는 것이라면 아마 모든 밴드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16년 동안 같이 하다 보면 가족도 싸우는데 의견이 안 맞는 경우도 당연히 있고 밴드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는 예전부터 해서 그런지 어느 정도 맞춰가는 법을 안다. 안 좋게 말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가져갈 건 가져가면서 타협을 하다 보니 오래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팀워크에 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인디 신에서 활동도 힘든데 음악 자체도 흔치 않은 장르를 택했다.

네미시스 나름대로 색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쿠스틱이 유명하다고 어쿠스틱으로 치우치거나, 인디 안에서 대중적인 장르, 비주류 장르를 나누기보다는 다양한 게 좋지 않나.

네미시스 특유의 클래시컬한 사운드를 만든 시작점은.

드러머는 스피드 메탈을 좋아하고 나 같은 경우는 잔잔한 브릿 팝 위주로 들었고 다른 멤버는 멜로딕 한 곡들을 좋아했다. 다들 좋아하는 장르가 달랐다. 그렇게 비트감도 있으면서 서정적이고 멜로딕 한 걸 섞어보자 해서 지금의 색깔이 나왔다. 클래식의 경우는 내가 기본적으로 좋아한다. 물론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시도했는데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은 장엄하고 서사적 사운드가 밴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사실 '솜사탕'은 전혀 클래시컬한 느낌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가벼운 느낌도 좋아한다.

작사, 작곡하는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다양하다. 책을 보고 혹은 영화를 보고 작업한 것이 한두 곡 정도 있지만 대부분 피아노 앞에서 다양한 것을 떠올리면서 시작을 한다. 먼저 상상으로 큰 그림을 그려놓은 후 작업하고 또는 기타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일상에 있던 모든 게 모여서 상상으로 나오는 결과물이라고 본다.

작업하다가 힘든 경우가 있었는가, 극복 방법은?

항상 그렇다. (웃음) 20대 초반에는 그냥 매일 한 곡 이상을 일기 쓰듯이 써보자 해서 한두 개씩 테마별로 작업했을 때도 있었다. 지나서 보니까 확실한 임팩트가 있는 것이 아니면 이걸 다 쓰는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곡들이 비슷하게 나올 때도 있고. 너무 곡에 몰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하다가 만드는 등 지금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하고 있다.

골든 핑거 페스티벌 1회부터 쭉 참여했던데, 처음에 섭외 받았을 때 기분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유명하신 선배님들과 함께 하는데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불러주셔서 영광이었다. 먼저 감사하단 생각이 들고 그다음에는 엄청난 선배님들 사이에서 내가 껴도 되는 건가 하는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골든 핑거 페스티벌 2회가 고향인 통영에서 열렸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방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했고 음악을 할 때 결핍 같은 것이 있었다. 공연 하나 보기가 어렵고 학원도 별로 없다 보니 겨우 찾아서 고등학교 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구가 적으니까 음악 시장이 활발하지 않아서 안타까웠는데, 이런 문화를 지방에서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많이 오진 않았지만 그런 공간이 점차 커지면 좋을 것 같다.

페스티벌 3, 4회는 비대면으로 진행했는데, 느낀 차이점이 있다면?

확실히 에너지가 다르다. 내가 나올 수 있는 에너지 강도도 달랐고 현장의 분위기도 달랐다. 관객이 있고 없고 차이가 크더라.

공연에서 10대 뮤지션들의 참여가 점차 늘고 있다.

점점 더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번 골드 핑거 페스티벌에 참여한 10대 뮤지션 중 '진산'의 영상을 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기타를 배울 때 나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을 한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기타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내 음악을 해야겠다!'라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한 악기의 대가가 되기보다는 악기들을 두루두루 다루면서 그냥 내 음악을 꾸준히 해왔던 것이다. 지금의 10대 뮤지션들 모두 잘해주고 있지만 너무 한 분야의 톱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난 안돼'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여러 악기도 시도해 보고 전체적인 음악을 위해 접근했으면 한다.


 

네미시스나 개인 작업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음악은 무엇인가?

사실 제일 최근에 작업한 곡일수록 가장 최근의 생각을 담았기 때문에, 추천하는 작업물은 4집 앨범 < White Night >이나 작년에 싱글로 나온 '세상의 끝'이다. 1집 < La Rose de Versailles >은 초기의 열정을 담고 있다. 음악을 시작할 때의 에너지가 담긴 1집과 지금의 4집을 들으면 '이 밴드는 이런 식의 음악을 하는구나'를 더 잘 느낄 수 있을 거 같다.

음악가로서가 아닌 하세빈 개인의 목표나 삶의 지향점이 있다면?

20살 초반에 음악을 할 때는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바라보고 해야 하나?'라는 목표 없이 했다. 밴드가 어디까지 올라가면 성공일까? 공중파 TV에 나와야 하나? 당시 성공했던 팀처럼 유명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꾸준히 내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음악이 아닌 다른 것으로 경제적 자유를 이루어 좋아하는 음악을 평생 즐겁게 해 나가는 것이 목표이다. 지속 가능한 음악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한다고 본다.

연주자로서 개인의 자아실현과 경제적 삶과 같은 현실적인 면에서 충돌이 있었는지.

사실 홍대에서 나름 성공한 밴드 축에 속하지만 그래도 벌이는 뻔하다. 활동 초반부터 느낀 문제다 보니 '아무리 성공해도 이 정도 수준이구나'하는 마음이 들어 재테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웃음) 이전부터 음악으로 잘 되면 오케이, 안되면 힘든 문제니까 다른 걸로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무언가 만들어놔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럴 것 같다.

1집부터 내가 직접 대표해서 회사를 만들었는데, 음악 관련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음악 하는 사람들은 돈 생각하면 안 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듣다 보니 나한테 사기 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을 확실히 만들어놓고 시작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아직까지도 음악 시장에서 돈 관련한 문제를 터부시하는 문화가 남아있는 게 이상하다.

하세빈이 봤을 때 기타리스트면서 곡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는지?

어릴 때는 본 조비의 리치 샘보라가 음악을 잘 만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음악적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가 누구일까를 생각해보면 스티브 바이나 익스트림(Extreme)의 누노 베텐코트 그리고 본 조비가 있었다. 리치 샘보라는 스티브 바이처럼 매우 테크니컬한 기타리스트는 아니지만 송라이터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본 조비 같은 팀이 이상적이라고 본다.



내가 뽑는 나의 명반이 있다면?

내가 왜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시작점 그리고 음악 인생 초반에 대해 생각을 자주 한다.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 어떤 장르를 듣고 확 꽂힌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들어보고 추천도 받으면서 점차 단계적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팝과 같은 이지리스닝부터 시작해서 매니악한 소규모 음악까지 닿게 되더라. 나에게 처음 밴드 음악의 임팩트를 주었던 음반은 본 조비의 <Crossroad>였다. 근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면 잘 안 듣게 되더라. (웃음)

기타가 위주가 아닌 팝 앨범도 들었을 텐데.

시간이 너무 지나다 보니까 지금은 듣는 게 많이 달라졌는데 어렸을 때는 마이클 잭슨, 라디오헤드를 많이 들었다. 사실 그런 음악을 하고 싶었다.

요즘 들어 찾아 듣는 음악이 있는지.

핑거스타일 기타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의 사토시 고고 음악을 들으면서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 그 외에는 새로운 곡들을 들으려고 랜덤 재생으로 많이 듣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만 들으면 너무 한정적이고 신곡을 잘 안 듣는 거 같아서... 요즘은 추천이더라도 개인 취향 위주로 해준다더라. 아이돌이나 댄스 음악도 잘 듣고 있다.

최근에 쓰고 있는 곡의 스타일은 어떤 쪽인가? 어떤 스타일의 곡을 쓰고 싶나?

아까 말했다시피 핑거스타일 기법을 연습하고 있다. 기타로만 만들 수 있는 곡에 신경 쓰고 연습하면서 재밌어하기도 하고 또 스트레스도 받고 있다. 그 외의 음악으로는 재즈적인 느낌을 차용하기도, 다 차치하고 통기타로 하는 담백한 발라드도 쓰는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직접 노래할 생각은 없었나?

노래를 못한다. (웃음) 데모를 만들 때도 일단 내가 가이드를 불러서 녹음하고 나중에 보컬한테 해보라고 하면 '나는 노래를 하면 안 되는구나'를 확연하게 느낀다. 그걸 모를 수가 없다.

네미시스 앨범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집에서 계속 작업하고 있다. 지금 시기보다 더 괜찮아졌을 때 발매해서 공연도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상황 때문에 연기되고 있다.

코로나가 해제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아무래도 네미시스 공연이다. 작년에 온라인 공연을 제외하면 1년 8개월 정도 됐다. 2019년 연말 때 콘서트에서 '내년에 또 봐요'라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웃음) 결국 연기되고 또 연기되었다.

네미시스 활동하면서 20여 년 세월이 흘렀는데 음악적인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와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인지?

2005년에 1집을 내기까지가 힘들었다. 2000년부터 2004년 사이에 1집을 만들었다가 폐기했고 다시 2005년에 발매하게 되었다. 음반을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하고 이제까지 노력했던 게 다 헛수고가 될 것 같고 힘들었다.

가장 좋았던 때는 네미시스 1집을 내고 활동했을 때. 그리고 밴드 이브 6, 7집에 참여했을 때다. 방송 활동도 많이 했었고 반응도 좋았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즐거운 시기였다.



네미시스 (Nemesis) 4집 - White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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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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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시스 (Nemesis) 1집 - la rose de versailles(베르사이유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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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돌풍 속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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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꾼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사람들이 신음하는 2045년 지구, 척박한 일상 속 가상 세계 '오아시스'만이 피난처다. 이곳에서 유저들은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게임에 참가하며, 고전 영화를 배경으로 한 퀘스트와 대중문화 속 전설적인 캐릭터를 만나는 등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허물고 비로소 모두의 꿈을 실현하는 인류의 새로운 생태계, '메타버스(Metaverse)'다.

먼 미래처럼 보이던 모습이 이제 코앞에 다가왔다.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 세계를 일컫는 메타버스는 이미 금융, 의료, 교육 등 사회 다방면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뜨겁게 동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VR 기기 '오큘러스 퀘스트2'로 애플의 초기 아이폰과 맞먹는 판매량을 기록한 페이스북과 하이엔드 VR 헤드셋을 발표할 예정인 애플, 그 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도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기 위해 저마다 발 빨리 움직이고 있다.

메타버스가 새 시대의 문명으로 자리 잡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핵심이 '콘텐츠'에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최첨단 기술을 겸비해도 그 속에 즐길 거리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이야기다. 메타버스 관련 기업들의 성패도 참신한 놀잇거리가 있는지에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음악계 역시 이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현실 너머의 광활한 땅을 맞아 조금씩 시류에 탑승하고 있는 국내외 팝 신의 면면을 살펴본다.


에스파, 무한한 가상 세계의 광야로

K팝 신에 화끈한 신기술의 돌풍이 인다. 2020년 11월 'Black mamba'로 데뷔한 에스파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6월 'Next level'로 공개 32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1억 건을 돌파하며 매서운 기세를 입증했다. 국내 음원 사이트 정상에 안착하는 것은 물론 독특한 팔 꺾기 '디귿 춤'은 각종 SNS에서도 유행했다. 'Next level'은 이렇게 끝난다. "Next level /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그룹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장대한 이상을 그려가는 기획사의 미래관까지 압축한 한 줄이다.

에스파는 현재로서 K팝이 다다른 세계관의 절정이다. 인원 구성부터 독특하다. 실제 멤버 네 명에 그들의 분신 넷이 공존한다. 개인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제공된 데이터로 설계된 각 멤버의 아바타들이다. '싱크(Synk)'를 통해 이들과 교감하고 그를 방해하는 악당의 존재를 찾아 가상의 땅 '광야'로 떠나는 등 그 스토리도 장대하다. 어느 순간 멤버들과 교차되고 무대 위에서 직접 춤추기도 하는 아바타. '삶의 기록'을 뜻하는 '라이프로깅(Life logging)'과 '가상 세계' 메타버스를 결합했고 이를 뒤받치는 건 최첨단의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이다.

SM은 세계관을 음악에 한정하지 않겠다는 야심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지난 SM 콩그레스 2021에서 '음악을 기반으로 이전에 없던 경험을 만들기 위한 도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모션 그래픽, 아바타, 소설의 앞글자를 딴 'CAWMAN'을 자사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콘텐츠가 디지털 세상에서 팬들을 통해 확장해 가수와 대중이 그 속에서 호흡할 것이라는 귀띔이다. K팝 산업 최전선에 선 SMCU의 미래, 그 중심에 메타버스가 있다.


새 시대의 콘서트 컬쳐, 포트나이트와 로블록스

팬데믹으로 부닥친 일상 구금은 공연 업계에 큰 타격이었다. 가수는 무대 뒤에서 팬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메타버스가 대중음악계에 관심사로 급부상한 것도 사실 이런 사정에서였다. 메타버스는 멈춰버린, 그리고 앞으로 크게 바뀔 콘서트 업계에 방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게임 산업이었다.

미국의 에픽게임즈가 제작한 '포트나이트'는 온라인 게임에서 대표적인 메타버스 서비스로 거듭난 플랫폼이다. 지난해 4월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이곳에서 가상 공연을 펼쳐 큰 화제를 모았다. 2,770만 명의 관객, 200억 원이 넘는 수익으로 오프라인 공연보다 더 많은 돈을 번 대규모 쇼였다. 방탄소년단도 'Dynamite'의 새 안무 버전 뮤직비디오를 포트나이트에서 최초 공개했고, 올해 8월에는 아리아나 그란데가 '리프트 투어'로 유행의 열기를 이어갔다.



월간 사용자 수 1억5000만 명에 달하는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의 움직임도 주목해야 한다. 작년 래퍼 릴 나스 엑스는 로블록스 내에서 물리 기반 렌더링, 안면 인식 기술 등을 앞세운 빼어난 몰입감의 가상 공연으로 3,600만 명의 접속자를 모았다. 이 밖에도 트웬티 원 파일럿츠의 콘서트에서는 밴드를 콘셉트로 한 미니 게임과 퀘스트도 선보였다.

로블록스는 대형 음반사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기업이기도 하다. 연초 워너 뮤직에 5억 2천만 달러를 투자받은 데에 이어 7월에는 소니 뮤직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더 많은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로블록스 안에서 울려 퍼질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K팝 팬들의 새로운 소통 창구

미국에 로블록스가 있다면 한국에도 이에 뒤처지지 않는 콘텐츠가 있다. 네이버 자회사 네이버제트가 개발한 제페토다. 증강현실 기반의 3차원 아바타 플랫폼이자 글로벌 10대들에게 하나의 소셜 미디어 앱으로 자리매김한 서비스로 전 세계 2억 명이 넘는 유저가 뛰어놀고 있는 새 시대의 놀이터다.

제페토는 K팝 신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회사는 YG엔터테인먼트다. 지난해 9월 블랙핑크는 제페토에서 멤버들의 아바타를 앞세운 가상 팬 사인회를 개최해 4,600만 명의 세계 팬을 끌어모았다. 그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현한 '블핑하우스'는 연일 팬들이 사진을 찍고 춤을 추는 '블링크(BLINK)'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됐다.

기존에 있던 단상에 가수의 아바타를 올려놓은 것은 비교적 간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내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자체적인 온라인 팬 플랫폼 제작에도 열성을 다한다. 재작년 하이브는 팬 커뮤니티 서비스 '위버스'를 론칭해 팬과 가수의 다양한 교류 방식을 하나의 채널에 취합하는 전략을 펼쳤다. 게임 회사 엔씨소프트가 카카오 산하 엔터테인먼트 업체들과 합작한 '유니버스'도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곳에서 팬들은 아티스트의 아바타를 코디하거나 직접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메타버스가 선사한 K팝 신 스타와 팬들의 새로운 소통 방식이다.


다시 음악을 소장하는 시대로? NFT를 만나다

메타버스가 일상에 고착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경제시장과의 연결이다. 가상 세계가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상호운용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개인이나 기업이 자유롭게 수익 모델을 창출해 판매하고 화폐를 벌어들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이에 최근 몇 년 사이 가상자산 NFT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NFT는 'Non-Fungible Token'의 약자로 소유권, 판매 이력 등의 정보가 블록체인에 저장되어 위조가 불가능하고, 각각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인식 값이 부여되어 대체 역시 불가능한 암호화폐를 말한다.

대중음악계에도 NFT를 활용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Blinding Lights'의 스타 위켄드는 예술 경매 플랫폼 니프티 게이트웨이(Nifty Gateway)에서 낙찰자만 소유할 수 있는 미공개 음원을 판매했다. 수익은 229만 달러(한화 약 26억 원)였다. 이 밖에도 린제이 로한, 미국 밴드 킹스 오브 리온, DJ 저스틴 블라우도 앨범 발매에 NFT를 적용했다. 음원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음악 청취 방식이 된 지금 다시 과거처럼 노래를 개인이 소장하는 형국이 도래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K팝 산업의 발걸음도 바쁘다. JYP엔터테인먼트는 7월 블록체인 업체 두나무와 NFT 플랫폼 사업을 위한 업무 제휴를 맺었다. 국내에서는 산업에 공식적으로 뛰어든 최초 기획사다. 보이그룹 에이스는 4월 미국 블록체인 플랫폼 왁스(WAX)를 통해 멤버들의 사진 등이 담긴 굿즈를 선보였다. 가수뿐만 아니라 인플루언서, 화가, 사진작가 등 다양한 창작자들의 작품을 다루는 K컬쳐 전문 NFT 마켓 플레이스 스노우닥도 등장했다.

NFT 시스템은 가수와 팬 모두에게 윈윈(win-win) 될 수 있다. 아티스트는 무분별한 복제를 막아 창작물의 희소성을 지킬 수 있고, 팬들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독점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가격대가 지나치게 높아 대중이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은 풀어야 할 숙제다. 투기성 거래의 위험이 크다는 지적도 고민해볼 만하다. 대중음악계와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체적인 적정선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다.


마케팅 수단 그 너머로, 라디오헤드의 특별한 전시회

앞서 언급했듯 미국의 에픽 게임즈는 메타버스와 대중음악을 연결할 방법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포트나이트에서 유저들은 트래비스 스콧의 신곡을 들었고 아리아나 그란데와 함께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디오헤드다. 엥? 라디오헤드? 의외의 인물이다. 라디오헤드가 아바타로 변신해 포트나이트에서 오징어 춤을 추면서 'Creep'을 연주하기라도 하는 걸까?

뭐, 그것도 재미있겠다만 정확히는 아니다. 기술 혁신과 실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세기의 록 밴드는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지난 9월 8일 에픽 게임즈와 콜라보한 <Kid A Mnesia Exhibition> 프로젝트의 티저가 플레이스테이션 쇼케이스에서 공개됐다. 밴드의 2000년대 걸작 <Kid A>와 <Amnesiac>의 20주년과 21주년을 기념하는 가상 전시회다.



오는 11월 플레이스테이션5, 맥, PC를 통해 정식 출시 예정이지만 아직 아무런 추가 정보가 없어 정확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고편에서부터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리더 톰 요크와 비주얼 디자이너 스탠리 돈우드가 협업한 아트워크와 프로듀서 나이젤 고드리치가 맡은 오디오 디자인이 지하 세계에서 1인칭 시점의 관람자를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으스스한 전경으로 초대한다.

가상 공연이나 팬 커뮤니티 기반의 서비스와 달리 아티스트의 명작을 박물관 형식으로 재현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라디오헤드는 매우 난해한 음악을 하는 밴드다. 어쩌면 그들이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팀의 예술 세계를 메타버스에서 구현할 지도 모를 일이다. 메타버스가 단순 마케팅 수단을 넘어 뮤지션의 내면과 감정을 보다 정교하게 채색하는 캔버스로 진화할지. 결과는 11월에 확인할 수 있다.



Radiohead (라디오헤드) - Kid A
Radiohead (라디오헤드) - Kid A
Radiohead
BeggarsXL Recordings
Radiohead (라디오헤드) - Amnesi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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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
BeggarsXL Recor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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