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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채널예스 : 뮤직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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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 뒤에 숨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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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상반기 송가인이란 독보적 트로트 스타를 발굴해낸 <미스트롯>의 후속작 <미스터트롯>의 인기가 연일 고공행진 중이다. 첫 회부터 8%의 시청률로 준수한 시작을 알리더니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 기부금 배틀 콘셉트로 진행된 지난 8회에는 자그마치 30.4%란 수치를 획득했다. 종편 프로그램에,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중장년층이 주로 즐기는 트로트를 메인으로 내세웠지만 <미스터트롯>에게 이는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미스터트롯>의 인기 요인을 분석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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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 오디션

 

<미스터트롯>의 포맷은 2000년대 한국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 <슈퍼스타K>(2009)와 '당신의 소녀에게 투표하세요'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방송된 <프로듀스 101>(2016)의 특징을 아우른다. 전자가 일반인을 중심으로 누구라도 스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면 후자는 그 대상을 아이돌로 한정한다. 거기서 파생된 '마이돌 키우기'의 흐름 역시 주목해 봐야 할 요소. 대중교통, 전광판 등을 물들인 '원 픽(최애 아이돌)' 홍보가 전례 없던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또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시청자 팬덤이 40, 50대까지 확대된 점은 음악 향유 계층에 새로운 유입을 뜻하기도 한다.

 

<미스터트롯>의 참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싹을 틔운다. 일반인, 아이돌 혹은 아이돌 정도의 끼를 가진 참가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서사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불어 폭넓은 연령층의 참가자 역시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다. 실제로 정동원(14세), 이찬원(25세)부터 임영웅(30세), 고재근(44세) 등 여러 세대를 고루 아우른 참가자들이 눈에 띄며 이는 <프로듀스 101> 등을 통해 한차례 형성됐던 중장년 팬 층에 다시 한번 활력을 제공한다.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댄스, 힙합 등의 장르를 통해 10, 20대의 입맛(만) 잡기 위해 노력했다면 <미스터트롯>은 출발부터 그 이상의 범위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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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쟁보다 화합

 

또한 이 프로그램에는 날 선 경쟁이 없다. 과거 음악 전문 채널 Mnet에서 출시한 대다수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 <쇼 미 더 머니>, <아이돌 학교>, <퀸덤>등이 자극적인 편집점을 활용해 시청자의 관심을 사려 했다면 <미스터트롯>은 대결을 최소한의 도구로만 사용. 그 너머의 휴머니즘을 통해 집중도를 올린다. 이는 SBS에서 방영된 <K팝 스타>와 일정 부분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듯 보인다.

 

차이는 심사위원단에서 드러난다. 10명이 넘는 <미스터트롯> 심사위원의 주 역할은 독설 아닌 칭찬이다. 잘 차려진 상찬에 피땀 눈물 더해진 참가자들의 오디션 도전기는 대결의 '결과'뿐만이 아니라 '과정'에까지 마음 쓰게 만든다. 선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던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차라리 신파를 택한 <미스터트롯>이 도달한 최종 종착지는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범-대중적이다. 한 명을 위한 파티가 아닌 다 같이 즐길 축제의 장. 바로 <미스터트롯>의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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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트로트는 첨가물일 뿐

 

다수의 관계자가 밝히고 있듯 <미스터트롯>의 최대 강점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트로트를 중심으로 중장년층의 진입장벽을 낮췄고 오디션 포맷을 기초로 삼아 게임과 같은 흥미 요소를 양산. 트로트와 거리가 먼 젊은 층의 관심까지 샀다는 게 그 분석이다. 다만 <미스터트롯>은 트로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이돌 버금가는 칼군무, 심금을 울리는 판소리, 진기명기가 따로 없는 비트박스 등 방송을 수놓는 건 트로트가 첨가된 또 하나의 들을 거리요 또 하나의 볼거리다.

 

<미스터트롯>이 본격적인 막을 올리기 전 가장 큰 화두는 키치함이었다. 젊은 남성들이 웃통을 벗고 나와 트로트를 부르고 느끼한 춤사위를 선사하던 예고편을 두고 누리꾼들은 얕은 조소를 던졌다. 그리고 지금. 그 키치함이 대중의 감정을 두드린다. 웃으며 시작했던 방청이 한바탕 눈물로,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요즘. <미스터트롯>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친절하고 착한 전체 연령가 방송. 경쟁으로 점철된 여타 방송이 주던 피로감에서 벗어나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보기 좋은 <미스터트롯>의 음악 여정이 신년 초 기분 좋은 대서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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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과 교양을 다 잡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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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tvN의 음악 예능 <케이팝 어학당 - 노랫말싸미>가 처음 전파를 탔다. 이 프로그램은 물릴 대로 물린 가창력 대결의 장이 아니다. 순위를 매기지도 않는다. 특정 출연자를 깎아내리는 가혹한 연출도 없다. 소란스러운 순간이 이따금 발생하지만 대체로 차분한 담소가 이어진다. 훈민정음의 서문 첫 문장을 익살스럽게 바꾼 제목이 암시하듯 이 프로그램은 노랫말, 즉 가사를 주된 소재로 삼는다. 기존 음악 예능이 다루지 않은 분야라서 참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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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들어간 '케이팝'과 '어학당'이라는 단어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형태를 구체적으로 일러 준다. <노랫말싸미>는 김종민, 이상민, 장도연이 진행을 맡는 가운데 독일, 미국, 영국, 칠레, 콩고민주공화국, 폴란드, 프랑스 등 일곱 개 국가에서 건너온 외국인들 총 10인이 패널로 출연한다. 여기에 매회 새로운 가수가 강사라는 직함을 달고 나온다. 스튜디오에 모인 이들은 강사로 초대된 가수의 노래를 매개로 한국어와 외국어를 배우고, 우리나라와 타국의 문화를 알아 간다.

 

첫 방송은 백지영이 강사로 나섰다. 그녀는 2008년 발표한 7집 수록곡 '총 맞은 것처럼'과 이듬해 낸 2PM 옥택연과의 듀엣 '내 귀에 캔디'로 강의를 열었다. 강의 시작에 앞서 외국어 번역기로 번역한 노래 일부 가사를 해당 언어를 쓰는 외국인 출연자가 읊고, 외국어로 바뀐 가사를 토대로 패널들이 어떤 노래인지 유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과정은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한테도 각 나라의 언어를 경험하고, 이런저런 표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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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함은 그것으로 동났다. 전반적으로 방송은 '백지영의 노래 교실'에 지나지 않았다. 백지영은 직접 노래를 부른 뒤 노래 속 화자의 상태나 기분 등을 설명하며 어떤 식으로 불러야 하는지 신경 써야 할 포인트를 짚어 줬다. 간단한 교습이 끝나면 외국인들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 활동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두 번째 노래 '내 귀에 캔디'를 배울 때에는 춤에 초점이 맞춰졌다. 댄스음악이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두 명씩 짝을 짓기 전 각자 춤 실력을 뽐내고 커플 댄스를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치 명절이면 편성되곤 하는 외국인 장기 자랑 방송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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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노랫말싸미>는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들의 무대를 편집한 영상과 함께 "노래를 통해 한국을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문화의 어울림을 만들려 합니다.", "노래로 배우는 문화 이야기"등의 자막을 띄우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그러나 이날 방송에는 교양에 보탬이 될 나라별 문화, 사회상은 얼마 만나 볼 수 없었다. '총 맞은 것처럼'을 언급할 때 콩고에서 온 조나단이 자기네 나라는 내전이 심해서 총을 보유한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한 것이 한 나라의 특수한 사정을 알 수 있는 소식의 전부였다.

 

출연자들의 얘깃거리는 거의 연애에 국한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귀는 사람과 진도를 나가고자 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떤 식으로 애교를 부리는지, 어떤 외모가 이성한테 인기를 끄는지 등 1, 2, 3회 모두 연애를 주제로 한담을 나누는 데 바빴다. 지금까지의 방송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성 얘기가 꽃피는 춤추는 노래 교실'이다. 물론 연애도 문화의 하나지만 그 이상의 깊이와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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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찮은 대화만 나눠 가뜩이나 따분한 상황에서 홍진영이 강사로 초대된 2회에서는 편향적인 정보마저 담겨 답답함이 가중됐다. 홍진영은 '사랑의 배터리'를 설명할 때 "흥으로 시작해서 흥으로 끝나는 것이 트로트예요."라며 트로트는 흥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댄스음악의 인자를 들인 경쾌한 스타일이 트로트의 부흥을 이끌며 인기 양식으로 자리 잡긴 했어도 모든 트로트 노래가 그런 것은 아니다. 차분한 분위기를 띠거나 애수를 핵심 정서로 둔 노래도 많다. 홍진영의 정의는 트로트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소지가 다분했다.

 

이제 3회, 두세 술에 배부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헛헛함은 계속 감돌 듯하다. 교양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가볍게 감상할 수 있거나 재미를 느낄 만한 장치에 신경 쓰느라 취지 구현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진행자들, 혹은 패널들의 시시하고 유치한 설정 연극이 거듭되는 것이 프로그램의 선천적 한계를 나타낸다.

 

<노랫말싸미>가 이 약점을 극복하고 내실 있게 문화를 교류하는 장으로 성장하려면 노래 선정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대중음악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제재는 사랑이기에 강의에 쓰이는 노래도 대체로 사랑 노래에 한정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재료로 하는 노래 중에 단순한 감정 표출 외에 사회의 양상이나 특정 세대의 생활 습관을 기록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런 노래를 골라야 문화에 관한 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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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스위프트의 ‘The man’이 들여온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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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7일 공개된 미국의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싱글 'The man' 뮤직비디오가 화제다. 맨(man)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이 곡과 영상은 남자를 주제로 삼는다. '내가 남자였다면 / 영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 난 영웅이 될 꺼야' 노래하는 와중 가사보다 더 다층적 메시지를 품은 뮤직비디오가 눈에 띈다. 지하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않은 남성, 아무데서나 방뇨하는 남성, 폭력을 리더십으로 활용하는 남성 등 이 작품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그간 여성에게 제한적이고 남성에게 관대했던 여러 프레임의 전복을 시도한다.

 

이외에도 재작년 소속사 이전 과정에서 불거진 스쿠터 브라운(한 때 테일러 스위프트를 희롱한 문제로 여러 차례 설전을 벌였다. 현재 테일러 스위프트의 초창기 저작권 상당수가 스쿠터 브라운 소유다)과의 마찰도 뮤직비디오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이처럼 오늘 날의 그는 여성으로서 개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소리 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의 앞장서기는 2014년 즈음 서서히 기지개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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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6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자국의 전통성을 가진 '컨트리'를 주무기로 삼았고 수려한 외모를 지녔으며 무엇보다 적당히 조명주기 좋은 싱어송라이터였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에도 반항은 없었다. 초기 커리어의 인기곡 'White horse', 'Love story', 'Fearless' 같은 곡이 그 증명이다. 건조한 컨트리를 질료 삼아 적재적소에 가미한 록, 팝적 요소가 음악의 접근성을 높였고 풋풋한 사랑을 담은 가사가 컨트리에 거리를 둔 십대의 취향까지 사로잡았다.

 

2008년 2번째 정규 음반 < Fearless >로 그래미 어워드의 본상 중 하나인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다. 그의 나이 18살의 일이다. 승승장구하던 행보는 2009년 래퍼 카니예 웨스트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 MTV 뮤직 어워드 '올해의 여성' 부문 수상자로 무대로 오른 테일러 스위프트의 소감이 카니예 웨스트의 “이 상은 비욘세가 받아야 했다”는 망언으로 얼룩졌기 때문. 그의 등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얼굴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악재는 계속 됐다. 2012년에는 임신설에 휘말렸고 2013년에는 라디오 진행자 데이비드 뮐러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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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깨달음이 됐다. 변화의 시작은 정규 5집 < 1989 >(2014)의 수록곡 'Welcome to New York'에서 드러난다. 컨트리의 색채를 완전히 지우고 '팝'으로 노선 변경을 시도한 음반의 첫 곡으로 흥겨운 신시사이저 멜로디에 맞춰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뉴욕에 온 걸 환영해 / 너는 네가 원하는 누구든지 될 수 있어 / 남자든 여자든'. 그의 두 번째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곡인 'Shake it off' 역시 마찬가지다. 상황이 어떻든 '흔들자' 말하는 이 노래는 막힌 청춘의 고민을 뚫어주는 시원한 '치얼 업 송'이자 더 이상 웅크리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실제로 그는 거침없이 위기 상황을 뚫고 나갔다. 앞서 언급한 라디오 DJ 뮐러는 2013년 테일러 스위프트를 자신의 부당한 해고에 일조했다는 명목으로 3백만 달러에 가까운 손해배상금을 요구하며 고소한다. 이에 테일러 스위프트 역시 2015년 그를 맞고소하는데 요구한 배상금은 단 1달러뿐이었다. 돈이 아닌 여성 인권의 가치를 주목시키려는 의도였다. 결과적으로 뮐러는 패소했고 테일러 스위프트는 이를 기념하며 한 자선단체에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큰돈을 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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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점 더 강해졌다. 2017년 '올드 테일러는 죽었어' 선포하며 돌아온 정규 6집 < Reputation >에서는 일렉트로니카를 적극 가미해 이미지 변신을 하는가 하면 타이틀 'Look what you make me do'에선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인물들과 정면 대결을 신청한다. 사전 동의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또 한 차례 'Famous'란 곡으로 그를 성적 대상화한 카니예 웨스트가 그 목록에 올랐으며 네티즌 역시 그의 화살을 빗겨가지 못했다.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SNS상에서 뱀의 이미지로 폄하되던 자신의 아이콘을 역으로 끌어와 스스로 뱀 되어 타올랐다. 도를 넘은 비난이 도리어 성장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렇게 2019년 발매한 정규 7집 < Lover > 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현재이자 데뷔 초와는 상상할 수도 없게 진화한 당당한 여성의 자화상이다. 밀어두었던 컨트리를 다시 가져와 성숙한 사랑을 노래하고 LGBTQ, 여성, 인권 그리고 무엇보다 평등함의 중요성에 대해 소리 높인다. 2018년에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정치색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공개된 'The man'의 뮤직비디오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세상에 날린 묵직한 '한 방'이다. 착한 여성은 없다. 날선 비유로 성 고정관념을 개조하는 그의 행보가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생생한 경종을 울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목소리. 테일러 스위프트의 귀환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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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주 못 듣는 펑크(Funk) 명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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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트 펑크의 'Get lucky', 로빈 씩의 'Blurred lines', 마크 론스과 브루노 마스의 'Uptown funk', 브루노 마스의 '24K magic'과 'Treasure'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죠? 모두 펑크(Funk) 음악이라는 거죠. 이 노래들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미도 수상해 상업성과 음악성 모두 공인 받은 대중의 음악입니다.

 

1960년대 소울 음악에서 파생한 펑크(Funk)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흑인의 자긍심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려는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었죠. 1990년대에 흑인음악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펑크(Funk)는 찬밥신세였습니다. 실용음악과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실기시험을 볼 때 대부분 16비트의 펑크(Funk) 음악을 연주하는 이유는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재밌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흑인음악이 예전과 달리 대중화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위대한 펑크(Funk) 뮤지션들의 노래 중에서 국내에선 흥겨운 노래보다는 'After the love has gone'이나 'Three times a lady', 'Easy', 'Cherish'처럼 발라드 곡들이 한정된 인기를 얻었죠. 그래서 신나는 노래를 좋아하는 저는 국내 라디오 프로그램에 늘 불만이었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펑키(Funky)한 곡들을 자주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접 찾아서 듣지 않는 한 들려지지 않는 펑크(Funk)의 명곡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동안 어두운 지하실에서 연명하고 있는 펑크(Funk)의 명곡들을 밖으로 꺼내 빛을 비추어주고자 합니다.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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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y & The Family Stone의 'Thank you'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펑크(Funk) 음악의 1세대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밴드입니다. 공식적으론 1966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지만 이들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로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이 기간에 'Everyday people', 'Stand', 'Dance to the music', 'Family affair', 'Hot fun in the summertime', 그리고 인순이가 'Higher'로 번안했던 'I want take you higher'까지 고속 질주했던 슬라이 & 더 패밀리 스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1970년 빌보드 넘버원 'Thank you'는 자주 들을 수 없습니다. 제목 'Thank you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영국 가수 다이오의 노래를 떠올릴 정도죠. 자넷 잭슨의 1989년도 히트곡 'Rhythm nation'에서는 'Thank you'의 리듬을 샘플링해 이들을 헌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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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dores의 'Machine gun'


라이오넬 리치가 리더로 있었던 코모도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펑크(Funk) 밴드지만 그 노래들은 'Three times a lady'나 'Easy', ''Still', 'Sail on', 'Night shift' 같은 발라드 노래들입니다. 그루브가 넘치는 'Brick house'나 'Lady', 'Machine gun'은 명함도 못 내밀죠. 이들의 데뷔곡 'Machine gun'은 1974년에 발표해서 빌보드 싱글차트 22위까지 오른 코모도스의 첫 번째 히트곡인데요. 무그신시사이저를 앞세운 연주곡입니다. 마크 월버그가 주연한 1997년도 영화 < 부기 나이트 >에 삽입돼서 뒤늦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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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th Wind & Fire의 'Sing a song'


'지풍화'는 우리나라에 펑크(Funk)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69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결성된 이들의 대표곡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September', 'Boogie wonderland', 'Let's groove'의 3부작이 있고 또 데이비드 포스터와 함께 한 불세출의 발라드 'After the love has gone'이 있지만 이들의 유일한 빌보드 넘버원 'Shining star'와 1976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5위를 차지한 'Sing a song'을 언급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혼섹션이 멋진 'Sing a song'은 필 콜린스의 넘버원 싱글 'Sussudio'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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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l & The Gang의 'Get down on it'


쿨 & 더 갱도 우리나라에서는 어스 윈드 & 파이어나 코모도스와 처지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들의 애청곡은 'Cherish'라는 업템포 발라드거든요. 물론 'Celebration'과 'Fresh'가 라디오에서 간혹 들려오긴 하지만 이 두 노래만큼 훌륭한 1982년에 빌보드 탑 텐 싱글 'Get down on it'은 좀처럼 들을 수 없습니다. 절제된 비트 위에서 펼쳐지는 제임스 J.T. 테일러의 리듬감 넘치는 매끄러운 보컬이 이 노래의 정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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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twave의 'Boogie nights'


1975년 영국에서 결성된 히트웨이브는 1970년대 후반에 'Boogie nights', 'Groove line', 그리고 발라드 'Always and forever'로 인기를 얻은 밴드인데요. 이 히트곡들을 만든 팀의 건반주자이자 리더인 로드 템퍼튼은 나중에 마이클 잭슨의 'Rock with you', 'Off the wall', 'Thriller', 조지 벤슨의 'Give me the night', 제임스 인그램과 패티 오스틴의 'Baby come to me' 같은 노래들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리고 코모도스의 'Machine gun'에서 언급한 영화 < 부기 나이트 >의 제목은 바로 이 노래에서 따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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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io Players의 'Love rollercoaster'


1959년 오하이오에서 결성된 오하이오 플레이어스는 오랜 무명 시간을 보내고 1970년대 중반이 돼서야 빛을 본 대기만성 형 밴드입니다. 'Funky worm', 'Fire', 'Skin tight', 'Sweet sticky thing' 같은 히트 싱글이 있지만 이들을 대표하는 노래는 1976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에 오른 'Love rollercoaster'입니다.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는 애정관계를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에 비유한 이 노래는 1997년에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리메이크해서 우리나라에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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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kadelic의 'One nation under a groove'


펑카델릭의 리더 조지 클린턴은 미친 사람입니다. 정상이 아니죠. 그룹 하나를 건사하기도 힘든데 조지 클린턴은 동시에 두 개의 밴드를 운영했거든요. 바로 펑카델릭과 팔러먼트입니다. 팔러먼트의 대표곡 'Give up the funk'도 우리 라디오에선 찬밥신세지만 이 글에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훨씬 더 좋아하는 'One nation under a groove'를 선정했습니다. 1978년에 발표되어 빌보드 싱글차트 28위까지 밖에 오르지 못한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음악은 절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는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펑크(Funk) 음악은 'One nation under a groove'를 따라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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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vin Gaye의 'Got to give it up'


1977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차지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노래는 긴 암흑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예전 국내 라디오 피디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펑키(Funky)한 디스코 넘버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거든요. 확실히 당시 전 세계를 주름 잡았던 디스코 노래들인 비지스나 케이시 & 더 선샤인 밴드의 곡들보다는 훨씬 더 펑키(Funky)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표절한 로빈 씨크의 2013년도 히트곡 'Blurred line'가 대한민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시대와 세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반증이겠죠. 절제됐지만 세련된 리듬은 마빈 게이의 비극적인 죽음과 선명하게 대비되어 더 슬프게 들리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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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 Band의 'Take your time (Do it right)'


1977년 조지아 주에서 결성된 펑크(Funk) 밴드 에스오에스 밴드는 이 노래 하나만 각인시키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홀연히 사라진 의연한 그룹입니다. 이 노래를 제외하곤 빌보드 탑 40에 오른 곡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원히트원더 뮤지션이죠. 하지만 'Take your time'이라는 명곡을 남기고 사라졌으니 억울하진 않을 겁니다. 1980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3위까지 오른 이 노래는 신시사이저와 슬랩 베이스 연주가 압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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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p Band의 'Big fun'


1974년 오클라호마에서 결성된 갭 밴드는 빌보드 싱글차트 탑 텐 히트곡이 하나도 없습니다. 히트 싱글의 기준인 탑 40에 오른 노래가 두 곡밖에 없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펑크(Funk) 밴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표곡 'Early in the morning'과 'You dropped the bomb on me', 'Party train'은 국내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 푸대접을 생활화한 실천지향형 그룹이죠. 하지만 1986년에 빌보드 싱글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영국차트 4위를 차지한 'Big fun'은 갭 밴드의 최고의 노래입니다. 경박하지 않고 먹이를 향해 다가가는 호랑이처럼 육중한 리듬은 차원이 다른 흥분을 선사하죠. 1986년에 AFKN 라디오를 통해 이 곡을 우연히 듣게 된 건 인생의 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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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thers Johnson의 'Stomp'


기타리스트 조지 존슨과 베이시스트 루이스 존슨 형제로 구성된 브라더스 존슨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는데요. 그들의 노래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나 샤카 칸 같은 훌륭한 가수들의 음반에 연주자로 참여하면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아티스트입니다. 1989년에 퀸시 존스가 리메이크한 'I'll be good to you와 1977년에 빌보드 탑 텐에 오른 'Strawberry letter 23'도 멋지지만 1980년에 발표해서 빌보드 7위를 기록한 'Stomp'야 말로 브라더스 존스 음악의 정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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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o의 'Word up'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결성된 카메오는 1986년에 발표해서 빌보드 싱글차트 6위를 차지한 'Word up'이 대표곡입니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영화 <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의 휘파람을 앞부분과 중간에 삽입해 비장미를 연출한 'Word up'은 흑인음악임에도 대단히 록적인 느낌입니다. 신시사이저와 베이스 기타의 두터운 슬랩 베이스, 드럼을 강조해 비트와 리듬을 끌어올려 당시에도 시끄러운 펑크(Funk) 곡으로 들렸으니까요. 하드록 밴드 건이나 랩메탈 밴드 콘이 리메이크한 건 당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파이스 걸스의 멤버였던 멜라니 C와 댄스 팝 그룹 리틀 믹스, 심지어는 독일 출신의 컨트리 그룹 보스호스 등 수많은 후배들이 커버하며 위대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곡임을 확증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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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k의 'Dazz'


1972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결성된 브릭 역시 히트곡이 많지 않은 펑크(Funk) 밴드입니다만 1976년에 빌보드 싱글차트 3위를 기록한 'Dazz'는 단언컨대 명곡입니다. 촌스럽지 않은 그루브 위에 재즈의 터치, 심지어는 플루트 같은 클래식 악기를 도입해 펑크(Funk) 음악의 지평을 확대했죠. 제목 'Dazz'가 댄스와 재즈의 합성어라는 것만 봐도 이들이 지향했던 음악 스타일을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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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 선 희망 : 주디 갈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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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드문 극장가에 지난 3월 25일 영화 한 편이 조용히 개봉했다. 우리에게 'Over the rainbow'라는 명곡으로 친숙한 주디 갈란드, 그의 일대기를 담은 <주디> 다. 외롭게 분투하지만 항해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주디 갈란드의 생애 마지막 투어 콘서트를 그린 극이 관객들의 잇단 호응을 불러내고 있다. 이에 맞춰 그의 삶의 궤적을 좇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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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불행의 시작 <오즈의 마법사>(1939)


배우 겸 가수인 주디 갈란드의 성공 스토리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시작된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즈의 나라로 날아가게 된 소녀 도로시의 여행담을 담은 극은 뮤지컬 형식과 상상력 풍부한 서사로 당시 큰 사랑을 받는다. 작품의 전면에 섰던 주인공 주디 갈란드의 인기 역시 엄청났는데 영화의 중심 곡 'Over the rainbow'로 그해 아카데미 베스트 오리지널 송 부문에서 수상하는가 하면 이후 15년간 24개 이상의 영화를 찍으며 대중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성공의 단맛은 불행의 씨앗을 낳았다. 작품의 반응이 뜨거워질수록 소속사 MGM의 핍박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서서히 자리 잡고 있던 할리우드 시스템 아래 몇몇 아역 배우들이 그와 함께 세상에 나왔고 그들에 비해 통통하고 그들의 미적 기준에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했던 주디 갈란드는 MGM에 의해 수면제와 각성제를 번갈아 복용하게 된다. <주디> 에서 그려지듯 엄격한 식단 관리가 뒤따랐으며 식욕 억제를 위해 어린 그에게 하루 담배 80개피를 강요한 사실은 그의 회고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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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지만 강한 홀로 서기 <스타 탄생>(1954)


1935년 시작된 MGM과의 계약은 1950년이 되서야 끝이 난다. 제작사가 그를 놓아준 건 그가 극심한 약물 중독과 불면증, 외모 콤플렉스 등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후의 일이었다. 잠시 할리우드를 떠나있던 그는 1954년 얼마 전 레이디가가와 브래들리 쿠퍼가 열연한 <스타 이즈 본>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스타 탄생>으로 복귀한다. 1937년 원작을 다듬은 극을 통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성과를 얻어낸 그는 그간의 우려를 씻고 다시금 자신의 스타성을 공고히 다진다.

 

상승세는 1961년 카네기홀을 꽉 채운 공연으로 이어진다. 이때 공연 실황을 <Judy at Carnegie hall>이란 라이브 음반으로 묶어 발표했고 실력을 또 한 차례 인정받았다.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래미 어워드의 중요 본상 중 하나인 '올해의 앨범상' 또한 거머쥔다. 여성 최초 수상이었다. 연이은 호재 속 주디 갈란드의 삶은 더욱 망가져갔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많은 빚을 졌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한 5번의 결혼이 끝내 그에게 남긴 건 4번의 이혼뿐이었다. 그의 자살 시도는 잊힐만하면 매스컴을 달구는 토픽이 되어간다.

 

 


다시 영화로 <주디>(2019)


그런 그의 일대기가 2019년 영화 <주디> 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개봉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는 2019년 빛을 발한 이 영화는 나름의 역사적 함의를 지닌다. 2019년은 주디 갈란드의 사망 50주기가 되는 해이고 동시에 그를 바깥으로 쏘아올린 영화 <오즈의 마법사> 개봉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이 극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화는 찬란하게 빛나는 무대 위의 주디 갈란드에 주목한다. 제도권의 폐단, 사회의 억압된 굴레에 삶의 많은 것을 짓눌린 채 끝내 그 무게를 짊어지고 위태롭게 살아간 한 여성의 고된 일대기가 아니다. 작품은 그럼에도 그가 피어낸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여오고 그가 맞서 싸운 작지만 강한 흔적들을 꺼내 그의 삶에 새로운 항력을 끌어온다.

 

늘 무대를 두려워했지만 그곳에 오르면 언제나 대중을 휘어잡던 한 여성 뮤지션의 이야기. 불안하게 걷고 도망치기만 하던 그가 처음, 스스로 무대 위에 올랐을 때 그는 희망에 관한 곡이라며 'Over the rainbow'를 열창한다. 이를 지켜보던 관계자는 여기서 주디 갈란드의 주체할 수 없는 노래를 향한 열망을 본다. 절망 끝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뮤지션 주디 갈란드. 47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그는 끝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며 노래했다. 그의 삶을 다시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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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리차드, 로큰롤 소울을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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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9일, 87세로 영면에 들어간 리틀 리차드는 초기 로큰롤의 싱어송라이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척 베리, 버디 홀리, 팻츠 도미노, 에디 코크란, 엘비스 프레슬리, 진 빈센트, 제리 리 루이스 등과 함께 당시까지도 미완이었던 로큰롤이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에는 비틀즈, 프린스, 프레디 머큐리, 엘튼 존 등 위대한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른 노래는 단 한 곡도 없고 탑 텐에 오른 노래도 겨우 3곡뿐. 우리에게 유명한 'Tutti frutti'와 'Long tall Sally', 'Lucille'은 10위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왜 리틀 리차드를 추앙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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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미국 조지아 주에서 리차드 웨인 페니맨의 본명으로 태어난 리틀 리차드는 40년대 후반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에 메이저 음반사 RCA와 계약했지만 1956년에 'Tutti frutti'와 'Long tall Sally'가 인기를 얻기 전까지는 지역구 스타였다. 거대 음반사에서 첫 음반을 내고 'Tutti frutti'로 자신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 영광은 이 곡을 리메이크한 백인 스탠더드 가수 팻 분에게 돌아갔다. 팻 분은 'Tutti frutti'와 'Long tall Sally'를 커버해 리틀 리차드의 원곡보다 좋은 차트 성적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팻츠 도미노의 'Ain't that a shame'을 리메이크해서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에 올랐다.

 

그래서 리틀 리차드는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가 이름만 바뀐 것이다. 백인이 흑인의 로큰롤을 갈취해 그 영혼과 숨결을 팔아먹었다”는 주장을 폈고 사실 이 코멘트는 틀린 말이 아니다. 흑인 창법으로 노래한 엘비스 프레슬리, 팻츠 도미노와 자신의 노래를 부드럽게 이미지 세탁해 더 큰 사랑을 받은 팻 분이 그 증거. 이 상황에 화가 나고 환멸을 느낀 리틀 리차드는 1950년대 후반에 목사가 되겠다며 대중음악 계를 떠나 가스펠 음악에 전념했지만 곧바로 다시 팝계로 복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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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리차드 노래에서 중심 악기는 피아노다. 고전음악 악기인 피아노는 점잖게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는 정적인 악기지만 리틀 리차드는 고리타분한 방법을 거부했다. 일어나 몸을 흔들며 연주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오른발로 건반을 두들겼다.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그의 무모해 보이는 이런 시도가 바로 로큰롤이다. 같은 시대에 활동한 백인 싱어 송라이터 제리 리 루이스, 음악 천재 엘튼 존, 1970년대를 수놓은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에서 건반을 친 키보디스트 그리고 기타 없는 록 밴드를 추구한 벤 폴즈 등은 리틀 리차드의 길을 따른 수혜자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짙은 아이라인으로 이미지를 강조한 그의 외모는 1980년대 프린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아바,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키스, 티 렉스, 개리 글리터 같은 1970년대 초반에 전 세계에 붐을 이룬 글램록 아티스트들에게 동기부여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보컬은 흑인의 자긍심을 음악으로 표출한 소울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레이 찰스, 샘 쿡과 함께 소울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리틀 리차드의 가창에는 두려움이 없다. 직선적이며 호쾌하다. 흑인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흑인이라 주눅 들지 말라는 소울 정신에 가장 정확하게 어울리는 가수가 바로 리틀 리차드. 흑인은 소울이고 그 소울이 바로 리틀 리차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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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에 그래미 어워즈에서 시상자로 등장한 리틀 리차드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오랫동안 로큰롤 음악을 해왔지만 단 한 번도 그래미상을 수상한 적이 없다.” 진심과 울분이 서린 이 농반진반의 말에 시상식장에 있는 모든 동료, 후배 뮤지션들은 기립박수로 그의 말에 동의했고 그를 응원했다. 1993년에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리틀 리차드가 대중음악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고정관념을 타파한 '미치광이 로큰롤의 전설' 리틀 리차드의 안식을 기도한다.

 

 


- 대표곡 -


Tutti frutti
Long tall Sally
Rip it up
Lucille
Jenny Jenny
Good Golly, Miss Moly
Baby face
Slippin' and slidin'
Ready Teddy
The girl can't help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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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맥라클란, 천사의 목소리를 가진 강인한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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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신화에는 여성 악마 릴리스(Lilith)가 존재했다. 아담이 이브와 결혼하기 전 첫번째 부인이었던 릴리스는 아담과의 성관계에 있어 여성은 따르기만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아담을 떠나 혼자 살며 많은 남자를 유혹하는 악마를 자처한다. 다소 노골적인 이 신화 이야기에는 남성 상위 문화에 반기를 들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자리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적 의미가 담겨있다.

분노의 얼터너티브 록이 활개를 치던 1990년대 초반, 음악 신에도 릴리스가 있었다. 캐나다의 포크 가수 '사라 맥라클란'이 바로 그 주인공. 신화 속 강렬한 이미지의 릴리스와는 달리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을 선보이는 그는 긴 무명의 끝에 네 번째 정규 앨범 <Surfacing>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한다. 이 도약은 그가 진짜 '릴리스'로서의 활약을 펼치게 될 기원이 된다.



#1. 천사의 목소리를 가진 강인한 투사로, 릴리스 페어(Lilith Fair)

짧은 머리에 수수한 차림, 어깨에 걸쳐 맨 어쿠스틱 기타. 사라 맥라클란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그래미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 상을 안겨준 'Building a mystery'로 무대를 연다. 1997년 시작되어 1999년 막을 내린 여성 음악 페스티벌 릴리스 페어(Lilith Fair)의 첫 장면은 이토록 인상 깊다. 1990년대의 음악 시장은 남성 뮤지션들에게만 유독 관대했다. 사라 맥라클란을 비롯해 토리 에이모스, 트레이시 채프먼 등 쟁쟁한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넘쳐났지만 무대도, 라디오도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1997년 그의 나이 30살, 주어지지 않으니 창시하기에 이르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연과 라디오에 거부당한 사라 맥라클란의 분노는 1,6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는 성공적인 여성 음악 축제를 낳는다. 오롯이 여성만 출연할 수 있으며, 남성 출연자들은 연주를 보조하는 세션으로만 허용되었다. 트레이시 채프먼, 셰릴 크로우, 수잔 베가, 시니어드 오코너, 폴라 콜 등 내로라하는 여성 가수들이 출연해 남성이 주도하고 있는 록 신에 반기를 들며 음악계 안에서의 여권 신장에 연대하고 화합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그가 직접 언급했듯, 릴리스 페어는 여성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무대 위 남성 뮤지션들을 무대 아래서 바라봐야 했던 여성 뮤지션들의 자유로운 무대를 갈망했다. 비단 그들이 얻은 건 무대뿐만이 아니다. 흔히 여자들이 모이면 서로를 적대시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출연자들은 서로 사랑과 기쁨을 공유했다. 무대 위에서는 기쁨의 노래를, 무대 아래에서는 속 깊은 대화로 서로의 삶을 나눴다.

릴리스 페어는 여성을 '위한' 페스티벌보다 여성 '중심의' 페스티벌에 가까웠고, 이 이상의 다양한 인권을 인정하는 평등의 장이었다. 흑인 알앤비의 대표적인 여성 뮤지션 인디아 아리(India arie)는 릴리스 페어를 기점으로 모타운과 계약을 체결했고, 영국 밴드 모치바(Morcheeba)의 결정적인 인물 스카이 에드워즈(Skye edwards)는 “나는 흑인임에도 싱어송라이터가 된 게 아니라, 그저 싱어송라이터인데 마침 흑인인 것뿐이다”라며 릴리스 페어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켰다. 당시 무명이었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또한 1999년 릴리스 페어에 설 기회를 얻었다. 무명과 흑인, 그리고 여성. 이유 없이 약자가 되었던 그들도 릴리스 페어에서는 그저 한 명의 뮤지션이었다. 여성의 인권을 넘어서 모두의 인권을 통용한 아름다운 페스티벌로 남았다.



#2.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결국엔 음악

'Adia I do believe I failed you / Adia I know I've let you down (이디아, 내가 널 저버리고 / 실망시켰다는 걸 알고 있어)'언뜻 보면 연인에게 바치는 화해의 노래 같지만, 사실은 친구의 전 남자친구와 결혼해 미안한 마음을 담은 'Adia' 속 가사이다. 그렇게 결혼한 남편과의 이혼, 딸의 탄생과 맞물린 어머니의 죽음까지. 녹록지 않은 그의 개인사는 수준 높은 음악으로 승화됐다.

2010년 발매된 7번째 정규앨범 <Laws Of Illusion>에 수록된 'Changes'로 이혼의 심정을 토로하고, 다음 작인 <Shine On>의 'Song for my father'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상처와 허물은 자전적인 음악을 성취해냈다. 릴리스 페어를 창시하고, 음악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더욱 빛나게 해준 건 무엇보다도 탄탄하게 다져진 음악적 능력이었다.

상업적 음악인 틴 팝, 라틴 팝의 유행으로 주어진 곡을 부르는 여성 가수들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직접 곡을 쓰는 그의 행보는 독립적이며 주체적이었다. 그렇게 뽑아낸 양질의 음악은 OST에서의 활약을 이끌었다. 영화 <City Of Angel>의 OST로 알려진 'Angel'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스매싱 펌킨스의 키보디스트 조나단 멜보인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토이스토리2>에 수록된 'When She Loved Me'는 애절한 목소리로 장면의 몰입을 도와 평단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이외에도 그의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밴쿠버 아이들이 무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라 맥라클란 음악학교(Sarah McLachlan School of Music)'를 설립하고, 'World on fire'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 위한 15만 달러의 예산 중 제작비 15달러를 제외한 금액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단지 그는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는 모습이 전부이고, 세계 각국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과 함께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담아낸 뮤직비디오는 좋지 못한 품질에도 마음을 울린다.

2010년, 밴쿠버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그의 'Ordinary miracle'이 울려 퍼졌다. '삶이란 매일 우리를 위해 포장된 선물 상자이고, 열어보고 베푸는 방법은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노랫말처럼 그의 음악사는 언제나 자유로이 날갯짓했다. 여성은 수동적이며, 무언가를 해내지 못할 거라는 시대의 편견을 무참히 무너트렸고, 시대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주지시켰다. 온화한 미소의 그는 사실 착하기만 한 'Angel'이 아니라 고요하지만 강인하게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Lilith'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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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임진모가 뽑은 ‘내 인생의 1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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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처음 틀었던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음악인생의 시작이라고 밥 먹듯 얘기한다. 이후 서구 로큰롤, 팝으로 냅다 달려갔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 프리 틴 때 나를 건드린 노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 음악을 따라가던 이 시절의 대세는 트로트와 미국식 스탠더드 팝. 소멸된 것 같다가도 이 음악들은 새봄에 다시 싹이 트듯 내 삶에서 잠재와 현재(顯在)를 반복했다. '목포의 눈물'은 최초의 (일제에 대한) 저항가요일지 몰라도 내게는 '학교 밖의' 첫 노래였다. 초등 6학년 봄 소풍 때 학부모 대표로 나서 이 곡을 부르신 한 급우 어머님의 그 구성진 가락을 잊지 못한다.


황금심 '외로운 가로등'(1939)

세상이 무서워 방에 있는 게 좋았다. 대신 외로웠다. 이 노래는 실로 외로움이 실연 통(痛)을 더 높이는 블루스 비극미의 극치일 것이다. 내 스타일이었다.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속을/ 너마저 울려주느냐..' 황금심의 목소리는 증폭기가 필요 없을 만큼 커서 더 둔중하게 가슴을 내리누른다. 나중 차인표 송윤아 주연의 드라마 <왕초>(1999)에 이 곡이 나왔을 때 마음속에 뭔가가 불쑥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박신자 '땐사의 純情'(1959)

질긴 생명력으로 따지면 이 곡을 넘지 못한다. 어릴 적 못났다는 말을 듣고 자란 터라 이상하게도 처량함, 막막함, 구슬픔 등등의 '비탄'쪽 정서에 이끌렸다. 게다가 노랫말은 '10대가 들어선 안 되는' 내용이라 더 깊숙이 들어왔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나중 동네삼촌이 그랬다. 예뻤던 박신자는 미인은 박명이라고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고. '울어라 색스폰아∼∼' 금지 처분이 풀리던 1988년 시점에 나온 이순길 버전도 기억에 남는다.


박재란 '밀짚모자 목장아가씨'(1964)

개발시대 그 못살던 시절에 밀짚모자는 뭐며 포플라, 양떼, 목장은 뭔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들이라서 혹했던 건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를 통해 우리가 긴급 동의한 것은 오랜 핵심정서, 바로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마치 애들한테는 고구마말랭이와 쌀엿을 내동댕이치게 한 초콜릿, 아이스콘의 습격과 같은 맥락. 첫대목 '시원한 밀짚모자'와 후렴구 라라라를 지겹게 따라 불렀다. '이런 게 양키 구라파 음악이구나!!'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가 이 곡을 들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런 게 북한 노래구나!!'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1966)

최고의 콤비가 된 박춘석과 이미자 콜라보레이션의 서막. 1964년 '동백아가씨'의 센세이션으로 데뷔 5년이 지나서 마침내 정상에 오른 '엘레지의 여왕'은 라디오연속극 주제가에 또 한 번 일절 장식과 기교가 없는 미니멀리즘 창법으로 선풍을 재현한다. 그럼에도 순정의 힘 때문인지 후반 '서울 ∼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는 수백 번 꺾기가 구사된 듯 절절하다. 괜히 이미자 이미자 하겠는가. 형들은 조금은 이기적인 가사로 바꿔 불렀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지금도 60대 이상 어른들한테 꿈이 뭐였냐고 물으면 섬마을 선생님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있다.


최희준 '종점'(1966)

작은집의 한 삼촌이 내게 그랬다. '이런 노래는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데...' 영화 주인공의 산업스파이 행각이 들키면서 자살로 막을 내리는 19금 소재와 그 처절한 사운드트랙 노랫말을 전제해서였을까. 그런데도 '광복20년' '팔도강산'과 같은 건전가요보다는 비참가요를 선호했던 나는 안 되는 쪽으로 갔다. '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아아아아 내 청춘/ 꺼져가네..'어린 애였는데도 꺼져가는 것에 왠지 마음이 갔다. 고 최희준은 부드러운 냇 킹 콜 창법에다 클라이맥스의 폭발성도 겸비한 당대 극강 보컬이었다.


배호 '두메산골'(1966)

각 시대의 고유정서라는 중요한 함수가 개입하기 때문에 꼭 내가 들어온 음악들이 대물림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과거의 음악이 흘러간 것들이지만 그중 더러는 이후 세대의 필요에 의해 부활하기도 한다. 과거시제가 역사성을 획득하는 순간인데 이 대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가수가 배호다. 최희준이 굵음이라면 배호는 가녀림이다. 아픈 몸이어서 그랬을까. 쑤욱 치솟는 고음, 이건 한마디로 절세 가창(佳唱)이다. 이 곡에서 한번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불며'와 '아니 떠나리/ 수수밭 감자밭에' 부분을 들어보라.


남진 '어머님 얼굴'(1967)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를 달군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때 대체로 나훈아 편에 섰지만 곡 하나만 고르라면 배우 뺨치는 미남이 애타게 부른 이 노래였다. '어머님/ 참사랑에/ 목이 타는/ 어린 자식..' 일반적 트로트가 아니라 모던 팝이라 할 만큼 세련된 곡조였다. 남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하면서 비슷한 곡 '어머니'가 더 떠서 이 곡이 묻혀버렸다고 설명했다. 늘 색다르고 새로운 노래를 찾았다. 돌이켜보면 다양성 욕구가 그때 이미 싹텄던 것 같다.


이장희 '그건 너'(1973)

지금도 말과 글에서 고매한 문어체가 아니라 속화된 구어체를 사랑한다. 이 곡은 정형화된 가사패턴으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형이 원색적 톤으로 마구 지껄이는 느낌이었다.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는 딴 가요에는 없는 가사였다. 언어는 그렇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엉김, 반항, 비타협이 넘실거렸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후 나도 모르게 씩씩해졌다.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1974)

나중에 이런 걸 기타리프라고 한다고 알게 됐지만 처음 들었을 때 기타 전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슷한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 록의 대부'라는 수식처럼 거문고 가야금을 뜯는 듯한 기타연주는 물론, 가락 전체가 한국적이었다.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평. “그 누구에게라도 단 5음계만으로 이렇게 멋진 곡을 써 보라고 해보시라. 기념비적인 곡으로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100년 후엔 '아리랑'과 같은 반열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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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차트 시대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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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차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020년 7월 6일부로 음원 서비스 멜론의 '실시간 차트'는 '24Hits'라는 새 이름으로 운영된다. 한 시간 단위로 차트 추이를 업데이트하며 순위를 표기하던 지금까지의 방식을 폐기하고, 24시간 동안 이용량 중 스트리밍 40%와 다운로드 60%를 반영해 순위 표기 없이 인기곡을 소개하겠다는 취지다. 또한 이용자 개인의 청취 습관을 기반으로 인기곡을 나열하는 'My 24Hits'라는 차트를 추가 공개하며 음원 '개인화' 흐름에 동참하는 모습도 보였다.

멜론이 실시간 차트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차트 없이 침체되어가던 가요계에서 멜론의 실시간 차트 서비스는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새로이 규정했다. 2004년 SK텔레콤 산하 사업으로 출발한 멜론은 2010년에 이미 유료 가입자 120만 명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디지털 음원 시장의 절대 강자로 입지를 굳히게 되자 자연스레 뉴 노멀(New-Normal)의 권력을 쥐게 됐다. 실시간 차트의 시대가 열렸다.


100위권 외 음악은 음악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이보다도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던 시대가 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실시간 차트 위 '전체 재생'을 누르기만 하면 당대 제일 유행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이용권을 구매하지 않아도 불법 파일 공유 사이트에는 '멜론 O월 O주차 차트 100위' 파일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용권 가격이 저렴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에 음악은 딱 100곡만 존재하게 됐다. 발매와 동시에 차트에 진입하지 못하면 그 곡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망각의 쓰레기 더미'처럼 영영 잊혀갔다. 이용자층이 많지 않았을 때는 잠잠했지만 실시간 차트가 한국 유행가의 척도가 된 후에는 모두가 차트 진입에 사활을 걸었다. 베테랑 가수 휘성의 2014년 곡 '돈 벌어야 돼' 속 가사가 정확히 그 시대를 기록한다. '연두 과일나무 정상에 한번 걸려야 돼 / Music makes me cry…'

간혹 '빙봉의 로켓 수레'처럼 망각의 틈에서 솟아오르는 노래도 있었다. 미디어의 영향도 있었고 기타 이슈도 있었지만 이 고난의 서사에 대중은 '역주행'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플랫폼도 이를 부추겼다. '차트 밖 1위'라는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어 100위권 안으로 진입한 노래를 친히 구제하며,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노래들에 고난의 서사를 부여했다. 1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노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노래 중 딱 100곡 만을 강요받았다.


부추기기



오직 100등까지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경쟁은 과열됐다. 2010년대 중반까지 '차트 줄 세우기'는 일상이었다. 음원 공개되는 자정만 되면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돌 팬덤들이 '총공'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벌였다. '숨밍(숨 쉬듯이 스트리밍)'이라는 새 시대의 언어 아래 팬들은 가족, 친구들의 휴대전화를 빌려 스트리밍 앱을 켜고 자신이 응원하는 그룹의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달성한 차트 1위, 그 아래 차례대로 늘어진 노래들은 결국 우리가 승리했다는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멜론은 실시간 차트의 경쟁을 부추겼다. 5분 단위로 실시간 차트 변동 추이를 생중계하고 24시간 누적 이용자 수를 전시하며 인기 순위를 마치 거대한 경마장으로 만들었다. '경합', '차트 지붕킥' 등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며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성토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100위 권 안에만 들면, 상위권에만 안착하면 보장되고 확장되는 성공 앞에선 공염불이었다. 오히려 왜곡된 시스템에서 비판받는 이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주체가 아니라 팬들과 이용자들이었다.


음원 사재기가 가져온 최후의 날



자연히 어두운 손길이 다가왔다. 이미 2013년부터 음원 사재기, 차트 조작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됐다. 수천만 원부터 수억 원까지 돈을 챙긴 브로커들이 유령 계정을 생성하고 대포폰을 사들여 '작업장'을 차려놓고 차트 진입을 사고 판다는 제보였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페이스북 페이지, 유튜브 채널 등을 활용한 '바이럴 마케팅'이 극성이었다. 발표한 지 몇 개월이 지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가수의 노래가 아이돌 그룹 및 유명 가수들을 제치고 갑작스레 반등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논란의 중심이 된 아티스트들, '마케팅 업체'라 주장하는 소속사들, 멜론을 운영하는 카카오 M, 문화체육관광부 모두 음원 사재기 의혹을 부정하거나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해당 음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음원 사재기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최선이었다.

100위권 진입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던 팬덤도, 공정을 화두로 삼고 있는 대중도 분노했다. 그리고 이들 '기계 픽(음원 사재기 논란에 휩싸인 곡들의 멸칭)'은 공고할 것 같았던 실시간 차트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차트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뢰를 잃어버린 플랫폼들은 결국 대규모 개편을 택했다. 2010년대 말부터 디지털 시장의 패권을 유튜브로 빼앗긴 것 역시 버틸 힘을 잃게 했다. 2019년 1월 네이버 바이브가 실시간 차트를 일간 차트로 변경해 제공한 후 실시간 차트 폐지를 선언한 SK텔레콤의 FLO가 뒤를 이었다. 바이브는 이용자 중심의 새 정산 방식(VPS)까지 발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했다. 결국 가장 큰 지분을 쥐고 있던 멜론 역시 '실시간 차트'의 간판을 바꿔 달았다.


'개인화', '공정' 외치기 전에



그러나 정말 이게 변화일까. 개혁을 선언하며 새로 만들어진 차트들 역시 예전 실시간 차트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24Hits 차트만 보더라도 노래 제목 옆 번호만 없어졌을 뿐 한 시간 단위로 순위를 업데이트하고 나열하는 것은 그대로다. 최상위권의 변동폭은 여전히 좁고, 인기 가수들을 제외한 음악인들에게 100위권 진입은 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개편 후 특정 곡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다거나 오래도록 차트에 머무르는 빈도가 줄어드는 등의 긍정적인 모습도 목격된다. 하지만 팬덤은 여전히 '숨듣', '총공'을 종용하고 각종 차트 분석 사이트들에선 여전히 '지붕킥', '종합 이용자수', '추이 그래프'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된다. 여기에 개인화나 큐레이션은 없다.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국내 청취 시장에서 음원 다운로드 비중을 60%나 반영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사재기와 줄 세우기에 대한 우려가 생긴다. 사재기 의혹과 아티스트 수익 배분 문제 어느 하나 시원하게 해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운치 않은 지표다.

개인화를 외치며 난세를 타개하고자 하는 한국 스트리밍 음악 세계지만 언제나 그들의 세계는 100곡이 기준이다. 사재기 논란이 대적으로 점화되지 않았다면,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해외 플랫폼의 기세가 거세지 않았다면 애초에 변화를 시도했을지조차 회의적이다. 셀 수 없이 매년 많은 이들이 공신력 있는 대표 차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지만 '실시간 차트' 생태계에선 공정보다 수익이 먼저기에 가능성이 없다.

공정한 음악, 정당한 차트를 외치기 앞서 플랫폼들은 실시간 차트를 생태계 표준으로 만들어버린 도의적 책임부터 지녀야 한다. 실시간 차트의 시대를 살며 음악은 경마장의 말, 사업 아이템, 수익 모델에 더 가까워졌다. 저작권료 횡령 등 그간의 범죄까지 언급하자면 그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대중은 진정한 변화, 공정한 순위를 바란다. 눈 가리고 아웅 앞엔 도태만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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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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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는 코로나 19 여파로 인한 음악 산업계 피해 규모가 약 877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중소 레이블 및 유통사의 발매 연기 및 취소, 인디 뮤지션들의 소규모 공연부터 대규모 페스티벌까지 사라져 버린 공연 시장의 실태를 반영한 통계다. 그러나 이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음악인들의 목소리가 있다. IZM은 코로나 19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모든 종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첫 번째로 IZM이 찾아간 곳은 이태원이다.

 


2019년 8월 4일 발표된 기린과 박재범의 합작 앨범 <Baddest Nice Guys>의 '오늘밤엔' 뮤직비디오에는 정확히 1년 전 이태원의 여름밤이 담겨있다.

'오늘 밤에는 준비한 게 딱히 별로 없지만 / 왠지 모르게 난 기대가 되는걸….'

들뜬 마음의 노래와 함께 카사 코로나(Casa Corona) 루프탑에 모인 각양각색 아티스트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로 춤을 춘다. '이태원에 시작해서 홍대까지 달려보자'라 노래하는 사람들. 분명 작년의 이태원은 이랬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소프 서울(Soap Seoul)의 공동 설립자 DJ 팰런스(Fallens) 역시 반복되어온 일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올해 3월 첫째 주에는 소프의 오픈 3주년 기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섭도록 확산됐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재난 경보 문자가 요란하게 길거리를 덮었다. 권고나 제약 사항은 없었지만 내부 논의를 거쳐 3월 5일부터 한시적으로 임시 휴업을 결정했다.

이태원 언더그라운드의 상징적인 클럽 케이크샵(Cakeshop) 역시 3월 22일부터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따라 15일간 영업 중지를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초기 방역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불안했지만 잠시 생각했다.

2016년 한남동에 문을 연 서울커뮤니티라디오(Seoul Community Radio)는 올해 5월 5일 더 많은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남동에 위치했던 작은 스튜디오를 이태원 초등학교 옆으로 옮겨 넓혔다. 바로 그다음 날인 5월 6일 용인시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 한 명이 발생했다. '이태원 발 집단감염'이 시작된 날이었다.

이후 5월 9일부터 서울시가 내린 집합 금지 행정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이태원의 모든 클럽이라고 사료되는 공간은 문을 닫고 있다. 서울커뮤니티라디오의 기획자 이슬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나마 오프닝 파티라도 한 게 다행이었어요."

 


세 달이 지난 지금 이태원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지하철 6호선 녹사평-이태원-한강진을 가득 메웠던 발길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클린 이태원!”이라는 로고 아래 임대 문의와 폐업을 선언한 빈 가게들이 황량하다. 이슬기의 회상이다.

“클럽에 발길이 끊긴 것보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한 사람으로서 '유령 도시'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동네가 된 게 더 슬펐어요. 택시 기사님께 이태원으로 가 달라고 하니 거절당한 적도 있네요.“

지난 6월 2일 상가정보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이태원 상권 중대형 상가 평균 공실률은 전 분기 대비 9% 증가한 28.9%였다.

누군가에게는 매주 유흥의 공간이 사라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주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던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문화계 관계자들과 아티스트들에게는 중대한 문제였다. 음악을 틀 수 있는 곳, 아이디어를 나누던 장소, 즐거운 파티를 위한 기획 모두가 백지화됐다. 유명 브랜드의 후원이 끊기며 운영에도 차질이 생겼다.

로컬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을 인터넷 방송으로 소개하던 서울커뮤니티라디오는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수익을 얻었으나 코로나 확산으로 현재 수익의 90%가 끊긴 상태다. 1년 치 마케팅 비용을 회수해 간 곳도 있었다.

방송에 출연해 음악을 소개하던 아티스트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본래 DJ가 가장 바쁜 시기는 7~8월. 그러나 공연도, 클럽도, 파티도, 페스티벌도 사라진 지금 음악 하나만 하고 있었던 이들은 아주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상심하신 분들도 많고, 당장 어려워진 분들도 많죠.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문화예술계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이 없진 않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화예술인 긴급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예진흥기금 351억 원을 추가 편성하고,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7월 8일 3차 추경 예산 1,569억 원을 지원계획을 밝히며 232억 원은 '예술인 창작준비금'으로, 공연예술계 일자리에는 319억 원을 투자할 것이라 알렸다.

그러나 대중음악계의 체감은 미미하다. 특히 이번 코로나 사태는 소속사가 없는 아티스트들과 공연장들에 더 타격이 큰데 이들에게는 거의 유의미한 지원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

특히 이태원의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은 목소리조차 내기 어렵다. '인디'라는 개념으로도, '전자음악'이라는 개념으로도 하나의 집단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이에 대해 팰런스는 '클럽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어찌 됐든 이태원 클럽에서 대규모 감염 확산이 있었으니까.'라 이야기하면서도, '다만 그 한 면만으로 모든 게 평가받는 게 속상하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DJ는 음악을 '연주' 하지 않으니까 아티스트가 아니고, 클럽 하면 퇴폐적이고 어둡고 음산하고… 그런 이미지가 계속 굳어지는데 이를 극복하려면 아직 힘이 많이 모자란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상처는 사회 전반으로부터 쏟아진 차별의 시선과 혐오 표현이었다. 케이크샵의 오너 가브리엘(Gabriel)과 사무엘(Samuel)이 특히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언더그라운드 클럽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술을 마시고, 시끄러운 음악에 춤만을 추는 공간은 아니다. 커뮤니티를 통해 서브컬처라는 개성 있는 또 다른 특질의 문화를 생산하고, 또 그를 통해 다양한 음악을 포함한 예술 등의 문화가 공존할 수 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 외국인들, 동성애자들, 그리고 나이트클럽 등 요소들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며 혐오를 부추긴 미디어 행태가 속상했다. 언론이 이태원에 낙인을 찍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사태는 커뮤니티가 특히 취약한 상황이었다.”

이슬기 역시 '이태원'이라는 이름에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진 것을 경계했다.

“'이태원 발 코로나 확산'이 화제가 된 5월 6일 서울커뮤니티라디오 모든 구성원들이 용산구청에 가서 검사를 받았어요. 운영하는 이들은 물론 이태원에 거주하는 많은 DJ들과 프로듀서들, 아티스트들도 검사받았죠. 단 한 명도 양성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어요.”

 


이태원 커뮤니티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뭉쳐야 산다'를 깊이 새겼다. 6월 12일부터 소프 주도로 진행한 '서포트 이태원(Support Itaewon)'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볼노스트(Volnost), 파우스트(Faust) 같은 언더그라운드 클럽은 물론 서울커뮤니티라디오, 이태원 일대 음식점과 카페, 바까지 포함해 이태원을 지지하는 티셔츠를 발매했다.

인스타그램에서 3천 회 이상의 '좋아요'를 받으며 화제를 모은 이 프로젝트는 일주일 만에 온라인 티셔츠 판매를 완료 지었다. 수익금의 절반은 프로젝트 참여한 업장들과 나눴고, 나머지 절반은 용산구청에서 출연한 비영리 공익재단 '용산복지재단'에 기부했다.

케이크샵도 '리플라이 이태원(Reply, Itaewon)'이라는 이름의 커뮤니티 프로젝트와 함께했다. 언더그라운드 베뉴 피스틸(Pistil), 서울커뮤니티라디오 및 다양한 지역 사업체들과 함께 지구본 모양의 티셔츠를 제작했다.

이어 케이크샵은 6월 27일에는 서울커뮤니티라디오와 함께 '아트 오브 더 포스터' 큐레이션을 진행했다. 올해로 오픈 8주년을 맞는 케이크샵을 다녀간 수천 명의 아티스트와 디제이들의 포스터가 서울커뮤니티라디오에서 갤러리처럼 전시됐다.

언더그라운드 구성원들을 위한 비영리 사단 법인도 조직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전까지는 언더그라운드 클럽이나 아티스트들 간의 교류가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심각해지며 서로 손을 잡고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관계자의 소개에 의하면 비영리 사단 법인의 목적은 “인증된 단체를 조직해 공식적으로 아티스트들과 클럽들의 목소리를 담고, 나아가 한국 클럽 문화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다.


클럽 문화는 불확실하고 혼돈스러운 시기에 오히려 잘 자란다.



7월부터 제한적으로 클럽들이 문을 열고 아티스트들도 다시금 활동을 재개하는 추세다. 그러나 여전히 이태원에 일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이들은 난생처음 경험했던 침묵을 결코 잊지 못한다.


“대규모 감염이 터진 그 주 토요일 밤에 이태원 초등학교 쪽에서 녹사평역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봤어요. 한창 사람들로 붐볐을 12시 정도였는데 이태원역까지 사람이라곤 한두 명밖에 없었어요. 그 후 한동안 사람 보기가 어려웠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우연히 작년 소프에서 음악을 트는 제 모습을 봤는데 든 게 꿈같았어요. 아무도 마스크를 끼지 않아도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제재받지 않고, 그 앞에서 제가 음악도 틀 수 있다는 세상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예요.”

그럼에도 코로나 이후의 일상을 그리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로컬 아티스트들과 기획자들, 운영자들 모두가 인식 개선을 위해 연대하고 있다. 이것이 음악인, 문화인들만을 위한 연대를 넘어 이태원이라는 지역 자체를 아우르는 로컬의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역시 고무적이다.

이태원의 아티스트들은 오늘도 투쟁 중이다. 보편을 위해, 일상을 위해, 편견 없이 사람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을 되찾기 위해.

“코로나바이러스를 비롯한 온갖 사태들 때문에 세계 각지의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 도시에 특색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언더그라운드 문화다. 우린 이 사태를 이겨내고 언더그라운드의 생명을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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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0주년 공일오비, 빛나는 현재진행형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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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은 대중과의 교감을 기본 덕목으로 갖는다. 기쁨, 슬픔, 외로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나 설렘 등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을 노래함으로써 대중과 친분을 맺는다. 여기에 많은 이가 공통적으로 접하는 세상의 이모저모를 다루는 일도 공감대 형성의 중요한 면을 차지한다. 정서와 사고를 너르게 나누는 음악가가 많은 이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뮤지션이 길이 기억되기 위해서는 음악성도 필수다. 작품이 견고하고, 매번 산뜻함을 내보여야 음악 애호가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여기에 다채로움도 장수를 위한 불가결한 조건으로 따른다. 여러 형식을 두루 소화할 때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기가 수월하다. 이 세력은 활동에 추진력을 부여한다.

정석원과 장호일이 이끄는 공일오비(015B)는 일련의 사항을 만족하는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그룹의 노래들은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한 6집을 제외하고 항상 대중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폈다. 앨범들은 튼실했고, 호화로웠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공일오비는 뛰어난 교감 능력과 탄탄한 작품으로 대중음악계에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


애틋함을 증대하는 신선한 서정미



공일오비 노래의 으뜸 매력은 참신한 서정성이다. 여느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얘기를 주로 풀어냈지만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1990년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텅 빈 거리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잊지 못한 나머지 몇 번이나 전화를 걸려고 하지만 주저하는 화자의 모습을 "야윈 두 손에 외로운 동전 두 개뿐"이라는 가사로 에둘러 표현한다. 당시 공중전화 통화 요금이었던 20원이 용기를 내지 못하는 화자의 상태를 극적으로 나타냈다. 손에서 사라지지 않는 동전이 처연함을 훌륭하게 연출했다.

2집 <Second Episode>의 '변해 간 세월 속에서'는 다른 사랑으로 옛 연인을 잊으려 했지만 "결국 너의 틀에서 비교할 뿐이잖니"라며 지나간 사랑을 갈구하고 있음을 전한다. 5집 <Big 5>의 '그녀의 딸은 세 살이에요'는 이제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옛사랑의 아이를 매개로 이별 후 흘러간 시간을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의 연인을 기억에 붙잡아 두려는 한 남자의 연모를 묘사한다. 다소 지질해 보이긴 하지만 아이를 가사에 들인 덕에 털어놓는 소회가 담담하게 다가온다.

변함없는 일상에 대비해 이별 후의 상실감을 극대화하는 4집 <The Fourth Movement>의 '모든 건 어제 그대로인데', 헤어진 연인이 불행하길 바란다는 말로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7집 <Lucky 7> 수록곡 「I hate you」도 공일오비 사랑 노래의 뻔하지 않은 모습을 설명해 준다. 그럼에도 이들 가사는 사랑과 이별 때문에 생겨나는 갖가지 감정을 폭넓게 포섭해 많은 이의 공감을 샀다.


사회의 문제점을 녹여 낸 유의미한 메시지



사회와 밀착한 내용도 공일오비 노래들의 특징이었다. 이 역사는 2집의 첫 곡 「4210301」로 시작된다. 노래는 소음, 매연, 등 굽은 물고기 등을 언급하면서 날로 심해지는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키우던 개가 산성비를 먹고 죽었다는 간주의 영어 내레이션은 픽션치고는 지나치게 앞서 나가긴 했지만 노래 덕분에 음악 팬들은 환경 문제를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룹은 3집 <The Third Wave>의 「적(敵) 녹색인생」에서 다시 한번 환경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무스와 일회용 용기 같은 화학제품의 만연, 궁상맞게 보이기 싫어서 식당에서 음식을 어느 정도 꼭 남기는 행위 등 누구나 일상에서 접하는 일들을 기록해 친근하게 느껴졌다. 「적(敵) 녹색인생」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실천 가능한 환경보호 캠페인송으로 남았다.

4집 중 「제사부(第四府)」는 계층 간 괴리를 부추기는 미디어와 진실에 무책임한 황색언론을 비판하고, '교통 코리아'는 일부 운전자들의 폭력적인 운전 습관을 꼬집는다. 5집 <Big 5>에 수록된 「Netizen」은 정보화 사회에서 인터넷만 바라보는 탓에 사람들과는 단절되는 상황을, '결혼'은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을 배우자로 두려고 하는 천박한 결혼 문화를 지적한다. 이때 공일오비가 던진 화두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한국 사회의 문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퍽 씁쓸하다.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이 매번 무겁지는 않았다. 2집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장관리'를 하듯이 거리를 두며 대하는 젊은 여성을 소재로 다룬다. 2011년에 낸 EP <20th Century Boy>의 「고귀한씨의 달콤한 인생」은 허세와 포장된 자랑에 집착하는 SNS 삶을 들춰낸다. 4집의 「요즘 애들 버릇없어」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간극을 논하며 서로 이해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공일오비가 전한 사회적 메시지는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마주하는 일들이기에 까다롭지 않게 들렸다.


싱싱하고 다양한 음악



음악은 항상 다채로워 감상을 즐겁게 했다. 전신이었던 무한궤도 때와 마찬가지로 1집은 아마추어 느낌이 나는 풋풋한 팝 록, 발라드가 다수였다. 그러나 2집의 「4210301」,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국내에 흔하지 않던 랩을 선보이며 트렌드의 선두에 섰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동부 이촌동 새벽 1:40」으로는 이지 리스닝 재즈를 소화하며 편안함을 제공했다.

이후 변화와 새로운 스타일의 모색은 더욱 활발해졌다. 3집 중 1분 20초에 달하는 긴 길이의 전주로 파격을 행한 「아주 오래된 연인들'로는 하우스 음악을, 「적(敵) 녹색인생」에서는 아카펠라를 들려줬다. 4집도 서프 음악(「신(新) 인류의 사랑」), 힙 하우스 성격을 띤 댄스 팝(「남자들이란 다」), 하드록과 랩을 결합한 댄스음악(「교통 코리아」) 등을 시도함으로써 음악 스펙트럼을 넓혔다. 5집은 인더스트리얼 음악(「바보들의 세상」), 포스트 디스코(「단발머리」), 뉴 잭 스윙(「마지막 사랑」), 펑크(funk)(「결혼」), 인텔리전트 댄스음악과 록의 퓨전(「Netizen」) 등을 아우르며 전보다 더 화려한 면모를 보였다.

1막 마지막이 된 1996년의 6집 The Sixth Sense Farewell To The World>도 어마어마했다. 테크노(「인간은 인간이다」, 「구멍가게 소녀」), 인더스트리얼(「마르스의 후예들」, 「Nuclear energy」), 얼터너티브 록(「콩깍지」), 뉴에이지(「Femme fatales」) 등 다양한 장르로 꾸몄다.

2006년 7집으로 10년 만에 컴백했을 때에도 유행을 포착하는 민첩성은 그대로였다. 「처음만 힘들지」로는 비디오게임 음악에 착안한 칩튠을, 「그녀에게 전화 오게 하는 방법」에서는 피치를 올린 샘플링 기반의 힙합을 들려줬다. 「잠시 길을 잃다」로는 R&B를, 「성냥팔이 소녀」로는 라틴음악을 접목한 하우스를 시도하는 등 새로운 양식을 향한 탐구심은 변함없이 강했다.


객원 가수를 통한 독자성 확립



공일오비를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객원 가수 시스템이다. 지금 흔한 피처링 방식이 이들로부터 정착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이 객원 가수를 둔 국내 최초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1집부터 게스트 보컬리스트들을 기용해 작품에 개성을 부여해 왔다. 음색과 가창이 저마다 다른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니 앨범이 한층 풍성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터줏대감은 현재에도 공일오비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윤종신이다. 이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김태우, 「5월 12일」의 이장우, 「신(新) 인류의 사랑」을 부른 김돈규 등 재능 충만한 가수들을 배출했다. 김태우, 이장우, 김돈규는 솔로로서 각각 「날 떠나보내려는 너에게」, 「훈련소로 가는 길」, 「나만의 슬픔」 같은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았다.

공일오비의 객원 보컬은 3집 중 윤종신과 박선주가 듀엣으로 부른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을 제외하고 여가수가 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시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장필순, 신윤미 등도 보컬로 참여했으나 백업 보컬만 맡았다.

남성 보컬리스트만 찾던 관례는 컴백을 알린 2006년의 리믹스 앨범 <Final Fantasy>에서 깨졌다. 이곳에서 여성 멤버가 리드 싱어인 블루 샤벳(「수필과 자동차」), 캐스커(「21C 모노리스」)를 초청해 여성의 목소리를 들였다. 같은 해 출시한 7집에서도 요조(「처음만 힘들지」), 호란(「성냥팔이 소녀」), 신보경(「잠시 길을 잃다」) 등을 초대해 소녀, 숙녀의 감정을 표출했다. 2017년 시작된 3막부터는 여성 가수와의 협업이 더욱 늘어났다. 신현희, 심규선, 유라, 열두달의 나율, 장재인, 와인 등 많은 여성 보컬리스트가 공일오비의 노래에 목소리를 제공하고 있다.

공일오비는 게스트들을 왕창 모은 '단체 곡' 포맷으로도 돋보였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응당 아는, 친구들과 노래방을 갔을 때 우정을 다지며 꼭 부르던 2집의 「이젠 안녕」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자 유영석과 송경호의 푸른하늘도 1993년 「이젠 안녕」을 흉내 낸 「마지막 그 아쉬움은 기나긴 시간 속에 묻어 둔 채」를 발표했다. 그룹의 단체곡 형식은 3집의 「수필과 자동차」, 4집의 「우리들의 이야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데뷔 30주년, 지금도 정력적인 활동



2012년 하반기 들어 갑자기 종적을 감춘 공일오비는 2017년 본인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Anthology> 프로젝트에 착수하며 3막을 열었다. 이듬해부터는 직접 레이블을 설립하고 젊은 뮤지션들과 협업해 신작을 만드는 <New Edition> 시리즈를 병행하고 있다. 이 과업은 7월로 22회를 맞이했다. 2018년 이후 발표해 온 신곡들의 장르 역시 예스러운 솔뮤직(「나의 머리는 녹색」), 포크(「서울의 눈」), 사이키델릭 록(「동백꽃」), 뉴 잭 스윙 스타일의 R&B(「Murky time」), 얼터너티브 록(「Random」)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강한 대중성과 높은 완성도를 함께 나타낸 역사가 30년이 됐다. 연차가 오래된 뮤지션은 대개 느슨해지고 나태해진다. 그런 이들과 달리 공일오비의 음악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여전히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짜임새도 좋다. 야무진 작품 세계를 확립한 거장이 이제는 부지런함까지 갖췄다. 데뷔 30주년이 더없이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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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태고부터 현재의 대중음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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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Acoustic)은 '청각의', '소리의', '음향학'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아카펠라는 중세 유럽의 교회 음악에서 유래한 말로 악기의 반주 없이 부르는 합창곡을 뜻한다. 현대음악에서 어쿠스틱은 악기 본래의 울림을 살린 자연적인 소리를 말하며 그래서 전자 악기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어쿠스틱 음악은 전기의 힘을 빌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로 앰프, 드럼 머신, 시퀀스 같은 전자 장치를 사용하지 않은 음악을 뜻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음악은 서양 문화에 기반을 두지만 음악이라는 이 무형의 예술은 인간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고대인들이 잔치를 벌이는 이유를 신에 대한 모방이라고 말하지만, 단순히 자연이나 신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여서 집단적으로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은 신을 숭배하는 의식에서 시작됐고 그들이 느낀 감정을 재현하고 타인에게 그 감정을 전달하는 성스럽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고대부터 이런 음악의 형식은 어쿠스틱과 무반주 합창곡인 아카펠라였다.

20세기에 전기가 일반화되면서 음악도 전기의 힘에 의존했다. 이 말은 20세기 초반까지의 음악은 모두 어쿠스틱이라는 의미다. 록 음악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스는 노예 신분이었던 흑인들에 의해 탄생한 미국 흑인의 민요다. 값비싼 악기를 구할 수 없었던 흑인들이 그나마 손쉽게 연주할 수 있었던 악기는 통기타와 하모니카와 같은 어쿠스틱 약기였다. 이렇게 전기적인 장치 없이 자연의 소리로 연주한 블루스를 '컨트리 블루스'라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남부의 흑인들이 공장이 많은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같은 북부의 공업 도시로 이주하면서 컨트리 블루스는 전기적 장치를 장착한 일렉트릭 블루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블루스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비 킹, 머디 워터스 등이 바로 이 일렉트릭 블루스와 시카고 블루스의 명인들로 몸집이 커지고 소리가 높아진 블루스가 미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흑인의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이 로큰롤, 바로 록 음악이다. 그래서 록 음악은 태생적으로 짜릿한 전기적 에너지를 소유한 이종교배의 결과물이다.

 

▶비비 킹(B.B. King)

어쿠스틱 음악의 혁명적인 지각 변동

1950년대와 60년대 로큰롤의 열풍은 어쿠스틱의 미학을 추구하는 포크 음악 판도에도 변화를 주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은 통기타와 하모니카처럼 소박한 연주로 여백의 미를 지향하던 포크에 일렉트릭 기타를 접목한 포크록으로 당시로선 혁명에 가까운 음악적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1965년에 발표한 'Like a rolling stone'이 그 출발점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사이먼 & 가펑클, 더 마마스 & 더 파파스 등이 포크록을 구사해 인기를 누렸다. 어쿠스틱 포크에서 일렉트릭 포크로의 전환이었으나 밥 딜런은 당시 포크 팬들로부터 순수한 포크를 더럽혔다며 가멸찬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고인 물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밥 딜런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수여했다.

 

▶밥 딜런(Bob Dylan)

1960년대에 등장한 신시사이저는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을 넓힌 일등공신이다. 이 악기 하나로 기타와 베이스, 드럼, 건반은 물론 여러 효과음과 지구상에 없는 소리도 창조해냄으로써 사운드의 신기원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빛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새로운 세계였고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를 접목한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는 일렉트로닉 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자임했다. 이 선각자들은 대중음악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1980년대 초반을 뉴웨이브/신스팝의 전성기로 세팅했다. 휴먼 리그와 유리드믹스 등 수많은 뉴웨이브 그룹들이 1980년대 초반에 인기를 얻으면서 세계 대중음악에 미래지향적인 전자음악의 저력을 증명했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낸 헤비메탈과 랩 그리고 1990년대 초반에 록의 폭발성을 증명한 얼터너티브 록의 득세는 과거지향적인 어쿠스틱 음악의 입지가 좁아짐을 의미했다. 이젠 그 누구도 구닥다리처럼 느껴지는 어쿠스틱 사운드에 귀를 기울일 것 같지 않았다.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어쿠스틱 네버 다이 (Acoustic never die)!

하지만 과유불급,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이 말처럼 뉴웨이브/신스팝의 공급이 많아지면서 대중은 서서히 물려 했고 차가운 기계음에 대한 피로감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너무 기계적이라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이 반대급부로 제시한 이유였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포크 스타일의 어쿠스틱 음악이었다. 흑인 싱어송라이터 트레이시 채프먼, 수잔 베가, 1990년대를 빛낸 사라 맥라클란이 1980년대 후반에 데뷔해서 1990년대 여성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붐을 주도한 주역들이다.

또한 1990년대 초반 세계 대중음악을 집어삼킨 얼터너티브 록과 네오 펑크, 갱스터 랩 같은 과격한 음악에 대한 '거리 두기 현상'이 나타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는 '언플러그드(Unplugged)'라는 단어다. 플러그를 꼽지 않았다는 뜻의 이 언플러그드는 이때부터 전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어쿠스틱과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머라이어 캐리와 에릭 클랩튼, 너바나까지 언플러그드 열풍에 가세하며 전 세계는 잔잔한 자연의 소리에 동화됐다. 언플러그드 현상은 1990년대 초중반 과격하게 흐르는 대중음악에 대한 조용한 반란이자 차분한 거부였다.

 

▶사라 맥라클(Sarah McLachlan)

역사적으로 어쿠스틱 음악은 위기를 맞이한 적은 있어도 소멸된 적은 없다. 이것은 첫 부분에 언급한 음악의 기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에는 듀엣 해바라기와 조동진, 1990년대에는 김광석, 한동준, 장필순 그리고 2000년대에는 아이유, 십센치 등이 어쿠스틱의 뿌리를 이어왔다.

전기 기타의 전율하는 사운드가 록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처럼 자연의 소리로 우리 가슴에 스며드는 어쿠스틱의 울림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이유(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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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레디의 견고한 메시지, 'I am strong, I am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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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섹스 앤 더 시티 2>에서 네 명의 주인공은 각자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안고 함께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로 여행을 떠난다. 사만다는 갱년기에 접어들었고, 미란다는 가정을 위해 직업을 포기했으며, 캐리는 남편에게 주기적으로 각자의 시간을 갖자는 요구를 받았다. 샬롯은 고된 육아에 시달려 지칠대로 지쳐있다. 그런 그들은 여행지에서 헬렌 레디(Helen Reddy)의 「I am woman」을 열창한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환히 웃으며!

대중음악계 여성의 발자취를 짚어 나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정이듯, '허스토리(Herstory)'를 이야기하려면 헬렌 레디를 빼놓을 수 없다. 이즘 'I am woman' 코너명의 탄생 배경이 된 헬렌 레디의 일대기를 그려본다.

“한때 나는 바닥까지 내려갔었어요. 누구도 다시는 나를 바닥에 머물게 할 수는 없어요.”

어릴 적 헬렌 레디의 꿈은 가정주부였다. 영화배우였던 어머니, 배우 겸 감독이자 작곡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았고 실력도 출중했으나 가수의 길은 자의가 아닌 부모의 뜻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 그는 노래 부르기를 거부했다. 비슷한 시기 건강상의 이유로 음악을 그만둘 수밖에 없기도 했다.

헬렌은 스무 살이 되던 해 가정주부의 꿈을 이룬다. 10대 때부터 연애해 온 케네스 위트(Kenneth Weate)와 결혼한 뒤 딸 트레이시(Traci)를 낳았다. 그러나 3년 만에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고 어린 나이에 싱글맘이 된다. 1966년, 어린 딸과 함께 단돈 200달러를 들고 떠난 미국에서 그의 첫 거주지는 허름한 여관방이었다.

그는 살기 위해 음악을 다시 택했다. 어린 딸의 밥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이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노래해야 하는 무명가수였다. 「I am woman」의 노랫말 속 “I am strong, I am woman(나는 강해요. 나는 여자입니다)”라고 외쳤지만, 그의 삶은 결코 강인함만으로 이기기에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계기 역시 제프 왈드(Jeff Wald)와의 결혼이었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로 폰타나 레코드(Fontana Records)에서 첫 싱글 「One way ticket」을 발매하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2년만인 1968년이었다. 그러나 이후 제프와도 이혼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봤자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결심을 더 단단하게 하도록 도와줄 뿐이죠.”



데뷔 싱글로 성공하진 못했으나 이름을 알리는 데는 성공한 헬렌은 1971년 「I am woman」을 발표하며 페미니즘 제2의 물결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페미니즘 제1의 물결이 선거권 및 법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운동이었다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지속된 미국의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은 편중된 가사 노동으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가정 내에 국한되는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헬렌 레디 역시 주부들의 고충을 너무도 잘 알았다. 「I am woman」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이야기와 함께 이를 강하게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를 노래한다.

"제때 딱 맞춰 왔어요. 여성운동에 관여하게 됐고, 약한 사람들, 고분고분한 사람들 그리고 약하고 우아한 모든 것들에 관한 노래도 라디오에 많이 나왔죠. 우리 가족 여자들은 전부 강했어요. 그들은 노동을 했고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직접 겪었죠. 난 결코 내가 고분고분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 2013년 시카고 트리뷴 인터뷰 중



이후 헬렌 레디는 주체적인 뮤지션으로서의 삶을 주창한다. 척 베리(Chuck Berry),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케이씨 앤드 더 선샤인 밴드(KC and the Sunshine Band), 비지스(Bee Gees) 등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출연한 심야 음악 버라이어티 쇼 <The Midnight Special>에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고정 호스트를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1973년 <The Helen Reddy Show>와 1979년 <The Helen Reddy Special>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버라이어티 쇼를 진행한다. 여성들이 직업을 갖지 못하고 가사 노동에 집중되어있던 시기였기에 더욱더 유의미했다.

“나는 현명해요. 그 지혜는 아픔에서 온 거죠. 나는 강해요. 나는 여자입니다.”

헬렌 레디가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페미니즘 메시지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투사임과 동시에 재능있는 뮤지션이었다. 「I am woman」과 동일 앨범에 수록된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이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 OST 앨범에 수록되며 이름을 알리는 데 일조했고, 풍성한 코러스와 온화하고도 파워풀한 가창력이 돋보이는 「Delta dawn」, 마이너한 편곡과 의미심장한 가사가 돋보이는 「Angie baby」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했다. <에어포트 75>,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에 출연했고, 그중에서도 <피터의 용>에서는 주연을 맡으며 OST인 「Condle on the water」로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 업적을 남겼다.

싱글맘으로의 삶, 세 번의 결혼을 겪은 헬렌 레디는 세상에 “See me standing toe to toe(정면으로 세상에 맞서는 날 봐).”라 선언했다. 그는 음악의 힘으로 나약한 현실을 강인함으로 승화했다. 시카고 트리뷴 인터뷰에서 「I am woman」이 이토록 성공을 거둘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노래를 여성들의 연대를 이끈 결정적인 노래로 기억한다. “나는 현명해요. 그 지혜는 고통에서 온 거죠. 나는 강해요. 나는 여자입니다.” 페미니즘 이슈가 계속 화두 되는 세상 속 「I am woman」의 메시지는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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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플레이리스트를 사로잡은 팝스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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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음악 취향은 더 넓어지고 더 다채로워졌다. 무수한 요인 중 하나는 늘어난 팝의 비중일 터. 스트리밍 서비스 차트에서 팝 음악이 얼굴을 비추는 경우는 어색한 일이 아니며 여기에는 유튜브의 역할이 막강하게 자리한다. 특히 유튜브의 인기 콘텐츠 '재생 목록 채널'로 우리는 검색을 하지 않고도 쉽게 팝 음악을 접할 수 있다. 음악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가수들을 소개하고 원하는 음악을 접하는 방법은 편리해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빌보드 1위에 오르지도, 영화 OST로 주목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한국의 플레이리스트를 장악한 아티스트 6명을 알아보도록 하자. (하단의 5곡은 이들의 대표곡과 추천곡을 무작위로 작성한 것이다.)


알렉 벤자민(Alec Benjamin)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가사에 소년 같은 미성을 더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2016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작업물과 데모곡을 꾸준히 업로드하여 점차 이름을 알렸고 2018년 식어버린 연인의 감정을 노래한 'Let me down slowly'의 성공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유튜브 '워너 뮤직 코리아' 채널의 가사 번역 영상이 입소문을 타면서 2019년 단독 내한공연까지 올렸고 방탄소년단의 지민과의 친분을 통해 톡톡히 눈도장을 찍었다. 자신의 누나 이야기이자 미혼모를 그려낸 'If we have each other', 가정 폭력을 담은 'Must have been the wind' 등 현실적인 스토리텔링과 어딘가 음울한 보컬은 가슴 저편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Let me down slowly
If we have each other
Water fountain
Oh my god
Outrunning karma


라우브(Lauv)

사자를 뜻하는 예명처럼 강렬하면서도 정갈한 노래로 한국 플레이리스트를 휘어잡았다. 넷플릭스 인기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 삽입된 'I like me better'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고 이후 발매한 'Paris in the rain'은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이다. 후자의 경우, 2019년 국내 실시간 차트 100위 권 내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으며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첫 정규앨범 <how i'm feeling>에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면서 기본기를 놓치지 않았고 인터넷 세대의 외로움을 담아 보편적 감성을 끌어올린다. 트로이 시반, 앤-마리 그리고 방탄소년단 등 내로라하는 가수와의 협업도 주목할 점. 특유의 고독함은 쉽게 잠들지 못하는 새벽 감성을 불러 일으킨다.

I like me better
Paris in the rain
i'm so tired…(with Troye Sivan)
fuck, i'm lonely (Feat. Anne Marie)
Changes



코난 그레이(Conan Gray)

2020년 상반기를 점령한 노래 중 하나를 꼽으라면 꼭 넣어야 할 'Maniac'의 주인공이다. 가수 이전에 구독자가 2백만 명을 훌쩍 넘는 유튜버로 SNS 세대에게 최적화되어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데뷔 앨범 <Kid Krow>가 빌보드 앨범 차트 5위에 차지하면서 산뜻하게 출발하였고 스포티파이, 틱톡 등 플랫폼에 힘입어 엄청난 상승세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Maniac'은 길거리를 나서면 쉴 새 없이 들릴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앨범 커버 속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반대되는 세밀한 목소리는 청춘의 멜랑꼴리한 심정을 온전히 나타낸다. 그야말로 반전 매력의 소유자!

Maniac
Heather
Generation why
Idle town
Lookalike



제레미 주커(Jeremy Zucker)

더 이상 '나만 알고 싶은 아티스트'가 아니다. 라우브, 앤-마리와 함께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를 꽉 붙잡고 있는 제레미 주커의 노래 또한 가요 수준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차분하게 흐르는 어쿠스틱 기타 아래 살짝 긁어내는 듯한 보컬은 달콤 쌉쌀한 분위기와 함께 안정감을 제공한다. 2019년 'Comethru'가 대한민국을 강타하자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와 활발한 인터뷰를 하는 등 한국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내한 공연에서 언급한 '음악은 보편적인 언어(Music is universal language)'라는 말처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도 솔직한 가사로 위로를 받고 있다.

Comethru
Always i'll care
Desire
All the kids are depressed
Not ur friend


톰 미쉬(Tom Misch)

미국의 전 대통령 오바마가 꼽은 '2018년 최고의 노래' 중 톰 미쉬의 'Disco yes'가 있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90년대 얼터너티브 힙합을 대표하는 드 라 소울,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에서 영감을 얻고 재즈 피아노와 기타 멜로디를 얹어 나른함을 더했으니 말이다. 여기에 일렉트로닉 요소를 더해 젊은 층을 포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Movie' 영상에 누군가 '톰 미쉬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감정을 만든다.'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이처럼 감정을 노래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과정을 통해 그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Movie
Watch me dance
It unrs through me
Lost in paris
South of the river


맥스(MAX)

배우, 모델 그리고 매시업과 커버 영상을 선보이는 유튜버로 만능 엔터테이너의 길을 걷고 있는 진정한 음색 깡패. 2015년 삼성 기어 광고에 'Puppeteer'가 삽입되면서 점차 수면 위로 오르다가 'Lights down low'가 빌보드 20위를 차지, 방탄소년단 멤버가 'Love me less'를 추천곡으로 소개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쨍한 색감과 감각적인 편집으로 힙한 감성을 드러낸 뮤직비디오 역시 인기를 구가하게 된 요인 중 하나. <Hell's Kitchen Angel> 이후 4년 만에 발매한 <Colour Vision>의 타이틀 'Checklist'가 또다시 한국 유튜브를 휩쓸면서 여전한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Checklist
Lights down low
Acid dreams
Worship
Love me 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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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떠나는 브라이언 맥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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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가수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가 지난 6월 새 앨범 <Exodus>를 발표했다. 2017년에 낸 전작의 제목이 '창세기'(Genesis)였고, 이번 앨범은 '출애굽기'이니 얼핏 성경 시리즈로 여겨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성서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으며, 가스펠이나 CCM의 성격을 띠지도 않는다. 두 작품 모두 내내 연정만 표할 뿐이다. 혹여나 구약을 테마로 했다면 음악 팬들은 개신교 기준 서른일곱 장의 앨범을 더 만나야 한다. 그 기나긴 여정이 펼쳐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종교와 무관하긴 해도 '탈출'이라는 뜻의 표제에는 확실히 각별한 의미가 서려 있다. <Exodus>가 마지막 음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뮤지션 경력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다. 신곡으로 채운 음반은 더 내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공연이나 리메이크 음반 제작 등 여타 활동에 대한 여지는 남아 있다. 은퇴 선언에 훗날을 지혜롭게 대비해 뒀다.

자신은 그동안 누군가를 생각하며 곡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두 아이를 낳았으며, 십수 년을 같이 산 전 부인이 들으면 서러움을 넘어 기분 잡칠 발언이다. 반면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올해 초부터 <Exodus>가 마지막 앨범임을 공언해 왔다. 그는 2003년 이혼 후 2014년 새 인연을 만나 2017년 두 번째 가약을 맺었다. 1992년 데뷔해 지금까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상당수 만들고 불렀지만 한 인터뷰에서 사실 현재의 아내를 만난 뒤에는 그녀가 거의 모든 노래에 영감이 됐다고 밝혔다. 지천명을 넘긴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소중한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창작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랑과 가정 핑계를 댔으나 거듭된 상업적 부진도 음악계에서 발을 빼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1993년 버네사 윌리엄스(Vanessa Williams)와 부른 드라마 <비버리힐즈의 아이들>(Beverly Hills 90210) 사운드트랙 'Love is'를 시작으로 'One last cry', 'You should be mine (Don't waste your time)', 'Back at one'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배출하며 1990년대의 대표 R&B 스타가 됐다.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으나 1997년에 출시한 'Anytime'은 우리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새천년에 넘어와서는 빌보드 싱글 차트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영광의 시절보다 시련의 시기가 훨씬 길었다.



그럼에도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성적에 초연한 듯 본인만의 어법을 고수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Exodus> 역시 차분한 곡 위주로 꾸렸다. 포근한 느낌의 반주와 가성이 잘 어우러진 'Stay on ur mind', 어쿠스틱 타악기와 온화한 키보드 연주를 앞세워 담백함을 제공하는 'Hula girl (Leilani)' 적당한 리듬감으로 90년대 R&B 발라드 형식을 재현한 'When I'm gone' 등 편안하게 감상하기에 무난한 노래들이 마련돼 있다. 이따금 나오는 리드미컬한 곡도 번잡하거나 우악스럽지 않다. 앨범은 그저 순하기만 하다.

물론 듣기 편하다고 해서 다 인기를 얻는 것은 아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곡들은 오늘날 R&B 동향과 멀찍이 거리를 둔다. 젊은 음악 애호가들은 대체로 이런 심심한 음악을 선호하지 않는다. 더욱이 젊은 세대는 그들과 비슷한 연령의 가수들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결국 싱글로 낸 노래들과 앨범은 어느 차트에도 입장하지 못했다. 약 30년의 음악 생활을 정리하며 작별을 고하는 자리도 그늘이 잔뜩 졌다. 그래미 시상식에 열일곱 번이나 후보로 호명됐지만 단 한 번도 상을 가져가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면 그의 퇴장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작금의 상황은 오랜 세월 한 우물만 판 것에 기인한다.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컨템퍼러리 R&B 영역을 이탈한 적이 없다. <Exodus>까지 열여섯 편의 모든 앨범에 어느 정도 탄력이 있는 곡, 각 시절에 뜨던 R&B 트렌드를 흡수한 곡을 몇몇 싣곤 했으나 큰 줄기는 언제나 잠잠한 R&B, 어덜트 컨템퍼러리였다. 동료 뮤지션들의 초대를 받아 참여한 작품들도 브라이언 맥나이트 개인의 세상과 거의 동일했다. 1994년 힙합 듀오 일 알 스크래치(Ill Al Skratch)와 함께한 'I'll take her'에서도 느른한 비트를 배경으로 나긋나긋한 보컬을 입혔다.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스타일은 어디에서도 계속됐다. 이 확고한 정체성(正體性)은 안타깝게도 고루한 정체성(停滯性)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장기간 무력했고, 피날레마저 볼품없을지라도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분명히 귀한 성과를 남겼다. 한결같은 걸음이 특징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본보기를 생성했다. 그는 R&B와 팝의 요소를 버무려 이룬 부드러운 곡조, 로맨틱하게 애정을 표하는 가사를 일관되게 펼침으로써 색이 뚜렷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리와 노랫말은 R&B가 더 많은 이에게 퍼지는 데 도움이 됐다. 정교함과 절제를 겸비한 발군의 가창은 가수 지망생들에게 교범처럼 여겨진다. 지금도 많은 이가 유튜브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를 커버한 영상을 올리고 있다.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지나온 길은 이처럼 빛도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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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경이로운 음악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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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런던에서 첫 선을 보인 뮤지컬 <캣츠>가 장기공연의 기록부문에서 2019년 현재, 브로드웨이 사상 4번째, 웨스트엔드 사상 6번째에 올라있지만 무수한 뮤지컬 작품 중에서 단연 압도하는 게 있다. 그래서 흥행순위와 무관하게 대중적 인지도에서 1, 2위로 꼽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음악과 춤, 가무(歌舞)다. 얼핏 종결의 무게감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약점이 존재한다. 뮤지컬 흥행을 좌지우지하는 '감동'의 원천, 다름 아닌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희생시키고 노래와 춤만을 내거는 것은 드라마 부재 즉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위험 소지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다양한 고양이들의 삶 이야기인 이 작품은 젤리클 고양이 선발 무도회가 지배하면서 악당 고양이 매캐비티가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로노미를 납치하는 사건을 중간에 삽입한 것 외에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다. <맘마미아>와 같은 주크박스 뮤지컬도 대본의 완성도를 전제해야 대중적 승부가 가능하다.

<캣츠>의 경우 태생부터가 달랐다. T.S. 엘리엇의 1939년 우화집 <지혜로운 고양이에 관한 주머니쥐의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에 매료된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1977년 여기 등장하는 여러 고양이들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 뮤지컬에 도전하는 대담한 기획에 돌입했다.

이 순간 <캣츠> 음악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성격과 배경을 가진 고양이들 - 검비 고양이 제니애니도츠, 반항아 고양이 럼 텀 터거, 극장 고양이 거스, 말썽쟁이 커플 고양이 멍고제리와 럼블티저, 철로 고양이 스킴블섕크스 등등 -에 대한 음악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다양성'을 의미했다.



서로 다른 고양이들을 통해 음악의 다양성을 구현

이런 점에서 <캣츠>의 음악은 실제 뮤지컬을 본 사람과 (지금까지 관람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식의 차(差)가 존재한다. 두 집단을 포괄하는 노래가 있다. 다름 아닌 뮤지컬 절대 명곡 'Memory'다. 이 뮤지컬을 모르는 사람도 아는 노래가 '메모리'다 보니 '캣츠 = 메모리'라는 조금은 '부당한' 등식이 아주 오래전부터 구동해왔다.

물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오페라 유령>의 'All I ask of you', <에비타>의 'Don't cry for me, Argentina'와 함께 명작으로 묶일 위대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팝 발라드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 아리아 형식의 노래가 작품을 온전히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전체 극의 톤을 구축하는 노래로 작품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노래'인 'Jellicle songs for Jellicle cats'를 관객은 더 기억할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사와 멜로디의 궁합이 그야말로 입에 짝짝 붙는 이 노래의 제목을 흥얼거리곤 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격렬하게 빠져들도록 자극하는 곡이다. <캣츠>에 만약 대형 호화 뮤지컬이라는 수식이 붙는다면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형 호화 음악'이 맞으며 그 대형 호화의 시작점이 이 곡이다.



그리고 난 뒤 천재의 산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각각 고양이 테마의 수작들이 이어지면서 황홀 사운드의 세계로 우리를 끌고 간다. 하나에 여러 곡조가 뒤섞인 제니애니도츠 고양이 곡 'The old gumbie cat'을 시작으로 작품 전체에서 가장 유쾌한 곡이라고 할 '럼 텀 터거(Rum tum tugger)'를 거쳐 작품의 중요한 캐릭터인 그리자벨라의 테마 곡 'Grizabella: The glamour cat', 그리고 코믹한 분위기의 상류층 도회지 고양이 곡 '버스터 존스(Bustopher Jones)'에만 이르러도 관객들은 그로기상태가 된다.

압도적 순간들, 자기망각의 순간들, 무장해제의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들이다. 고양이 의상과 분장을 한 캐스트들의 역동적인 댄스도 있지만 절정으로 견인하는 주체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음악이다. 그 정체는 상기한 '다양성'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곡들을 줄줄이 써냈는지 의아할 정도.

'그리자벨라: 더 글래머 캣'의 경우 나중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전통적인 '파사칼리아' 형식의 베이스 라인이 압권이다. 낮은 성부를 반복하다가 변주해가는 느린 3박자의 춤 형식을 가리키는 파사칼리아는 아마도 바흐나 쇼스타코비치를 탐구했을 웨버의 클래식 기반을 시사한다. 이 곡을 최우수 <캣츠> 음악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선율의 '올드 듀터로노미(Old Deuteronomy)' 또한 미감(美感)이 빼어난 멜로디다.



2막의 노래들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극장 고양이 거스('Gus: The theatre cat'), 춤과 행진 욕구를 부르는 철로 고양이 스킴블섕크스('Skimbleshanks: The railway cat') 그리고 육감적이고 매혹적인 곡 매커비티('Macavity', 팜므 파탈 고양이 밤불루리나가 악당 매커비티에게 바치는 노래)도 경이적 곡조의 퍼레이드를 선사한다.

2019년 영화 버전에서 톱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부른 후자는 조금 편곡을 달리한다면 상업적 팝 싱글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윙 감을 지닌 해피 송 '미스터 미스토펠리스(Mr. Mistofelees)'도 베스트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처음부터 등장하는 코러스 파트의 '..and they all say, oh, well, never was there ever..'는 꽤나 익숙하다.

그리고 'Memory'... 아름다운 고양이로 전성기를 수놓았던 그리자벨라는 돌아왔지만 이제는 늙고 외로운 고양이로 추락해 주변의 의도적 거리두기를 당한다. 화려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포용을 갈구하는 이 노래는 초연 때부터 일레인 페이지(Elaine Paige)의 노래로 관객들의 전율을 야기한 바 있다. 음악학자 제시카 스턴펠드는 '지금까지 뮤지컬에서 나온 곡 가운데 가장 성공한 곡'으로 일컬었다. 'Memory'로 극중 그리자벨라는 새 생명을 얻었다면 <캣츠>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할까.




가장 음악으로 성공한 뮤지컬, 음악의 낙원을 선사하다

누구라도 그리자벨라 관련 두 곡 'Memory'와 'Grizabella: The glamour cat'의 빼어난 곡조를 사랑한다. 하지만 <캣츠>가 제공하는 행복음악은 이것 말고도 'Jellicle songs for Jellicle cats'와 'Rum Tum Tugger', 'Macavity' 등 부지기수다. 어느 한곡에 무게가 쏠리지 않고 각 고양이 관련 테마곡들 모두가 평등하게 감동을 배분하는 작품은 팝 앨범으로 비유하자면 '베스트 컴필레이션'이다.

그만큼 템포, 스타일, 진행이 곡마다 천차만별이다. 이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천재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캣츠>로 떠오르는 이름은 많다. 연출가 트레버 넌, 미술의 거장 존 네이피어, 안무가 질리언 린,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 하지만 무엇보다 으뜸은 40년 관객 사랑이라는 경이를 창출한 시대불변(timeless) 음악의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익숙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그만의 각별한 터치가 살아 숨 쉬는, 놀라우리만치 다채롭고 풍요로운 음악... 말 자체가 모순일지 모르지만 <캣츠>는 가장 성공적인 '음악 뮤지컬'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토대의 작곡가가 대중의 시대에 가야할 길을 시범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위대한 40년 역사'를 쌓은 이 작품을 통해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우리에게 선사한 영토는 '음악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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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택트의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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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산으로 더 이상 인산인해를 이룬 과거의 음악 페스티벌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새로운 플랫폼의 공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온라인 비대면 온택트(On-tact)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도 이에 속한다. 9월 18일 느지막한 저녁, 평소라면 수많은 관객의 열기로 가득 차 있을 플랫폼창동61 레드박스의 드문 인적이 매우 낯설었다. 처음 마주한 온라인 콘서트의 현장은 드라이 리허설을 떠올릴 정도로 휑한 기운이 돌았으나 온라인 화면의 시청자들이 출연진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은 모두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일방향으로 방영되는 기존의 언택트(Un-tact) 공연과 달리 이들은 아티스트와 관객 간 소통이 가능한 화상 채팅 프로그램 'Zoom'을 통해 진행되었다. 스테이지와 함께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팬들의 모습이 동시에 송출된 덕분에 서로가 단조로움과 답답함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핸드폰 네온사인을 들고 응원하는 시청자, 부모님과 함께하는 아이부터 노란색의 드레스코드를 맞춰 입은 이들까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대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골든핑거 기타페스티벌'은 기타만이 주인공이 되는, 온전한 기타의 사운드를 담아낸 축제로 올해 3회째 퍼포먼스를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인 장호일(015B), 유병열(전 YB밴드, YBY그룹), 박창곤(이승철과 황제), 박영수(지하드), 조필성(예레미), 하세빈(네메시스)이 음악 평론가 임진모의 진행과 함께 한곳에 모여 또다시 레전드 무대를 선포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Love affair'로 첫 무대를 장식한 하세빈은 기타를 마치 피아노처럼 다루어 멜로디에 집중할 수 있는 연주를 선보였다. 네미시스의 'Crescent moon', 'Emotions'로 예열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이어 장호일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Surfing with the alien', 'Aneka'로 깊은 원숙미를 그렸고 015B의 대표곡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신나는 기타 연주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그 시절의 저력을 확인했다.

특유의 여유로움을 자랑하는 조필성은 'Sorry to say I love you'로 우리를 늦여름의 바닷가로 데려갔으며 한영애의 '누구 없소'로 즐거움을 더했다. 드라마틱한 속도를 자랑하는 박영수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 갔다. 특히 'Dragon of dreams'에서 악기와 합일된 아티스트의 모습은 멀리서 지켜보는 관객들도 빠져들도록 끌어당기는 힘 자체였다.



섬세함과 동시에 세찬 파동을 가진 유병열의 무대를 한 단어로 함축하자면 '힐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만의 주법이 녹아든 'You raise me up'으로 모두 숨을 고르는 시간을 보내며 앞선 무대와 또 다른 인상을 받았다. 피날레를 장식한 박창곤은 'The winter', 'Beautiful world'의 굵직한 선율과 과감한 퍼포먼스로 전율을 심었다. 6인 6색의 다른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잠시 잊혀진 록 스피릿을 깨우고, 록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때를 회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올해 2월에 열린 2회차 공연과 셋 리스트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점과 합동 무대가 빠진 것은 아쉽지만, 변화한 환경에 맞춰 등장한 새로운 창구의 승리를 증명한다. 무대와 온라인 라이브를 둘 다 접한 입장으로서 생생한 현장감을 제대로 구현했다는 것이 이 공연의 핵심이라 확언한다. '한국 최초 Zoom을 통한 HD 화질 라이브'라는 문구가 곧 주최 측의 노력과 팬데믹 시대 속 비대면 문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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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M이 음악에서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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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국을 관통한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흑인 차별 반대(Black Lives Matter, BLM)다.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 경찰에 의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살해는 미국 전역을 뒤흔든 시위로 이어졌고, 제도적 인종차별의 피해자들에 대한 연대는 음악계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비욘세, 앤더슨 팩(Anderson. Paak)을 비롯한 흑인 가수들이 저마다 시위를 지지하는 싱글을 냈고, 음악산업 종사자들은 소셜미디어 해시태그를 통해 블랙아웃 튜스데이 캠페인(#blackouttuesday)을 진행하며, 6월 2일 하루 동안의 침묵을 통해 BLM의 메시지와 자원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동시에 대중음악 속 흑인음악의 영향력은 전에 없는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2019년에는 리조(Lizzo)와 릴 나스 엑스(Lil Nas X), 올해에는 도자 캣(Doja Cat), 메간 더 스탈리온(Megan Thee Stallion), 로디 리치(Roddy Ricch) 등이 차트를 뒤흔들었다. 힙합과 알앤비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핵심 장르로 자리 잡아, '레트로 열풍'을 위시한 뉴 잭 스윙의 소비가 재점화된 지 오래다. 흑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제도적인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대중음악을 점령하기 시작한 흑인음악의 영향력. 이 두 흐름은 무관하지 않다.



사회에서 비주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겪게 되는 상황 중 하나가 바로 '지워짐'이다. 주류가 비주류의 문화를 차용하면 원래의 맥락이 지워지고 새로운 맥락이 생겨난다. 음악계의 BLM운동이 주목하는 지점이 여기다. 흑인들의 음악을 사랑한다면 흑인들도 사랑하는 사회가 되어야지, 음악만 남긴 채 흑인들을 지워내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다. 6월 말, BLM을 테마로 온라인에서 개최된 흑인 엔터테이너들의 축제 BET 어워즈는 “우리 문화는 없는 셈 치기엔 너무 크다(Our culture is too big to be cancelled)“는 오프닝 멘트로 그 에토스를 담아냈다.

피부색을 기반으로 한 차별과 억압도, 이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긴 음악도 2020년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런 더 쥬얼스 (Run The Jewels)는 이번 BLM 시위를 지지하며 신보 <RTJ4>를 예정보다 일찍, 무료로 배포하며 백인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사회를 '눈 속을 걷고 있' 는듯한 기분에 빗대어 노래했지만, 5년 전 2015년에 켄드릭 라마가 <To Pimp A Butterfly>로 먼저 '우린 모두 괜찮을 것'이라며 공권력의 부당한 위력 행사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로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흑인 음악계 저항의 역사는 1980년대에 'Fuck tha police'라며 분노를 폭발시킨 N.W.A를 지나서도 계속된다.



흑인은 범죄자일 확률이 높다는 편견이 피부색이 다르다는 타자성과 합쳐져 불공평한 검문과 과잉진압으로 이어지고, 흑인 음악과 문화에는 그 설움이 묻어난다. 파고 들어가 보면 제도적인 인종 차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례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레드 라이닝(Red Lining), 즉, 특정 구역에는 흑인이 부동산을 구매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태가 합법적으로 행해졌다. 돈이 있어도 흑인이라면 백인들과 함께 살 수 없고, 교육을 포함한 지역 예산 배분 및 집행이 백인들의 동네 위주로 돌아가면서 흑인들이 사는 동네는 점점 낙후되어 가난의 악순환에 갇힌다. 갱스타 랩의 성지 콤프턴도, 이사 오는 흑인들을 피한 백인들의 교외 이주(White Flight)에서 탄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런 더 쥬얼스의 활동이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래퍼 킬러 마이크(Killer Mike)는 구조적인 차원에서 흑인 사회의 재기를 위해 노력해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애틀란타에서 낙오된 구직자들에게 커리어의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 미용실을 운영 중이고, 갱 단원들의 갱생을 돕고자 이들의 이름을 딴 콜라(Crip-a-Cola, Blood Pop)를 출시해 판매했다. 자본과 사회로부터의 소외를 방지해 근본적으로 폭력을 근절하려는 노력이다. <RTJ4>의 가격을 자율 지불로 설정해 배포하고, 모든 수익을 BLM 관련 단체에 기부하는 건 이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켄드릭 라마의 음악 역시 구조적인 소외의 현실을 수면 위로 끌어내 묘사했기 때문에 강력하다. 콤프턴에서 자라면서 목격한 동네의 경제적 소외와 만연한 폭력,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고향에 대한 애증의 감정들은 백인들 듣기 좋으라고 노래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에게 그들의 경험과 감정이 정당하다는, 공감을 통한 위로를 건넨다. 그 증거로 BLM 시위대들은 'Alright'의 가사를 외치며 행진하고, 흑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공론화될 때마다 이 곡의 스트리밍 수가 폭등한다. 대대적인 BLM 시위가 벌어질 때면 '켄드릭은 어디 있냐'고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그와 그의 음악은 저항과 연대의 상징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은 비단 킬러 마이크와 켄드릭 라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차일디쉬 갬비노(Childish Gambino)가 노래했듯, '이게 미국이다.' 바다 건너에서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남의 음악을 들으려면 남의 일을 알아야 한다. BLM이 이야기하는 억압과 차별은 흑인 뮤지션들도 예외 없이 겪어온 현실이다. 저항과 연대의 정서가 2020년에만 반짝 떴다가 질 유행이 아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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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 기타리스트들의 밴 헤일런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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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호령한 밴드 밴 헤일런(Van Halen)의 축인 기타리스트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 지난 10월 6일 65살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Eruption'부터 1983년 마이클 잭슨의 'Beat it', 그리고 밴드의 스매시 'Jump'에 이르기까지 마치 건반 연주와도 같았던 그의 경이로운 기타 워크는 동시대의 무수한 기타리스트와 지망생들에게 일대 충격을 던지면서 새 역사를 열었다. 당대 일렉트릭 기타 플레이 전반이 에드워드 자기(磁氣) 작용이 미치는 공간에 속했다고 해도 과장일 수 없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으로부터 어떠한 영감과 영향을 받았는지 우리 9인 기타리스트들이 전하는 추모의 헌사를 만난다.



신대철 / 시나위

중학생 때 재킷이 멋져서 산 백판을 통해 'Eruption'을 들었을 때 실로 멘붕에 빠졌다. '사람이 친 건가', '과연 이게 기타 연주 맞나'.. 그건 가히 혁명이었다.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만 알다가 갑자기 솟구쳐 올라 '이렇게도 연주가 되는 거구나'를 일깨운 것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발상의 연주였다. 그는 또한 기타리스트를 넘어 키보드 연주도 출중하고 작곡 솜씨도 빼어났던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사망 소식을 접한 뒤 유투브 영상을 보다가 하루 종일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무 슬프다.



유병열 / 전 YB, 현 YBY

기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사람이다. 지미 헨드릭스에 이어 또 한 번 연주에 있어서 기존 질서의 파괴를 이끌었다. 에드워드 밴 헤일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양손 태핑일 텐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완벽하게, 마치 건반을 치듯 연주한 것은 그가 시발점이었다. 그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 테크닉은 하나의 유혹이었고 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타를 잡은 사람이라면 다 그랬듯 기타 연주의 극점까지 가야 했기에 'Eruption'은 성장 프로세스에 있어서 필수 레퍼토리였다.



김도균 / 백두산

1980년대 기타 연주를 완벽하게 주도한 인물이다. 프로 포함 아마추어까지 모든 기타리스트의 주법이 그의 영향 아래 있었다. 1980년대는 실로 '기타 올림픽' '기타의 시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기타리스트들이 잇달아 출현하면서 1970년대 구축된 기타연주가 정점에 도달한 시절, 그 상승흐름을 압축한 인물이 바로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었다. 라이트핸드 주법도 그렇다고 보는데, 클래식을 모티브로 한 '네오 클래시컬' 장르의 문을 연 사실도 빼놓을 수 없고... 그에게는 '역사'란 말을 붙여야 한다.



양지완 / 퍼플레인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20대, 30대 전성기 때 모습으로, 기타 아이돌로 남아 있다. 그 우상이 사라져 믿기지가 않는다. 그 빨간 색 의상 하나만으로도... 그를 한창 카피하고 연습하면서 느낀 것은 비록 양손 태핑, 라이트핸드 주법으로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리프를 창작한 거라든가 음악에 맞게 기타 연주를 만들어가는 것을 정말 잘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기타 테크니션이 아니라 아티스트였다.




조필성 / 예레미

초년생일 때 기타영웅이었다.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웅이란 그런 칭호는 최초를 받은 인물이라고 본다. 나도 단순히 주법뿐 아니라 기타 톤, 그 둥글둥글한 톤을 닮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심지어 쇼맨십까지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법은 너무도 생소했고 희한했으며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나중 라이브 영상을 보면서 '저렇게 치는구나' 확인했을 때의 전율. '와∽ 원 맨 솔로 기타 하나로도 저렇게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구나..' 정말 놀라움 투성이었다.



하세빈 / 네미시스

기타를 시작함에 있어 영감을 준 여러 기타리스트가 있었지만 그중 히어로 중 히어로가 에드워드 밴 헤일런이었다. 큰 별이 졌다. 그런 인물이 유명을 달리해 더 슬프다.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점점 기타의 히어로가 사라지고 있는 시절이라 더 그렇다. 그가 새롭게 개발해 이제는 역사가 된 태핑 주법은 기타리스트라면 대부분 사용하고 나도 때로 동원할 만큼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다. 내게 밴 헤일런의 영향은 상당했다.



타미 김 / 전 김종서밴드, 현 타미 김 블루스 밴드

SNS를 통해 처음 부고 소식을 접했을 때 이렇게 말하면 과장일지 모르지만 친인척이 사망한 것만큼 가슴이 쓰렸다. 나는 그로부터 연주뿐 아니라 음악을 하는 태도와 삶의 모습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았다. 기타의 모든 것을 규합해서 그렇게 창의적으로 연주한 사람이 그전에는 없었다. 우리는 모두 '포스트 밴 헤일런'으로 규정해야 하고 폴 길버트, 리치 캇슨을 포함한 해외의 많은 기타리스트들처럼 나도 밴 헤일런 키드다. 내게는 지미 헨드릭스보다 임팩트가 3배 이상은 컸다.



박창곤 / 이승철황제밴드

기타리스트라면 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 경우는 어렸을 적부터 특별히 경배해 마지 않았다. 그 연주를 너무 닮고 싶었다. 흔히 에드워드 밴 헤일런 하면 태핑, 해머링의 주법 측면에서 많이 얘기되지만 나는 그 톤을 더 좋아했다. 그걸 제대로 재현하고 싶어서 여러 브랜드의 기타를 사곤 했다. 난 한마디로 그가 기타를 가장 '자유분방하게' 연주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박영수 / 지하드

솔직히 그를 추종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도 그로부터 영향과 자극을 안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기타에 홀렸던 키드 시절, 기타의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주고 연주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사람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칠수록 빠져드는 오묘한 기타의 매력을 더 느끼게 해준 인물이다. 그 환상의 연주를 더 듣지 못하게 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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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 음악을 타고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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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수십 곳이 줄지어 성업하던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가운데 '열애'(윤시내)와 함께 남아 있는 두 카페 중의 하나 '쏭아'를 찾았다. 송창식의 별칭인 쏭아(Ssonger) 타이틀대로 송창식이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곳이다. 그는 지금의 젊음은 가늠하기 힘든, 절대적이고 거한 존재감으로 베이비붐 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전설이다. 근래 듀엣이라는 말이 그렇듯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무대를 서는데 이날은 송창식 혼자 노래했다.

그의 소리는 카페 공간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본인은 '잘 안 된다'고 나중 말했지만 현장에서 듣기에는 환상적인 발성이자 우람한 소리덩치였다. 게다가 본인 취향이 아닌, 팬들이 좋아하고 신나하는 곡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한 게 더 놀라웠다. '관객들을 위한 배려'는 대중가수의 으뜸 덕목이다. 그는 신청곡도 받아 자신의 히트곡도 아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기도 했다.

2002년 인터뷰 때도 그랬지만 송창식과 자리할 경우 어김없이 인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에 잠시 피난한 것을 빼곤 성장기를 줄곧 인천에서 보낸 '원단 인천맨'이다. 지금도 인천에 남다를 애정을 간직해 자신의 모든 일이 '인천이랑 관련이 있는 일'이라며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 번쯤', '왜 불러', '상아의 노래'를 부른 뒤 관객의 신청곡도 받으셨어요. '푸르른 날',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맨 처음 고백', '우리는', '가나다라', '고래 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을 줄줄이 불러주셨습니다. 혹시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어떤 곡을 하셨을까요?

보통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많이 불러요. 사실 (공연 레퍼토리들이) 거의 비슷해요. 쏭아 라이브 클럽에서 똑같은 곡을 계속하면 관객들이 재미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신청곡도 받고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 섞어가면서 하지요.

'상아의 노래'는 뜻밖이었어요. '송창식'하면 싱어송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수두룩한 본인 곡을 놔두고 이 곡을 하실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물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요.

'상아의 노래'는 솔직히 잊고 있었던 노래에요. 제가 녹음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노랜가 찾아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이후에 제가 제 음반을 다시 사서 이 노래를 배웠어요. (웃음)

'상아의 노래'는 김희갑 선생님 곡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신청을 많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좋은 곡이니까 그렇겠죠? (웃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아의 노래'가 제가 제일 먼저 취입한 곡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이미자 씨가 먼저 발매한 곡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저에게 김희갑 씨가 부탁했어요. 그래서 취입을 했지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울어'라는 곡도 함께 녹음했죠. 저는 잊고 있던 것을 많은 분들이 제 기억 속에서 소환해주신 거예요. 김희갑 씨가 굳이 제게 '상아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는 제가 그 노래를 부르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보시는지.

목(성대)을 수술한 이후에 지금은 사실 '상아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테크닉으로만 부르게 되었어요. 다이내믹 그러니까 강약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원곡과는 완전 딴판이죠. 근데 3년 전에 다시 목 수술을 다시 했는데 지금은 오리지널도 안 되고 그 전 버전도 아니에요. 수술 이후 아직도 컨트롤이 안 되어서 아쉽습니다.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서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노인네 목소리가 나오겠죠? (웃음)



'한 번쯤', '왜 불러', '상아의 노래'를 부른 뒤 관객의 신청곡도 받으셨어요. '푸르른 날',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맨 처음 고백', '우리는', '가나다라', '고래 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을 줄줄이 불러주셨습니다. 혹시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어떤 곡을 하셨을까요?

보통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많이 불러요. 사실 (공연 레퍼토리들이) 거의 비슷해요. 쏭아 라이브 클럽에서 똑같은 곡을 계속하면 관객들이 재미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신청곡도 받고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 섞어가면서 하지요.

'상아의 노래'는 뜻밖이었어요. '송창식'하면 싱어송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수두룩한 본인 곡을 놔두고 이 곡을 하실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물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요.

'상아의 노래'는 솔직히 잊고 있었던 노래에요. 제가 녹음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노랜가 찾아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이후에 제가 제 음반을 다시 사서 이 노래를 배웠어요. (웃음)

'상아의 노래'는 김희갑 선생님 곡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신청을 많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좋은 곡이니까 그렇겠죠? (웃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아의 노래'가 제가 제일 먼저 취입한 곡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이미자 씨가 먼저 발매한 곡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저에게 김희갑 씨가 부탁했어요. 그래서 취입을 했지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울어'라는 곡도 함께 녹음했죠. 저는 잊고 있던 것을 많은 분들이 제 기억 속에서 소환해주신 거예요. 김희갑 씨가 굳이 제게 '상아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는 제가 그 노래를 부르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보시는지.

목(성대)을 수술한 이후에 지금은 사실 '상아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테크닉으로만 부르게 되었어요. 다이내믹 그러니까 강약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원곡과는 완전 딴판이죠. 근데 3년 전에 다시 목 수술을 다시 했는데 지금은 오리지널도 안 되고 그 전 버전도 아니에요. 수술 이후 아직도 컨트롤이 안 되어서 아쉽습니다.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서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노인네 목소리가 나오겠죠? (웃음)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부평·인천 출신 음악가들에 대해서 부각하며 로컬리티를 살리는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02년 저와의 첫 인터뷰에서도 인천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는데요.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인천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인천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쭉 자랐죠. '6.25 피난' 이후에 다시 돌아왔어요. 자라는 시기는 쭉 인천에서 지냈으니까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생의 기억은 다 인천에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 저의 고향이에요.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이 아직 다 인천에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음악성이 뛰어나서 친구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면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악보를 그릴 수가 있었어요. 귀로 듣고 악보를 그리는 능력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생각난 멜로디를 악보를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당시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일단 제 주변에는 없었어요. 그러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이 저더러 모차르트라고 했어요. 모차르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이 하도 그러니까 나도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니까요. (웃음)

음악을 향한 결심이나 열정의 기반이 인천이었겠네요.

그럼요. 초등학교 때부터예요. 가장 중요한 계기는 6학년 때, 인천여상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구경을 간 거였어요. 엄청난 쇼크를 받았어요. 사실 음악보단 지휘자라는 게 쇼킹했어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꿈이 됐죠. 하지만 당시 제가 입학한 서울예고에는 지휘과가 없었고,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작곡을 했었어야 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한 거예요. 하지만 아니었죠.

인천에서 경기도 콩쿠르를 학교 대표로 간 적이 있었어요. 1등 없는 2등이라는 것을 했어요. 1등이면 1등이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었죠. (웃음) 제일 잘했는데 1등 될 실력이 안 되었나 보죠? (웃음) 그래도 나는 '노래는 제일 잘한다!'는 자부심은 있었어요.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로만 알고 성악과를 갔는데, 내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웃음) 그때 처음 알았죠. 음악이라는 것이 공부를 해야 하는 지성적 행위구나.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성악도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에요. 그런 점들에 충격이 커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2002년 인터뷰에서 그때까지 도니체티 오페라 < 사랑의 묘약 >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클래식 말고는 아는 곡이 없고 대중가요에 대한 접점이 없었다고 하셨죠.

'쎄시봉' 가기 전까지도 대중가요를 몰랐어요. 서유석 씨를 고등학교 캠핑 때 처음 만났는데요. 기타 치면서 팝송을 부르는데 에디 아널드(Eddy Arnold)의 'I really don't want to know'라는 곡이었어요. 곡 중간에 '하우 매니(How many~)'가 반복이 돼요. 그래서 저희가 그 형(서유석)을 '하우매니형'이라고 불렀어요. (웃음) 그 한 곡을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부를 정도는 안 되었죠, 저는 이후에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라는 오페라 곡 위주로 불렀어요. 쎄시봉에서도 이 곡을 불렀으니까요. 대신 트윈폴리오가 팝송을 해야 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맛을 내기 위해서 말이죠.

트윈폴리오 이후에도 솔로로 화려한 커리어를 개척했는데, 내 소리에 대해서 멋지다는 생각을 하셨는지요?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매료가 된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좋은 소리라고는 생각은 안 했어요. 왜냐면 록 음악을 못 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내가 록을 하려다가 목을 상했어요. 70년대에 많이 상했죠. '왜 불러'는 록을 하기 직전에 불렀던 노래에요. 진짜 록을 하고 싶었는데,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목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도 제 목소리가 굉장하다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50년 이상 노래를 하셨는데 만약 인생의 분기점 셋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처음에 쎄시봉에 가서 노래할 때 팝송을 했는데 조영남 씨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서울대 성악과 학생이 부르는데, 음악적인 가치가 대중음악에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왕 할 거라면 최고로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심이 결정적인 첫 분기점이죠.

트윈폴리오가 분기점이 아닌가요.

윤형주와의 트윈폴리오는 '연습' 기간이에요. 당시에는 내 목소리를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죠. 그런 면에서 트윈폴리오에 대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분기점은 군대 가서예요. 1973년도에 영장이 나왔어요. 안 가도 되는 거였는데. 유명 가수라고 해서 갔어야 했어요. 박정희 정부 시절엔 그랬어요. 안가면 매국노가 되는 시절이었죠.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그동안 했던 걸 돌아봤어요. 하루는 < AFKN 아마추어 블루스 콘테스트 >를 봤는데 아무리 봐도 나보다 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내 위치가 어디인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내가 20년 동안 음악을 했는데 미국 아마추어보다 못한다는 거였죠. 아주 창피하고 속상했어요.

음악적으로 무엇이 못하는 점이었나요?

모든 면에서 내가 못 한다고 느꼈어요. 한국에서 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후에는 또 < 전주 대사습놀이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봤어요. 여학생들 둘이 나왔죠. 하나는 가야금, 하나는 노래를 했는데 그날도 저 친구들도 저보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모두가 나보다 잘한다는 생각에 무너졌어요. 밤새 울어서 눈이 부어서 다녔죠. 너무 분했죠. 내가 바보인가? 음악을 수십 년 했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흉내만 냈으니까 잘할 리가 있겠느냐. 내 음악을 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간 공부했던 이론과 실기를 다 버렸어요. 진짜 분기점이죠. 그때 시작한 것이 지금의 노래에요.

음악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셨겠네요.

이후 깔봤던 음악들을 재평가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보니 내가 그걸 못했기 때문이에요 (웃음) 그때부터 유행가를 알게 되었어요. 진짜 대중음악을요. 7개월간 군 생활을 하고, 나오자마자 하던 곡들은 다 버리고 '한 번쯤'같은 곡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더 많은 팬이 송창식의 음악에 빠졌죠.

그래도 이전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군대 이후의 활동을 싫어했어요. 충실하게 노래하는 것을 왜 버렸냐고 실망하던 팬들도 많았어요. 특히 여성 팬들이 많이 떠났죠.

세 번째 분기점은요?

다음은 '가나다라'에요. 1979, 1980년도였는데요. 그때 음악이라는 것이 이론적이든 실기로든 저 스스로 적립이 되었어요. 공부해왔던 음악 이론이 다 정리되었어요. 내 몸이 가지고 있는 '한국말에서 나오는 음악'을 처음으로 냈죠. 이 작법에 대해서 논문을 썼으면 아마 박사가 됐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음악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작전을 짰어요. 한 번에 이런 이론들을 다 넣으면 너무 획기적이라, 제가 정리한 창작법을 한 곡에 10%, 20%씩 적용했다고 할까요.

그 시작이 '토함산' 아니었나요?

사실 시작으로 따지면 '피리 부는 사나이'예요. 1974년도에요. 아주 조금씩 넣었죠. 실제로 제대로 해볼까 마음먹은 것은 '가나다라'였어요. 당시 많이들 놀랐죠.

1985년 크게 히트한 '담배 가게 아가씨', '참새의 하루'도 많이 놀랐는데..

그 곡들 경우는 '내가 할 음악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다가 '과거에 했던 음악도 내 것이다'라고 해서 모든 것이 합쳐진 것에요. 부정해왔던 음악도 내 것이라 생각하니까 좋았어요. 그 곡들은 제가 공부했던 것들 이론들 모든 것을 합치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음악이 칼로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 번쯤', '가나다라'가 음악 인생에서 전기(轉機)가 된 곡인데 '피리 부는 사나이'도 중요한 곡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도 있죠. 실제로는 '뽕끼'가 많은 곡이에요. 트로트라는 것이 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까 늘 궁금했어요. 특히 음악적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트로트를 쉽게 받아들이는 특유의 한국적 감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우리말이라는 건 복잡한 지성으로 표현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라는 감성을 말이라는 지성으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기본적인 리듬에 복잡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트로트 감성이 잘 먹힌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송창식 트로트는 달랐어요.

달랐죠. 같은 뽕짝이라고 해도, 제가 예고에서 배운 것은 '음악이 잘게, 잘게 분석될 수 있다!'라는 것이에요. 감성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성도 충족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구사했던 트로트는 기본 리듬도 달랐어요. 당시에는 모두가 '뽕짝~ 뽕짝!'이었는데, 난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음악이 송창식에게 무엇인가요?

타고 다니는 것이에요. 인생이 한길이라고 생각하면 난 음악을 타고 가는 거죠. 이게 고장이 나면 안 되거든요.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음악 속에서 같이 있는 것이죠. 타고 가는 것에 목표 지점이 있으니까요. 목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죠.

왜 송창식 음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요.

배짱이 맞는 거죠. 체질이 같은 거니까요. 체질이 같지 않으면 절대로 히트가 안 돼요. 아무리 어렵고 좋게 만들어도 체질로 표현이 안 되면 히트하기 힘들어요. 초창기에 아름다웠던 목소리로 불렀던 것은 지성만 맞았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체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석을 하고 그것을 완성해야지요. 스테이지에서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상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전 속에서 있어요. 부르는 동안에는 내가 아닌 존재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내 노래가 절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이 쉽게 듣는 이유는 체질적으로 맞는 거예요.

고향 인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요.

사실 인천이랑 다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인천'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시작이 되었잖아요. 평생을 했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어요. (거기로 갈) 여건이 사실 안 되었어요. 여러 가지로요.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고요.

싫어하는 말이 있으신가요.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비난 댓글 같은 것에도 관심 없고요. 비난 댓글 쓰는 사람은 비난 댓글이 취미 생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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